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balmas > [법의 힘] 한 구절에 대한 질문과 답변
작년에 제 수업을 들은 법대 학생 하나가 요즘 데리다의 「법의 힘」을 읽고 있는데,
재미있지만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도 있다고 하면서 질문을 하나 해왔네요.
질문한 내용을 보니까 다른 분들도 대개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만한 부분이라서
답변을 써서 보내는 김에 페이퍼를 하나 올립니다. 법의 힘 읽는 데 얼마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주는 「스피노자와 정치」 원고 교정 보랴, 용어 해설과 역자 해제 마무리하랴 한창 바쁜 주인데, 또 공교롭게도 학생들이 집중적으로 질문을 해대는 통에 좀 정신이 없네요. 이번 주에만 7-8개의 질문을 이메일로 받았는데, ㅎㅎㅎ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좀 얄밉더라구요. 꼭 바쁜 때를 골라서 질문하구 말이야 ... ^^;;;
질문:
[법의 힘], 31쪽에 보면
하지만 그 원칙과 그 동력을 넘어서 파스칼의 이 단편은 아마도 좀 더 본질적인 구조와 관계하는 듯하다. 법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 결코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의와 법의 돌발 자체, 법의 설립과 정초, 정당화의 순간(a-1)은 수행적 힘, 곧 항상 해석적인 힘과 믿음에 대한 호소를 함축하고 있다.(a-2) 이 경우는 법이 힘을 위해 봉사한다는 의미, 지배 권력의 유순하고 비굴한, 따라서 외재적인 도구라는 의미(1)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가 힘 또는 권력이나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과 좀 더 내재적이고 좀 더 복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법이라는 의미의 정의는, 이 정의의 외부에 또는 그 이전에 미리 존재하며 이 정의가 유용성에 따라 순응하거나 일치해야 하는 힘이나 사회적 권력, 예컨대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권력에 단순히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2).
더욱이 이것의 정초나 설립의 계기 자체는 결코 어떤 역사의 동질적인 소재 속에 기입되어 있는 한 계기는 아닌데, 왜냐하면 이 계기는 어떤 결정을 통해 이 역사를 절단하기 때문(b-1)이다. 법을 정초하고 창설하고 정당화하는 작용, 법을 만드는 작용은 어떤 힘의 발동, 곧 그 자체로는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은 폭력으로, 이전에 정초되어 있는 어떤 선행하는 정의, 어떤 법, 미리 존재하는 어떤 토대도 정의상 보증하거나 반박할 수 없는 또는 취소할 수 없는(b-2), 수행적이며 따라서 해석적인 폭력(b-3)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부분이 있는데. 법이 이데올로기적 권력에 단순히 봉사하는 것, 도구가 아니라 좀 더 복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들이 계속 나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사실 잘 와 닿지가 않네요. 어떤 점을 지적하려고 하는지, 제가 짐작하기론 뭔가 법의 정초에 내재해있는 폭력성 뭐 이런 걸 지적하려는 것 같긴 한데 그 부분이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 좀 더 자세하게 쉽게 설명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ㅠ.ㅠ..
답변:
사실 이 구절은 일반 독자들로서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고, 데리다의 핵심 논점 중 하나가 담겨 있는 구절이지.
우선 데리다의 논점을 한 번 정리해보지. (a)에서 알 수 있듯이 데리다는 파스칼의 단편의 핵심은 “정의와 법의 돌발 자체, 법의 설립과 정초, 정당화의 순간”(a-1)에 관한 통찰을 담고 있고, 이러한 통찰은 법의 “수행적 힘”(a-2)에 대한 통찰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지.
그리고 데리다에 따르면 이러한 (a)의 논점은, (1)과 (2)에서 볼 수 있듯이, 법이 권력에 대한 "외재적 도구"라는 생각, 곧 법이 지배계급의 이러저러한 권력의 정당화에 봉사하는 도구라는 생각과 다른 주장이지.
그럼 “정의와 법의 돌발 자체”이면서 “법의 설립과 정초”를 낳는 법의 힘, 법의 “수행적 폭력”은 어떤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의 실마리는 (b)에서 찾을 수 있지.
