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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존 그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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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즐은 산소통을 캐리어처럼 끌고 다닌다. 조금만 오래 서 있거나 계단을 오르내리면 숨이 가빠진다. 언제 죽을지 모르다는 공포감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주변인들의 상실감에 대한 걱정이 더 크다. 그래서 스스로를 '수류탄'이라고 부른다. 언제든 터져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을 터뜨릴 수 있는 수류탄. 당연히 관계란 가족밖에 없고 일상은 리얼리티 쇼 보기, 새로울 것 없는 삶을 살아간다.



어거스터스는 암 치료를 끝낸 뒤 한쪽 다리는 무릎 아래로 잘려 의족을 끼고 걷는다. 농구에 재능이 있어 트로피를 긁어모으던 그는 더 이상 이전처럼 달릴 수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잊힐까 두려워한다. 누군가에게 인상적인 모습을 남기고, 기억되고 싶은 십 대 소년 거스. 



헤이즐은 거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보여준다. 나의 가장 좋아하는 책을 보여준다는 것은 그 책을 읽으며 새롭게 만들어진 나의 세계를 보여주겠다는 마음이다. 나의 취향과 생각을 공유하고 나의 세계를 보여주겠다는 초대인 셈이다. 그들은 같은 책을 읽으며 그들만의 언어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서로가 삶과 관계에 의심을 가질 때마다 다짐한다. "Okay?" "Okay."



헤이즐과 거스의 만남과 죽음은 모두 짧은 시간에 일어난다. 거스에게 상처를 줄까 두려워했지만 오히려 그 상처를 감당해야 할 사람은 헤이즐이다. 그들에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시간은 너무나 소중하다. 0과 1 사이에는 무한대의 수가 있다. 비록 그 무한대는 0과 2나 0과 3 사이의 무한대보다는 작지만, 그럼에도 끝이 없다. 헤이즐과 거스가 가진 무한대는 다른 이의 무한대보다는 작다. 그리고 그들도 더 큰 무한대를 원한다. 하지만 거스는 헤이즐에게 한정된 나날 속에 무한대를 선물했고, 헤이즐은 그것을 어떻게 누리고 감사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언제나 헤이즐에게 웃음을 주던 거스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싶지 않다. 헤이즐은 그런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는 것보다 단 한 사람이 그를 깊이 기억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그는 다시 죽음보다는 이 삶에 집중한다. 다른 이에게 상처주기 싫어 관계를 밀어내는 헤이즐에게 그럼에도 나는 너를 사랑하고 아프기를 선택하겠다고 말했던 거스. 세상을 살아가며 상처를 받지 않을 수는 없지만, '누구'에게 상처받을지는 선택할 수 있다. 그에게는 헤이즐이 그러한 선택이며, 그녀 또한 자신의 선택을 좋아하길 기도한다. 거스는 이미 어른보다 더 깊은 감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 나의 순수한 마음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그 선택을 존중하고, 그에 따르는 감정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는 것. 이러한 그의 편지를 읽은 헤이즐은 거스를 잃고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고, 그들의 관계를 지켜본 우리는 감정의 순수를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순수한 감정을 인정하게 된 헤이즐은 이제 전과 같지 않다. 그녀의 부모님이 그녀를 감당하기로 결심하며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순수한 감정을 존중하고 그 선택을 좋아하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간다. 



우리는 누구나 상처를 받으며 살아간다. 누구나 두려워하는 것이 있고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어떤 이와 관계를 맺고 상처받을지를. 그리고 나의 두려움을 드러내고 나를 영원히 기억해 줄, 한정된 시간 속에 함께 무한대를 만들어갈 그 누군가를 선택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 죽고, 모든 관계는 언젠가는 달라진다.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감정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이다. 서로에게 시간과 마음을 쏟아 관계를 맺고 그에서 오는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그렇게 세상 수많은 장미 중 단 한 송이의 '나의 장미'를 만들고 그 사이에 만들어지는 작은 무한대가 주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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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보는 중학 국어 교과서 : 비문학 미리 보는 중학 국어 시리즈
이명진 외 엮음 / 고래가숨쉬는도서관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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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읽기를 귀찮아하고 쓰기는 더 귀찮아하는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읽고 쓰고 말하는 교육을 하기 위해 교재를 알아보던 중이었습니다.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비문학(수능) 교재는 시중에 많은 반면, 중학생을 위한 수준의 책은 많지 않았는데요. 그 중 다양한 주제를 다룬 글을 엮고, 그에 덧붙여 읽은 내용을 요약하고 주제를 찾고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질문들을 덧붙여 준 것이 좋았습니다.



