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초 소설가
댄 헐리 지음, 류시화 옮김 / 엑스북스(xbooks)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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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이 필때면 꽃 피는 거리에 앉아 얼굴을 그려주는 수많은 화가들이 있다. 살면서 한 두번쯤 그 자리에 앉아본 경험이 있다. ​그리고 그 중 한 번은 책 속의 리디아처럼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수긍했다. 그게 나의 얼굴이라고. 누군가의 눈을 통해 보는 나는 내가 보는 나보다 분명할 수도 있다. 여기 이렇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삶을 글로 써내는 사람이 있다.

 

 

 

 

칼럼쓰는 법을 배우러 (주)엑스플렉스에 잠시, 아주 잠시 다니던 때가 있었는데, 이 책은 그 층의 화장실에 표지 껍질이 펼쳐진 채 붙어 있었다. 이 책의 뒷면에 써있는 글이 아주 매력적이었다.

 

 

당신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

1982년 나는 스물다섯 살이었고, 시카고에 있는 미국 변호사 협회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유일한 소망은 소설가가 되는 일이었다. 나는 매일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 소설을 썼다. 저녁에 친구들과 모여 대화를 나누다가도 벌떡 일어나 말하곤 했다. 방금 기가 막힌 소재가 떠올랐기 때문에 얼른 집에 가서 글을 써야겠다고. 

 

 

 

 

무엇보다 나는 그가 스물다섯 살이었고, 시간이 지나면 읽히지 않는 기사를 쓰는 기자였으며, 동시에 자신의 글을 쓰고 싶어했다는 점, 그리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다가도 쓸거리가 생각나면 벌떡 일어나 집에 가서 글을 쓰겠다고 말했다는 것에 반했다. 그리고 그냥 책을 사버렸다. 엑스플렉스는 이전에 '해리포터 이펙트' 번역을 참여했던 출판 문화 공간인데, 아마도 그 공간에서 책이 팔리는 일은 굉장히 적은 것 같았다. 내가 이 노란 책을 뒤적이며 읽어도 아무도 계산대에 없었고, 계산을 한 뒤에는 책이 팔리다니 오늘 서점이 성행한다며 기뻐하시는 대화를 들었다. 뭐 이건 책 감상에는 상관 없는 일이지만.

댄 헐리. 그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곤 했고, 게다가 그걸 실행하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 옛날 랩탑이 없던 시절, 그는 무거운 타자기를 들고 길 한복판으로 나가 앉아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구걸하는 거지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잘 다려진 정장을 입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소설을 써드립니다.' 비웃으며 지나가던 사람들은 한두명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그는 곧 유명인사가 되어 백화점과 고위층의 파티 등에 초대되어 그들의 이야기를 글로 쓰게 된다.

그가 대단한 것은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했다는 것, 그리고 그 짧은 순간에 글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단하게 느껴진 것은 글을 쓰는 그의 성실한 태도였다. 직장을 다니면서도(그것도 매일 글을 써야하는 직장이었다) 매일 새벽 여섯시면 일어나 글을 썼고, 친구들과 만나 시간을 보내던 중에도 쓸거리가 생각나면 벌떡 일어나 용기있게 외쳤다. 당장 집에 가서 글을 써야겠다고! 진짜 미친놈이다.

결국 '60초 소설가'라는 그의 성취는 이 성실함에서 나온 것 같다. 쑥스러움과 비웃음을 이겨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매일 글감을 ​얻어 매일매일 새로운 글을 쓰겠다는 성실함.

그렇게 써낸 그의 글이 모두 잘 쓰인 글은 아니다. 번역의 문제도 있는 것 같지만(류시화님 죄송..), 어색한 표현이나 앞뒤가 잘 이어지지 않는 데에는 그가 급히 써낸 글 ​자체에 문제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가 쓴 글에 즐거워하고 돈을 지불한다.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준 이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정성스레 써준다. 그는 그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일을 해주는, 거리의 예술가였다.

