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메이 아줌마 - 사계절 1318 문고 13 사계절 1318 교양문고 13
신시아 라일런트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사계절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중풍으로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쓰러지신 뒤,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늘 방에 눕거나 앉아서 나를 맞이해주셨다. 방에 들어서면 할아버지는 빙긋 웃으시며 , 영지 왔구나라고 하셨다. 그냥 그 한 문장일 뿐인데 나는 할아버지가 좋아 그 방에 앉아있곤 했다.

 

 

 

어린 나는 소심하고 내성적이어서 할 말은 늘 없기 마련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런 나에게 공부는 잘 하는지, 친구들과는 어떻게 지내는지 등 다른 화제를 애써 꺼내지 않으셨다. 할아버지와 나는 그냥 앉아있었다. 서로 아무 말도 없이. 나는 가끔 그 침묵이 어색해 웃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바닥에 원을 그리기도 했고, 할아버지는 그저 지켜보셨다. 그땐 어려 알지 못했지만, 아마 할아버지와 나는 영혼이 통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초등학생이었던 언젠가는 댁에 도착하니 할아버지가 방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다. 떨리는 손이 불안해 보여 젓가락으로 반찬을 얹어드렸는데, 할아버지가 내 눈을 보고 웃으셨다.

 

식사를 잠시 멈추시고, 웃으셨다.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웃으셨다.

 

 

 

정말 그냥 웃으셨을 뿐인데 난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마치 공기방울이 뻥-하고 공중으로 튀어오르는 것 같은 그 순간의 분위기와 넘어갈 듯 말 듯 주황빛으로 창문에 걸린 햇빛, 할아버지의 끝은 날렵하게 휘어지고 짙은 눈썹(지금 생각해도 할아버지의 얼굴은 참 멋졌다), 입고 계셨던 흰 셔츠와 앞에 놓인 작은 밥상. 그리고 옆에 앉아 영지가 다 컸구나- 하고 웃던 아빠의 표정까지.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조금 놀랐다. 아저씨가 굵직굵직한 일을 이야기할 줄 알았으므로. 이를테면 아줌마가 3년 동안 아저씨 몰래 꼬박꼬박 적금을 부어서 아저씨가 너무너무 갖고 싶어하던 비싼 대패 톱을 사준 일. 내가 수두에 걸려 열이 펄펄 끓고 헛소리를 해 댈 때, 너무 아파서 차라리 죽고 싶었을 때, 아줌마가 무려 32시간 동안 눈 한 번 붙이지 않고 나를 간호한 일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그러나 아저씨는 그런 훌륭한 일들을 입에 올리지도 않고, 사소한 일들만 골라서 이야기했다. 아줌마가 단 하루도 빠짐없이 오브 아저씨의 아픈 무릎에 연고를 문질러 주었던 일, 내가 꼬마였을 때 아줌마가 집안일을 하다 말고 밖에서 그네를 타고 노는 나를 창 너멀 내다보며 서머야, 우리 귀여운 아기,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아기하고 다정하게 불러 주던 일. 이렇듯 그 동안 아저씨가 마음 속에 소중히 간직했던 따스한 기억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흘러나왔다.

pp. 53-54

 

 

 

 

사랑은 거창한 삶의 한 자락이 아닌, 작은 순간들로 기억된다. 여기 소중한 사람을 잃은 두 사람이 있다. 그녀의 빈자리를 견디기 어려워하던 오브 아저씨는 자신을 이해해주는 클리터스에게 메이 아줌마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한다. 서머는 아저씨가 굵직한 일이 아닌 사소한 것들로 메이 아줌마를 추억하는 것에 놀라지만, 사실은 서머 자신도 아주 사소한 일들로 사랑을 기억하고 있다.

 

 

 

 

어느 날 밤 오브 아저씨가 부엌에 앉아 메이 아줌마의 길고 노란 머리를 땋아 주는 광경을 처음 보았을 때, 숲 속에 가서 행복에 겨워 언제까지나 울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으니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도 그처럼 사랑 받았을 것이다.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날 밤 오브 아저씨와 메이 아줌마 사이에 흐르던 것을 보면서 어떻게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우리 엄마는 돌아가시기 전에 윤기 나는 내 머리카락을 빗겨 주고 존슨 베이비 로션을 내 팔에 골고루 발라주고, 나를 포근하게 감싼 채 밤새도록 안고 또 안아 주었던 게 틀림없다. 그리고 그때까지 받은 사랑 덕분에 나는 다시 그러한 사랑을 보거나 느낄 때 그것이 바로 사랑인 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p.10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십 년이 훌쩍 지났지만, 나는 그 날 그 오후를 생각할 때면 그 때 그 조용했던 방에 할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가득 찼었는지 느껴진다. 사람은 정말 작은 기억들로 만들어지는 것 같다. 할아버지는 한 번도 내게 사랑한다거나 그와 비슷하고 의미는 조금 약한 어떤 표현도 하신 적이 없는데, 할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아끼셨는지, 그 눈빛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다니.

 

 

 

메이 아줌마는 사랑으로 가득한 큰 통 같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서머처럼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었지만, 이미 충분한 사랑을 받았고 가진 것을 사랑할 줄 알았다. 그녀는 서머에게 온 힘을 다해 사랑을 주었고, 그 사랑은 오브 아저씨에게도, 그리고 그녀가 가꾸던 밭에도, 오브 아저씨가 만든 바람개비에도 모든 곳에 남아서 남겨진 이들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준다.

 

 

 

서머와 오브 아저씨는 메이 아줌마 덕에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었다. 메이 아줌마는 사랑으로 그들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떠난 뒤, 그들은 더 이상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저씨는 땅에 마음을 붙이고 현실을 살아가기로 한다.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그는 이제 메이 아줌마의 영혼이 언제나 곁에 있음을 안다. 죽음은 끝이 될 수 없다. 소중한 이와 함께한 사랑의 기억들은 그 작은 조각들이 마음 속에 남아 언제까지고 우리 안에 살아있다. 메이 아줌마의 하얗고 눈부신 영혼은 여전히 서머와 오브 아저씨 안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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