물론 이 질문들이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중학생 수준에 맞지 않게 너무 쉬운 질문도 있고, 글에 사용된 단어를 그대로 답으로 가져올 수 있는 빈칸들은, 계속 반복되니 그 패턴이 빤히 보여 학생들이 금세 익숙해지고 답을 쉽게 찾지만 실질적으로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지는 못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런 때에는 문제를 조금씩 바꾸어 알려주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문제가 글의 주제와 잘 연결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중학생들이 모르는 어휘가 너무 많지 않고 다루는 내용이 무겁지 않은 비문학을 모아두신 것으로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엮어주신 글들 중 아이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글부터 보고 있는데요. 북한이 이들이 무서워 내려오지 못한다는 중 2들도 몸을 베베 꼬다가도 막상 읽을 때에는 집중해서 읽는 것을 보면 관심이 아주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학년과 수준이 다양한 학생들이 한 반에 섞여 있기 때문에 원활한 토론 진행이 쉽지 않아 일단은 읽고 이해하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연습을 먼저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문학을 읽을 때에는 늘 문단별로 주제 문장을 찾도록 하고 있어요.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들 중에서 어휘력, 이해력이 높고 글읽기를 (진심으로) 즐기는 학생들에게는 몇 편 선정하셔서 읽게 해보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만, 언제나 글읽기는 즐겁게 이루어져야 하고 그 글이 좋은 글인지 선생님이나 부모님께서 먼저 읽어보고 권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비문학을 다뤄야 하는데 매번 비문학을 찾기 어려우신 분들, 혹은 아이들에게 문학 외에 다양한 글을 알려주고 싶으신 분들께서 보시면 꽤 도움이 될 책입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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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영혼의 편지 (반양장) 반 고흐, 영혼의 편지 1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예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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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떻게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을까.

그리고, 말리고, 덧칠하고.

그럼에도 나아지지 않는 상황 속에서.

 

 

 

 

  이십 대 후반, 뒤늦은 나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빈센트는 실력은 빨리 늘지 않고 돈은 벌지 못하는 상황에서 동생 테오에게 물질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상당히 많은 짐을 지우고 있었다.

 

 편지의 많은 내용은 그가 가진 신앙과 세상을 보며 갖게 된 철학적인 고민을 담고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내용은 돈이 떨어졌으니 조금 더 보내 달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는 테오를 향한 미안한 마음을 자신이 그림을 계속해서 그려야 하는 이유와 설득으로 표현한다.

 

 

 

 나는 그림을 잘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고흐의 그림을 볼 때는 마음이 딱 맞는 친구를 만나는 순간처럼 영혼이 통하는 느낌이다. 교과서로만 접하던 그를 진심으로 알고싶게 된 것은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본 뒤였다. 어디선가 꽤 원작의 색감을 잘 살린 사진을 보고는, 그가 밤하늘을 보는 방식과 별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졌었다.

 

 그리고 몇 년 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고흐의 별밤' 전에서 그 그림을 실물로 만나게 됐다.

 실제로 보게 된 그 순간의 감동은 말로 전하기가 어렵다. 전시회의 마지막 날, 마지막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며 바닥에 앉아 그림을 올려다보는데 눈물이 났다. 죽음을 맞이하기 일 년 전, 그는 음식을 살 돈은 아껴도 물감은 최고급으로 사용하여 그의 그림은 시간이 흘러도 그가 마주친 밤하늘의 빛깔을 보여준다고 했다.

  

 편지 속에서 그는 자신의 그림이 호평을 얻자 그것에도 겸손한 마음을 갖는다. 그럴리가 없다-며.

 그림을 시작한 지 4년 째 되던 해의 농촌 인물화와 1888년 즈음 아를의 풍경화들, 그리고 말년의 나무 그림들은 어렵지 않고 겸손했기에 더 화려하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읽을 것이라는 경계심 없이 써낸 '편지'이기에 이 글들은 더욱 솔직하고 그렇기에 소중하다.

 그림 뿐 아니라 글도 잘 썼던 그는 자신의 학문적 배경과 불행했던 부모와의 관계, 그리고 사회적 시선을 이겨내고자 노력하는 과정을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담담하게 적어냈다.

 게다가 동생 테오의 편지에서도 넘치는 사랑이 느껴진다. 형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던 동생.

 테오는 사랑과 헌신이 가득한 사람이다. 

