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와 장소상실 논형학술총서 14
에드워드 렐프 지음, 김덕현.김현주.심승희 옮김 / 논형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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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와 장소상실’은 물리적인 공간에 인간의 감각, 지각, 인식, 감정이 투영됨으로써 특별한 의미가 형성된다는 점을 중요시 한다. 에드워드 렐프는 이를 통해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공간이 ‘장소화’된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공간은 외재적인 것이나 장소는 인간의 주관에 의해 크게 좌지우지 되며 내재적인 성격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장소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적이고 개인적인 활동으로 통해 이를 지각하는 것이다. 렐프는 실제 활동을 하는 실존공간, 그리고 생활공간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하고 이러한 경험을 통해 공간을 자각하게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장소는 매우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감정적이다.
세상 만물이 그러하듯 공간 또한 변화한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기도 하고 낡은 건물이 허물어지기도 한다. 새로운 도로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오래된 골목이 사라지기도 한다. 도시가 변화하는데 있어 렐프에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인간의 주관적이고 사적인 감정에 의해 공간에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공간의 변화 없이 의미의 상실로도 장소는 사라지는 것이다. 물리적인 변화 없이 특정 공간이 변두리로 낙인찍히게 되는 것은 결국 도시 공간이 그 의미를 상실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공간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개인이 특정 공간에 대해 지속적으로 갖는 자각은 곧 특정 장소의 고유한 특성으로 인지되고 개인이 부여한 이러한 정체성은 다시 공통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렐프는 카뮈를 인용하여 장소의 정체성이 세 가지 구성요소, 정적인 물리적 환경·활동·의미를 통해 부여된다고 보았다.(114) 비교적 정적인 물리적 환경에 대해 개인은 다양한 수준의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이를 장소 내에서의 행동적 내부성, 즉 육체적 개입, 둘째는 장소에의 감성적인 참여와 개입을 수반하는 감정 이입적인 내부성, 그리고 셋째는 실존적 내부성, 즉 장소에 완전히 그리고 무의시적으로 빠져드는 것으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직접 경험하지 않는 장소경험의 방식, 소설이나 다른 미디어를 통해 장소를 경험하는 대리적 내부성, 장소가 아닌 단순히 다른 활동을 위한 배경이 되는 부수적 외부성, 장소가 개념이나 입지로 다루어지는 객관적 외부성, 그리고 모든 장소로부터 심각한 소외를 겪는 실존적 외부성으로 분류하였다.(118~119) 렐프가 장소의 정체성을 인간과 장소의 상호작용 방식에 따라 위와 같이 분류한 것은 특정 장소가 특정 그룹의 사람들(지역주민, 이주자, 여행객)에게 어떻게 인지되고 있는지를 검증하는데 효과적인 분류기준이 될 것이라고 판단된다.
렐프에게 있어 참된 장소감은 장소에 대한 깊은 정신적 유대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진정한 장소감이란 무엇보다는 내부에 있다는 느낌이며 개인으로서 그리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나의 장소에 속해 있다는 느낌이다. 진정한 장소성은 무의식적으로 동질화된 상태이며 판에 박힌 정의나 모호한 존재에 귀탁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장소성은 상실되어 가고 있다. 장소란 본질적으로 나, 나의 생활, 나의 경험, 나의 인지로 동질감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 중요한데 최근의 장소성은 이러한 유대를 붕괴시킨 위에서 형성되고 있다.
추상적인 공공성, 효율성에 근거하여 설계된 (기술적인) 도시 계획들은 일상생활을 통해 자연스럽게 장소의 물리적 환경이 변화하는 것을 제한한다. 국가나 민족, 정부의 지도자는 이러한 공공성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들이다. 또한 장소의 상품화가 진행되면서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스테레오 타입(아파트, 관광지, 디즈니랜드)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하면서 장소성이 상실되었다. 이러한 장소는 인간과 장소가 상호작용을 통해 의미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고정된 이미지를 장소에 재현함으로써 기표를 소비하게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렐프는 우리가 현재 무장소성의 힘에 의해 지배당하여 장소감을 상실하고 있으며 그 결과 광범위한 스케일로 획일화가 이루어지고 있고 무장소적인 획일성이 각 지역적 상황에 적응하면서 토착화되는 과정이 부재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어느 곳에서나 장소경험이 빈약해졌다고 한다.(177) 이제 우리는 이제 우리를 대신하여 익명의 권력자 형성한 이미지(신화)로 장소를 소비할 뿐이며 빠르게 타고 지나가는 자동차의 안락함과 편안함에 기대어 우리와 상관없는 경관으로 장소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더 이상 장소를 경험하지 않으며 우리 자신의 주관적인 장소성을 갖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렐프는 이러한 무장소성이 극복되기 위해서는 장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세 가지 요소, 물리적 환경·활동·의미가 결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일상세계, 생활체계 안에서 장소가 만들어지기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현대 정부와 상업자본의 권력이 날로 강력해지는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가능한지에 대한 대안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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