(b-1)을 보면, 데리다는 “법의 정초”의 계기는 “역사를 절단한다”고 말하고 있어. 다시 말해 강한 의미에서 새로운 법을 제정하는 것은 앞선 역사와는 다른 새로운 역사를 형성하는 행위라는 거야.
그런데 이렇게 이전의 역사, 또는 이전의 국가나 정치체계와 다른 새로운 역사를 형성하는 이 법은 바로 이처럼 새로움을 형성, 창설한다는 그 이유 때문에, 자기 이전의 역사나 국가, 정치체계 또는 법과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되겠지. 그리고 그렇다면 이 법은 자기 이전에 존재하는 역사나 정치체계, 법에게 자신의 정당성을 의존할 수 없게 되겠지. 또는 만약 그렇게 한다면, 정의상 이 법은 새로운 법이 아닐 테고, 따라서 자신이 새로운 법을 정초한다, 창설한다고 말할 수 없겠지. 이게 바로 (b-2)의 논점이지.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의문이 생기지. 도대체 법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새로운 어떤 것을 창설할 수 있을까, 법이 지닌 어떤 힘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데리다에 따르면 그건 바로 법이 지니고 있는 “수행적 폭력” 덕분이지. (b-3)
따라서 데리다가 말하는 수행적 폭력이란 이전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법을 창설하는 힘, 폭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c-2), 이처럼 전혀 새로운 것은 이전의 법이나 가치, 질서에 의존할 수 없기 때문에, 법이 지닌 수행적 폭력은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권위를 부여하는 힘, 자기 자신을 스스로 정당화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c-2).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보면 이해가 좀더 쉬울 거야. 데리다는 이처럼 새로운 법이 창설되는 행위의 사례, 따라서 수행적 폭력이 발휘되는 대표적인 경우로 “민족국가들의 설립, 또는 불어로 법치 국가라 불리는 것을 창설하는 제헌의 행위”(51쪽)를 들고 있지.
왜 민족국가, 또는 법치 국가가 대표적인 사례가 될까? 사실 모든 국가, 모든 정치 질서의 창설에는 데리다가 말하는 의미에서 수행적 폭력이 작용하지만, 근대 이전의 국가의 창설 또는 재창설에서는 이러한 정초의 행위가 신화적이거나 종교적인 담론에 의해 신비화되어 있기 마련이라서(우리나라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고대 국가의 창설은 항상 신화적 담론과 연계되어 있지) 수행적 폭력이 작용하는 방식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지. 또 대부분의 경우는 명시적인 기록과 선언의 행위를 통해 정초의 과정을 드러내고 있지도 않고.
이런 점에서 보면 데리다가 「독립선언들」에서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새로운 법의 창설에서 나타나는 수행적 폭력의 대표적 사례로 들고 있는 건 우연이 아니지. 「독립선언들」은 짧은 글이지만 매우 복잡하고 의미심장한 논점을 담고 있는데, 여기서는 간단하게 몇 가지 점만 검토해 볼까?
1) 이 선언문은 “수행적 폭력”에서 수행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잘 드러내지. 오스틴이 분석하고 데리다가 광범위하게 활용하고 있는 언어의 수행성이라는 것은 언어의 발화 자체가 어떤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 되거나 아니면 어떤 실제적인 효과를 산출하는 행위가 되는 것을 말하지. 그리고 「독립 선언」은 바로 언어가 지닌 이러한 수행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주지. 왜냐하면 이러한 선언 이전에 정의상 독립국이 아니라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메리카는 바로 이러한 선언을 통해 독립국이 되기 때문이야. 「독립선언」이라는 것은 매우 요식적이고 형식적인 행위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 선언, “이에 아메리카 연합주의 대표들은 전체 회의에 모여 이 식민지의 선량한 이름과 권능으로써 ... 이 연합 식민지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들이라고 엄숙히 발표하고 선언한다”([법의 힘] 174쪽)는 발화 행위, 기록 행위를 통해 비로소 아메리카는 아메리카가 된 셈이지. 내가 강조표시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주어인 “연합 식민지”는 바로 이 문장을 다 읽는 그 순간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들”로 바뀌게 되는 셈이야. 이게 바로 데리다가 말하는 수행적 폭력, 법의 정초, 창설 행위에서 볼 수 있는 수행적 폭력이지.