 

 

 

 진실된 마음으로 가난 속에서도 최고의 재료로 최선의 그림을 그린 화가. 그리고 그를 꿈꾸게 했던 밤하늘의 별.

 삶과 죽음, 세상의 가치관과 자신의 가치관 사이에서 끝없이 고민했던 그는 치열하게 그림을 그려냈고, 그 그림은 지금도 남아 죽은 뒤에도 멀리 빛을 뿜어내는 별처럼 남아있다. 

 

 

 

 

 

 

 

 겨울이 지독하게 추우면 여름이 오든 말든 상관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을 압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냉혹한 날씨는 결국 끝나게 되어 있고, 화창한 아침이 찾아오면 바람이 바뀌면서 해빙기가 올 것이다. (16p.)

 


 테오야 그런 건 생각도 하지 말자. 우리가 사랑에 빠졌다면, 그냥 사랑에 빠진 것이고, 그게 전부 아니겠니.(35p.)



 위험의 한가운데에 안전한 곳이 있는 법이지. 우리에게 뭔가 시도할 용기가 없다면 삶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니? (44p.)



 그런 후회를 하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 충실한 훈련은 게을리 한 채 승리자가 되려고 허겁지겁 달려왔을 것이다.

 그날을 위해 사는 사람은 오직 그 하루만 사는 사람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지루하게 생각하는 해부학, 원근과 비례 등에 대한 공부를 즐겁게 할 정도로 그림에 신념과 사랑을 가진 사람이라면 계속 노력할 것이고, 느리지만 확실하게 자기 세계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50-51p.)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할 수 없겠지만,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를 뿐이라면 계속 노력해 나갈 것이다. (84p.)



 비어 있는 캔버스의 응시, 그것은 화가에게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 .. 반면에 텅 빈 캔버스는 "넌 할 수 없어"라는 마법을 깨부수는 열정적이고 진지한 화가를 두려워한다. (115p.)

 진정한 화가는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캔버스가 그를 두려워한다. (134p.) 




 분명 "웬 쓰레기같은 그림이냐"는 말을 들을 게 뻔하지만. 내가 각오하고 있듯 너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해서 진실하고 정직한 그림을 그려야 한다. (122p.)




 포르티에 씨는 자신이 소유한 세잔의 그림을 따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다른 캔버스 옆에 놓고 보면 다른 그림의 색채를 죽여버린다고 말했지. 세잔의 그림은 황금색 배경에서 훌륭해 보이는데, 그것은 그림의 색조가 뛰어나고 모든 단계의 색이 아주 짙게 칠해졌기 때문이다. (179p.)



 우리는 노력이 통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 이 일이 우리 다음에도 계속될까 두렵다.

 그러나 인생은 너무 짧고, 특히 모든 것에 용감히 맞설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을 유지할 수 있는 건 몇 년 되지 않는다. (206p.)




 형의 사랑과 작품들로 이미 몇 배나 나에게 되돌려주었다는 사실은 생각하지도 않고 말이야. 그런 것들이야말로 내가 가질 수 있었던 돈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 아니겠어. (241p.)


 


 형이 알아야 할 건 어떤 관점에서도 형 자신을 불쌍히 여길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야.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

 게다가 이제 곧 더 훌륭한 작품을 만들 때가 다시 올 텐데 말이야.

 

 하지만 우리 희망을 갖기로 해. 형의 불행은 분명 끝날 거야. (246-24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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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초 소설가
댄 헐리 지음, 류시화 옮김 / 엑스북스(xbooks)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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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이 필때면 꽃 피는 거리에 앉아 얼굴을 그려주는 수많은 화가들이 있다. 살면서 한 두번쯤 그 자리에 앉아본 경험이 있다. ​그리고 그 중 한 번은 책 속의 리디아처럼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수긍했다. 그게 나의 얼굴이라고. 누군가의 눈을 통해 보는 나는 내가 보는 나보다 분명할 수도 있다. 여기 이렇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삶을 글로 써내는 사람이 있다.

 

 

 

 

칼럼쓰는 법을 배우러 (주)엑스플렉스에 잠시, 아주 잠시 다니던 때가 있었는데, 이 책은 그 층의 화장실에 표지 껍질이 펼쳐진 채 붙어 있었다. 이 책의 뒷면에 써있는 글이 아주 매력적이었다.

