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본인이 어느 매체에 실었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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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불화하다 교수에서 농부로 전업하고 생활의 3분의 1은 노동에, 3분의 1은 공부에, 또 3분의 1은 가르치는 일에 바쳤던 스콧 니어링(1883~1993). 그가 100살이 되던 해에 자신에게 더는 노동할 힘이 없음을 깨닫고 삶을 수도승처럼 산뜻하게 마무리하는 얘기를 읽으면서 나도 저렇게 마무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고, 여전히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 그런데 삶의 마무리는 그렇다 치고, 니어링의 삶의 또 다른 측면이 요즘처럼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와 닿는다. 그가 무려 100살까지 손수 노동하며 공동체에 참여했다는 사실 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사람들이 일정 연령에 도달하여 은퇴하는 일에 대해 의문을 품어왔다. 노화를 겪으면서도 여전히 활력 있게 공동체에 참여하고 교감하는 길이 있지 않을까? 국민연금이 몇 년 뒤엔 고갈된다는 ‘위협’ 대신 공동체와 개인이 윈-윈(상생)하는 방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의문을 품고 있던 가운데 <한겨레> 기사와 칼럼에서 ‘참여소득’이라는 개념을 접하면서 무릎을 쳤다. 교육, 훈련, 돌봄 같은 사회적 기여를 하는 이들에게 일종의 ‘시민수당’을 지급하자는 참여소득이라 불리는 정책이 우리 사회를 위해서는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하게 됐다.

<한겨레> 기고 등을 통해 참여소득을 주창해온 이상준 박사에 따르면 참여소득은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에게 각자의 능력을 개발하고 또 사회에 참여하면서 적절한 소득을 창출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윤석열 정부가 중요시한다는 ‘자유’, 그 자유를 시민들에게 진정 선사할 수 있다. 어떻게? 바로 시민들을 평등하게 대우함으로써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좌우를 넘어서는 비전을 온몸, 온마음으로 제시했던 고 문익환 목사는 자유와 평등이 상반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탁견을 그의 옥중 서신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자유와 평등도 꼭 그와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자유를 거부하고 평등만으로 살 수 없고 평등을 거부하고 자유만으로 살 수 없는 거니까요. 평등을 거부하는 자유는 이미 자유가 아닌 거고 자유를 거부하는 평등은 평등이 아닌 거거든요.” 인류 사회가 겪어온 여러 비극은 바로 이 자유와 평등의 균형을 상실한 것에서 온 것은 아닐까?

일부에서 논의되는 기본소득도 취지가 훌륭한 좋은 정책이지만 사회경제적 여건에 압박되는 측면 또한 분명히 있다고 본다. 아울러 수혜자들을 다소 피동적으로 만드는 측면도 있다. 이에 비해 참여소득은 사회경제적 상승작용을 촉진하고 사회 구성원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소속감과 자존감과 삶의 질이 향상되는 느낌이 들 수 있다. 물론 두 정책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조화될 수 있는 정책이라고 본다.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심리학자 중 하나였던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회를 가리켜 ‘유사이키아(eupsychia)’라고 불렀다. 우리 사회는 현재 물질적으로 부유해졌을지 모르지만 심리적으로 매우 불행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 사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본다. 서로를 진정으로 존중해주는 공동체 안에서 자유와 평등은 둘이 아니고 하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공동체에 자유와 평등을 위한 하나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참여소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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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인공지능'을 검색하니 무려 2천 권 넘는 책들이 올라온다. 대략 관심 가는 책들을 몇 권 골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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