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윤휴 - 왕과 사대부, 그리고 사관마저 지우려 했던 조선 최초의 자유로운 사상가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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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서적은 광해군 9년 태어나 숙종 6년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 유학자 윤휴의 일생과 조선의 북벌에 두고 벌어진 싸움을 주로 다루고 있다. 청나라 북벌을 주장, 양반들에게 군역의 세금을 물리려 한 진보적인 유학자였던 윤휴의 삶에서 현재 당을 초월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정치인들의 사고가 당시와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 서적이라 하겠다.

 

서적은 윤휴의 위인전처럼 윤휴의 삶을 주로 다루고 있다. 다만 초반부에는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킨 과정, 청나라 강희제가 등극한 후 운남, 귀주지역을 다스리던 명나라 출신 공신이며 제후인 평서왕 오삼계가 청나라에서 제후의 세습을 불허하자 복명의 기치를 들고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게 된 중국의 역사를 소개한다. 이 설명이 필요한 이유는 윤휴가 북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 시기 청나라의 상황이 매우 불안정한 시기였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함이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은 명황실의 신하이므로 조선의 임금도 자신들과 동급으로 취급하여 예송논쟁을 일으킨다. 서인들에 맞서 3년복설을 주장한 윤휴는 당시 모든 권력의 중심이었던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의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 번도 관직을 받지 않았던 윤휴는 효종의 뒤를 이은 숙종이 서인의 권력을 약화시키려한 숙종의 간곡한 요청으로 드디어 58세의 나이에 출사를 결정한다.

당시 남인과 서인의 정치권은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자신들의 권력 및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북벌은 서인들이 그동안 유지했던 명분용이지 실제 북벌을 할 의사나 정책은 없었으며 이른바 연립정부 형식을 취하던 남인 관리들 대부분도 북벌에는 회의적이었다. 이에 윤휴는 몇 차례 북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며 북벌을 위한 무관 양성을 위한 무과의 신분제를 타파하고 많은 무인들을 급제시키기도 했으나 오히려 군역을 부담시키는 폐단의 결과로 나타난다. 또 양반들이 면제 받던 군역을 부담시키기 위해 호패법을 폐지하고 지패법을 만들었으나 구산법이 양반 사대부들의 반발로 무산되며 군포를 포함한 모든 세금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양민을 더욱 힘들게 하는 정책으로 전락한다. 북벌을 위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신분제를 완화하려던 계획까지 수포로 돌아가고 남인과 서인의 균형을 유지하던 숙종의 마음이 한순간 돌아서자 남인관리들은 서인세력의 총공세를 받게 되고 모함과 거짓 고발로 인해 영의정이었던 허적을 비롯한 남인들은 모두 사약을 받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윤휴도 숙종 1년 명성왕후가 정청에 나타나 국사에 개입했던 것을 지적했던 조관과 북벌을 위해 부체찰사가 되려 했다는 두 가지 엉터리 혐의로 사약을 받고 사망에 이르며 북벌의 희망은 영영 사라진다.

 

이 서적에서 저자는 서인 노론이 주로 작성했던 조선왕조실록의 오류를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하며 반박한다. 승자의 기록일 수밖에 없는 역사이기에 객관적이지 않고 서인들의 입장에 맞게 작성한 실록으로 인해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윤휴란 인물의 실체, 사상, 정치방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정치인을 비롯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고위층들이 국민을 말로만 대변한다고 하고 자신 주변이나 기득권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현재와 서적에서 지적한 조선 서인 관리들의 행태와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한 뒷맛을 남겨 안타까웠다.

효종즉위부터 숙종 6년까지의 조선의 객관적인 역사와 진정한 유학자 윤휴란 인물을 파악하고 정치적 교훈을 줄 유익한 역사서로 추천하고 싶다.

 

이 서평은 출판사에서 서적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작성한 글임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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