 

 

당신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

1982년 나는 스물다섯 살이었고, 시카고에 있는 미국 변호사 협회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유일한 소망은 소설가가 되는 일이었다. 나는 매일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 소설을 썼다. 저녁에 친구들과 모여 대화를 나누다가도 벌떡 일어나 말하곤 했다. 방금 기가 막힌 소재가 떠올랐기 때문에 얼른 집에 가서 글을 써야겠다고. 

 

 

 

 

무엇보다 나는 그가 스물다섯 살이었고, 시간이 지나면 읽히지 않는 기사를 쓰는 기자였으며, 동시에 자신의 글을 쓰고 싶어했다는 점, 그리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다가도 쓸거리가 생각나면 벌떡 일어나 집에 가서 글을 쓰겠다고 말했다는 것에 반했다. 그리고 그냥 책을 사버렸다. 엑스플렉스는 이전에 '해리포터 이펙트' 번역을 참여했던 출판 문화 공간인데, 아마도 그 공간에서 책이 팔리는 일은 굉장히 적은 것 같았다. 내가 이 노란 책을 뒤적이며 읽어도 아무도 계산대에 없었고, 계산을 한 뒤에는 책이 팔리다니 오늘 서점이 성행한다며 기뻐하시는 대화를 들었다. 뭐 이건 책 감상에는 상관 없는 일이지만.

댄 헐리. 그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곤 했고, 게다가 그걸 실행하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 옛날 랩탑이 없던 시절, 그는 무거운 타자기를 들고 길 한복판으로 나가 앉아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구걸하는 거지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잘 다려진 정장을 입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소설을 써드립니다.' 비웃으며 지나가던 사람들은 한두명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그는 곧 유명인사가 되어 백화점과 고위층의 파티 등에 초대되어 그들의 이야기를 글로 쓰게 된다.

그가 대단한 것은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했다는 것, 그리고 그 짧은 순간에 글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단하게 느껴진 것은 글을 쓰는 그의 성실한 태도였다. 직장을 다니면서도(그것도 매일 글을 써야하는 직장이었다) 매일 새벽 여섯시면 일어나 글을 썼고, 친구들과 만나 시간을 보내던 중에도 쓸거리가 생각나면 벌떡 일어나 용기있게 외쳤다. 당장 집에 가서 글을 써야겠다고! 진짜 미친놈이다.

결국 '60초 소설가'라는 그의 성취는 이 성실함에서 나온 것 같다. 쑥스러움과 비웃음을 이겨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매일 글감을 ​얻어 매일매일 새로운 글을 쓰겠다는 성실함.

그렇게 써낸 그의 글이 모두 잘 쓰인 글은 아니다. 번역의 문제도 있는 것 같지만(류시화님 죄송..), 어색한 표현이나 앞뒤가 잘 이어지지 않는 데에는 그가 급히 써낸 글 ​자체에 문제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가 쓴 글에 즐거워하고 돈을 지불한다.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준 이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정성스레 써준다. 그는 그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일을 해주는, 거리의 예술가였다.

'60초 소설가' 사이트가 여전히 인기가 높은 것을 보면서, 그 일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의심하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회의주의자들, 곧 나를 비웃는 사람들이 내 일을 방해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p.239 

작가는 긍정적이며 따뜻하다. 그의 이러한 시선은 그에게 이야기를 나눠준 사람들에게 향한다. 그는 그들의 인생에 사랑과 희망이 넘치길 바라고, ​부정적인 이야기에서도 삶을 긍정할 것들을 찾아내어 선물한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시선은 그 자신에게도 같다. 나는 타인보다 나 자신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인데, 그의 이런 마음가짐이 참 부러웠다. 그는 자신이 하려는 일에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는 터무니 없는 일이라도 주변인들에게 자랑스레(또 장난스럽게) 말하곤 그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 힘입어 실행해버린다.

  나는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그 대지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러자 기적처럼 짧은 순간, 내 마음의 눈은 지평선을 뛰어넘고 지구의 둥근 면을 휘어 돌아, 하나가 된 세상의 나라들 전체를 볼 수 있었다. 모든 나라가 이 대지 위에서는 하나였다. 그 순간 가슴이 벅차오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세상과 하나가 되는 이 순간, 나는 처음으로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묻지 말라. 그분은 우리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우리보다 위대한 것을 우리와 하나로 연결시켜 주는, 모든 사람의 어머니와 아버지이다. 그분은 보잘것 없는 이 댄 헐리에게도 신경을 써주실 것이다. 신은 많은 은하계로 이루어진 대기업을 멀리서 운영하는 회장님이 아니라, 내 마음 가까이 있는 분이다.

