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의 사랑
손석춘 지음 / 들녘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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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읽으면서 계속 이것이 사실일까 아닐까를 끊임 없이 자꾸 되묻게 된다. 대답은 뻔함에도 불구하고 자꾸 자문하게 된다. 사실일까? 소설일까? 작가는 그에 대해 소련의 소설가의 입을 빌려 이렇게 대답한다. “소설과 실재가 딱 부러지게 구분되는 것도 아니지요….소설은 그것이 책이라는 존재로 탄생하는 순간 생생하게 살아 있는 실재가 되지요.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어떤 소설이 어떤 현실, 또는 삶의 어떤 진실을 드러내고 있느냐에 있습니다.”그렇다. 이 내용이 사실이고 아니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작가가 마르크스라는 사람을 유령으로라도 불러 내와서 하고 싶은 말이 과연 무엇인가이다.

예니의 글을 읽다 보면, 그리고 그 아들의 편지와, 마지막 마르크스의 유서까지 읽다보면 그것이 사실이고 아니고의 여부를 떠나서 마르크스의 인간적인 면이 어떠하였을까를 생각하게 되고, 그 사상의 형성에 대한 비교적 개연성 있는 추측들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재미 있는 사실은, 소설을 읽다보면, 도대체 내가 헬레네 데무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지, 마르크스와 예니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지 자꾸 생각이 변하게 된다. 사실, 데무트는 처음부터 끝까지 칼은 아무 죄가 없노라고, 자기가 헌신적으로 그를 위해 살았던 것이 얼마나 행복했는 지를 역설하지만 나에게는 부분 부분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계급의 차이가 아니었다면 정말 그렇게 살았을까, 자신의 처한 상황으로 인해 그렇게 만들어진 측면은 아닐까. 아무리 본인이 부인하더라도 말이다. 게다가 마르크스의 유서까지 읽다보면, 정말 답답해서 가슴이 쳐지기도 한다. 평생 두 여인을 사랑했다, 게다가 데무트에게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무엇인 지 배웠다, 데무트가 아니었으면 ‘자본’도 없었다, 아들을 버려둔 것이 아니었다, 남몰래 그리워했었다, 고로 나를 이해해다오. 오… 맙소사…

그러나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마르크스의 결점이 어떠하여 사상적 결과가 어떠했다를 서로 따지는 것이 지금의 시점에 있어서 과연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인가? 마르크스의 숨겨둔 아들을 가지고 맑시즘 자체를 폄하하는 일부의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대해 해명하는 것이 맑시스트가 해야 하는 일인가? 그것에 대해 주인공은 하이게이트 묘지에서 마르크스를 불러내어 다음과 같은 답을 듣는다.

“21세기의 세계를 자본주의가 지배한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바로 그만큼 온 세계에 노동자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말이 아니오? 누가 감히 프롤레타리아트의 죽음을 예단할 수 있단 말이오? ……21세기는커녕 20세기 삶의 풍경도 난 모르오. 그러나 아직 인류가 자본주의 체제에 살고 있다니 하나만 묻겠소. 왜 당신들을 나를 밟고 가지 않으려는가. 왜 당신들은 내가 걸음을 멈춘 그곳에서 단 한 걸음도 더 전진하려고 하지 않는가. 왜 앞으로 걸어가지 않고 자꾸 뒤를 돌아보는가.”

그리고 주인공은 마르크스가 그 아들 하인리히와 교감을 이루듯, 꽃다운 나이에 빨치산으로 이름모를 능선에서 죽어갔던 자신의 아버지와 교감하게 되고, 정작 변한 것은 자기에게 손가락질 했던 그 후배가 아니라, 펜끝으로 숨어 과거만 바라보면서 마르크스만 원망했던 자기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마지막, 후배의 편지에 써 있던 말을 다시 한번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진보 세력이 맞서 싸워야 할 자본주의 세력은 얼마나 잘 뭉치며 얼마나 또 부지런합니까. 새벽부터 일어나 조찬회의로 시작한 저들의 일정은 밤늦은 시각 술자리의 정보교환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전개됩니다. 주말에는 골프를 치며 서로 정보를 주고받지요. 진보세력이 깡소주를 들이부으며 울분을 삭이고 건강을 해치는 바보짓을 되풀이할 때 저들은 양주를 마시며 노동자들의 가난한 누이들을 마음껏 농락하지 않습디까? …”너무나도 신선한 형식. 소설과 실재를 혼동하게 하는 탁월함. 자기가 진보적 지성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읽어봄직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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