'60초 소설가' 사이트가 여전히 인기가 높은 것을 보면서, 그 일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의심하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회의주의자들, 곧 나를 비웃는 사람들이 내 일을 방해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p.239 

작가는 긍정적이며 따뜻하다. 그의 이러한 시선은 그에게 이야기를 나눠준 사람들에게 향한다. 그는 그들의 인생에 사랑과 희망이 넘치길 바라고, ​부정적인 이야기에서도 삶을 긍정할 것들을 찾아내어 선물한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시선은 그 자신에게도 같다. 나는 타인보다 나 자신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인데, 그의 이런 마음가짐이 참 부러웠다. 그는 자신이 하려는 일에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는 터무니 없는 일이라도 주변인들에게 자랑스레(또 장난스럽게) 말하곤 그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 힘입어 실행해버린다.

  나는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그 대지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러자 기적처럼 짧은 순간, 내 마음의 눈은 지평선을 뛰어넘고 지구의 둥근 면을 휘어 돌아, 하나가 된 세상의 나라들 전체를 볼 수 있었다. 모든 나라가 이 대지 위에서는 하나였다. 그 순간 가슴이 벅차오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세상과 하나가 되는 이 순간, 나는 처음으로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묻지 말라. 그분은 우리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우리보다 위대한 것을 우리와 하나로 연결시켜 주는, 모든 사람의 어머니와 아버지이다. 그분은 보잘것 없는 이 댄 헐리에게도 신경을 써주실 것이다. 신은 많은 은하계로 이루어진 대기업을 멀리서 운영하는 회장님이 아니라, 내 마음 가까이 있는 분이다.

pp.153-154​

게다가 그는 보이는 것을 너머 진리를 보는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채 미국 전역을 돌며 여행하던 그는 아무것도 없는 벌판 위에서 드디어 만족감을 느낀다. 그는 '비어있는' 땅, 인간의 다른 것이 서지 않은 본래의 땅을 바라보며 충만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는 그 순간 하나의 땅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깨닫고, 신의 존재를 확신한다. 세상을 만들고 그것을 내려다보며 경영하는 신이 아닌, 사소한 인간 하나에게 관심을 갖는 신을.​

 

하지만 이들 '주부'와 '장애인'이 입을 열면서, 나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불치의 암을 이겨내고, 자신을 학대하는 남편으로부터 벗어나고, 용기 있게 열정적인 사랑을 쫓아간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쏟아놓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앞에 있는 그 사람을 바라보며 불가사의한 마음이 들곤 했다. 이렇게 평범하게 보이는 사람이 그런 놀라운 삶을 살았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pp.60-61​ ​

 

 

 

 

몇 년 전 방영된 tvN의 '꽃보다 누나'에서 ​배우 윤여정씨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나는 실없는 농담을 좋아해요. 나는 웃으며 살기로 했기 때문에'라고 말했다. 이혼과 육아, 아이들을 기르기 위해 '더럽게' 일했다고 말하는 그녀.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하게 해냈다. 지금의 그녀는 그만의 스타일과 강단있는 성격을 고집하면서도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는 위치에 서지 않았는가.

 

 

 

댄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며 그들의 인생이 얼마나 놀랍고 예측할 수 없는지 생각한다. 그리고 인생 도처에 널린 사랑과 인정, 관용과 헌신을 생각한다. ​누구나 보여지는 것들만 알 수 있고, 보여지는 것때문에 자신의 인생에 실망하기도 하지만, 인생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누구에게나 불친절하고 누구나 힘든 시기를 겪는다. 좋은 일이 일어난다 싶으면 또 다른 어려움이 숨어있다. 그러나 반대로 어려움이라 생각했던 일 속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행운을 만나기도 한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려움을 겪고, 그것을 이겨내고 있다. 그 삶 중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 모두가 위대한 삶을 살아내고 그 시간이 쌓여 지금이 된다. 우리는 순간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꿈꾸던 일이었든, 그저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든, 우리는 그 일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생각을 담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 하고싶은 것,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 이 세가지가 맞는다면 행복한 일이리라. 그러나 일은 그저 일이기도 해서 어느 멋져 보이는 울타리 안에 성공적으로 들어갔다 해서 모든 일이 무지개 빛깔인 것은 아니다. 그래도 맡겨진 일을 꿈꾸듯 성실하게 해내는 것. 그래서 썩은 동앗줄도 찬란한 무지개 빛깔로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꿈을 이루는 길일 것이다. 그렇게 삶을 살아내는 것, 이 인생이 바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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