pp.153-154​

게다가 그는 보이는 것을 너머 진리를 보는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채 미국 전역을 돌며 여행하던 그는 아무것도 없는 벌판 위에서 드디어 만족감을 느낀다. 그는 '비어있는' 땅, 인간의 다른 것이 서지 않은 본래의 땅을 바라보며 충만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는 그 순간 하나의 땅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깨닫고, 신의 존재를 확신한다. 세상을 만들고 그것을 내려다보며 경영하는 신이 아닌, 사소한 인간 하나에게 관심을 갖는 신을.​

 

하지만 이들 '주부'와 '장애인'이 입을 열면서, 나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불치의 암을 이겨내고, 자신을 학대하는 남편으로부터 벗어나고, 용기 있게 열정적인 사랑을 쫓아간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쏟아놓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앞에 있는 그 사람을 바라보며 불가사의한 마음이 들곤 했다. 이렇게 평범하게 보이는 사람이 그런 놀라운 삶을 살았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pp.60-61​ ​

 

 

 

 

몇 년 전 방영된 tvN의 '꽃보다 누나'에서 ​배우 윤여정씨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나는 실없는 농담을 좋아해요. 나는 웃으며 살기로 했기 때문에'라고 말했다. 이혼과 육아, 아이들을 기르기 위해 '더럽게' 일했다고 말하는 그녀.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하게 해냈다. 지금의 그녀는 그만의 스타일과 강단있는 성격을 고집하면서도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는 위치에 서지 않았는가.

 

 

 

댄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며 그들의 인생이 얼마나 놀랍고 예측할 수 없는지 생각한다. 그리고 인생 도처에 널린 사랑과 인정, 관용과 헌신을 생각한다. ​누구나 보여지는 것들만 알 수 있고, 보여지는 것때문에 자신의 인생에 실망하기도 하지만, 인생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누구에게나 불친절하고 누구나 힘든 시기를 겪는다. 좋은 일이 일어난다 싶으면 또 다른 어려움이 숨어있다. 그러나 반대로 어려움이라 생각했던 일 속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행운을 만나기도 한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려움을 겪고, 그것을 이겨내고 있다. 그 삶 중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 모두가 위대한 삶을 살아내고 그 시간이 쌓여 지금이 된다. 우리는 순간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꿈꾸던 일이었든, 그저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든, 우리는 그 일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생각을 담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 하고싶은 것,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 이 세가지가 맞는다면 행복한 일이리라. 그러나 일은 그저 일이기도 해서 어느 멋져 보이는 울타리 안에 성공적으로 들어갔다 해서 모든 일이 무지개 빛깔인 것은 아니다. 그래도 맡겨진 일을 꿈꾸듯 성실하게 해내는 것. 그래서 썩은 동앗줄도 찬란한 무지개 빛깔로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꿈을 이루는 길일 것이다. 그렇게 삶을 살아내는 것, 이 인생이 바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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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메이 아줌마 - 사계절 1318 문고 13 사계절 1318 교양문고 13
신시아 라일런트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사계절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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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풍으로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쓰러지신 뒤,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늘 방에 눕거나 앉아서 나를 맞이해주셨다. 방에 들어서면 할아버지는 빙긋 웃으시며 , 영지 왔구나라고 하셨다. 그냥 그 한 문장일 뿐인데 나는 할아버지가 좋아 그 방에 앉아있곤 했다.

 

 

 

어린 나는 소심하고 내성적이어서 할 말은 늘 없기 마련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런 나에게 공부는 잘 하는지, 친구들과는 어떻게 지내는지 등 다른 화제를 애써 꺼내지 않으셨다. 할아버지와 나는 그냥 앉아있었다. 서로 아무 말도 없이. 나는 가끔 그 침묵이 어색해 웃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바닥에 원을 그리기도 했고, 할아버지는 그저 지켜보셨다. 그땐 어려 알지 못했지만, 아마 할아버지와 나는 영혼이 통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초등학생이었던 언젠가는 댁에 도착하니 할아버지가 방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다. 떨리는 손이 불안해 보여 젓가락으로 반찬을 얹어드렸는데, 할아버지가 내 눈을 보고 웃으셨다.

 

식사를 잠시 멈추시고, 웃으셨다.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웃으셨다.

 

 

 

정말 그냥 웃으셨을 뿐인데 난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마치 공기방울이 뻥-하고 공중으로 튀어오르는 것 같은 그 순간의 분위기와 넘어갈 듯 말 듯 주황빛으로 창문에 걸린 햇빛, 할아버지의 끝은 날렵하게 휘어지고 짙은 눈썹(지금 생각해도 할아버지의 얼굴은 참 멋졌다), 입고 계셨던 흰 셔츠와 앞에 놓인 작은 밥상. 그리고 옆에 앉아 영지가 다 컸구나- 하고 웃던 아빠의 표정까지.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조금 놀랐다. 아저씨가 굵직굵직한 일을 이야기할 줄 알았으므로. 이를테면 아줌마가 3년 동안 아저씨 몰래 꼬박꼬박 적금을 부어서 아저씨가 너무너무 갖고 싶어하던 비싼 대패 톱을 사준 일. 내가 수두에 걸려 열이 펄펄 끓고 헛소리를 해 댈 때, 너무 아파서 차라리 죽고 싶었을 때, 아줌마가 무려 32시간 동안 눈 한 번 붙이지 않고 나를 간호한 일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그러나 아저씨는 그런 훌륭한 일들을 입에 올리지도 않고, 사소한 일들만 골라서 이야기했다. 아줌마가 단 하루도 빠짐없이 오브 아저씨의 아픈 무릎에 연고를 문질러 주었던 일, 내가 꼬마였을 때 아줌마가 집안일을 하다 말고 밖에서 그네를 타고 노는 나를 창 너멀 내다보며 서머야, 우리 귀여운 아기,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아기하고 다정하게 불러 주던 일. 이렇듯 그 동안 아저씨가 마음 속에 소중히 간직했던 따스한 기억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흘러나왔다.

pp. 53-54

 

 

 

 

사랑은 거창한 삶의 한 자락이 아닌, 작은 순간들로 기억된다. 여기 소중한 사람을 잃은 두 사람이 있다. 그녀의 빈자리를 견디기 어려워하던 오브 아저씨는 자신을 이해해주는 클리터스에게 메이 아줌마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한다. 서머는 아저씨가 굵직한 일이 아닌 사소한 것들로 메이 아줌마를 추억하는 것에 놀라지만, 사실은 서머 자신도 아주 사소한 일들로 사랑을 기억하고 있다.

 

 

 

 

어느 날 밤 오브 아저씨가 부엌에 앉아 메이 아줌마의 길고 노란 머리를 땋아 주는 광경을 처음 보았을 때, 숲 속에 가서 행복에 겨워 언제까지나 울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으니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도 그처럼 사랑 받았을 것이다.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날 밤 오브 아저씨와 메이 아줌마 사이에 흐르던 것을 보면서 어떻게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우리 엄마는 돌아가시기 전에 윤기 나는 내 머리카락을 빗겨 주고 존슨 베이비 로션을 내 팔에 골고루 발라주고, 나를 포근하게 감싼 채 밤새도록 안고 또 안아 주었던 게 틀림없다. 그리고 그때까지 받은 사랑 덕분에 나는 다시 그러한 사랑을 보거나 느낄 때 그것이 바로 사랑인 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p.10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십 년이 훌쩍 지났지만, 나는 그 날 그 오후를 생각할 때면 그 때 그 조용했던 방에 할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가득 찼었는지 느껴진다. 사람은 정말 작은 기억들로 만들어지는 것 같다. 할아버지는 한 번도 내게 사랑한다거나 그와 비슷하고 의미는 조금 약한 어떤 표현도 하신 적이 없는데, 할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아끼셨는지, 그 눈빛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다니.

 

 

 

메이 아줌마는 사랑으로 가득한 큰 통 같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서머처럼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었지만, 이미 충분한 사랑을 받았고 가진 것을 사랑할 줄 알았다. 그녀는 서머에게 온 힘을 다해 사랑을 주었고, 그 사랑은 오브 아저씨에게도, 그리고 그녀가 가꾸던 밭에도, 오브 아저씨가 만든 바람개비에도 모든 곳에 남아서 남겨진 이들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준다.

 

 

 

서머와 오브 아저씨는 메이 아줌마 덕에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었다. 메이 아줌마는 사랑으로 그들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떠난 뒤, 그들은 더 이상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저씨는 땅에 마음을 붙이고 현실을 살아가기로 한다.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그는 이제 메이 아줌마의 영혼이 언제나 곁에 있음을 안다. 죽음은 끝이 될 수 없다. 소중한 이와 함께한 사랑의 기억들은 그 작은 조각들이 마음 속에 남아 언제까지고 우리 안에 살아있다. 메이 아줌마의 하얗고 눈부신 영혼은 여전히 서머와 오브 아저씨 안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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