2) 그런데 왜 이게 폭력이냐구? 그건 첫째, 이러한 선언의 행위, 창설의 행위는 기존의 법질서에서 볼 수 없었던 또는 기존의 법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창설하는 행위이기 때문이지. 폭력은 (근대법의) 정의상 법 바깥에 있는 것, 법과 대립하는 것이라는 점을 가정한다면 말이야. 둘째, 이러한 선언의 행위, 창설의 행위는 바로 자신의 행위를 통해 새로운 법질서, 정치질서를 창설함으로써, 사실 기존의 모든 법질서, 정치질서는 태초에 있었던 어떤 폭력에서 유래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폭력을 요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지. 다시 말하면 어떤 법질서, 정치질서도 객관적이거나 초월적인 정당성의 근거에 따라 자신을 정당화할 수 없으며(만약 그런 게 있다면, 그건 순수하게 비폭력적이라고, 또는 폭력의 타자라고 할 수 있겠지), 따라서 항상 어떤 종류의 폭력, 곧 억압과 분리, 배제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지.
3) 그래서 대부분의 법의 정초 행위, 창설 행위 또는 선언 행위는 자신의 행위가 포함하고 있는 이러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지. 「독립선언」에는 매우 특징적인 근거들이 나타나는데, 첫째는 바로 신, “세계의 최고 판관”으로서 신이고, 둘째는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근대 자연권의 원리지. 다시 말해 영국으로부터 자신들의 독립은 이 두 가지 지고한 원리에 비추어봤을 때 정당하다는 거지. 그리고 이런 절차를 통해 새로운 주체, “아메리카의 선량한 인민”이라는 주체가 탄생하지. 다시 말해 선언 이전까지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메리카의 백성들, 원주민들이 새로운 국가의 국민, 인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얻게 되는 거야.
이야기가 좀 길어졌는데, 정리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어.
앞에서 본 것처럼 법이 이러저러한 권력의 도구라고 보는 것은 법이 원칙적으로는 그래서 안되는데, 편법적으로, 곧 불법적으로 권력의 이익을 옹호하고 돌본다는 것을 뜻하지. 이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지. 가령 장관이 신호 위반을 했을 때 눈감아준다든가 어떤 불법적인 일을 저질렀음에도 법적 처벌을 면한다든가 하는 사례가 있을 수 있겠지. 또는 마르크스처럼 자유와 평등이라는 부르주아의 법 이데올로기는 생산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착취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다라고 비판하는 것도 사실은 법을 (권력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본다는 점에서는 같은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지.
반면 데리다가 말하고 싶은 것은 법이 갖는 힘, 법에 고유한 폭력은 이러한 외재적 비판으로는 충분히 해명되지 않고, 또 충분히 비판되거나 극복될 수도 없다는 거지. 왜냐하면 법의 일차적인 폭력은 바로 새롭게 창설하고 정초하는 힘으로서 수행적 폭력에 있기 때문이지.
위의 구절에 대한 분석은 이 정도로 하면 충분할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좀 이해가 되었나?
아, 그리고 위의 구절에서 데리다가 “해석의 폭력” 또는 “해석의 힘”이라고 말한 것은 49쪽 이하에 나오는 “첫번째 아포리아: 규칙의 판단중지”를 보면 좀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지. 거기서 데리다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법관(또는 배심원)의 판결에 관한 문제인데, 데리다는 정의로운 판결은 일반적인 법의 규칙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되며, 매 순간, 매 경우마다, “마치 지금까지 법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마치 판사 자신이 매 경우마다 이를 발명한 것처럼, 재창설적인 해석의 행위에 의해” 내려져야 한다고 주장하지. 정의란 일반적인 규칙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떤 독특한 타자, 독특한 사례를 배제하는 게 아니라, 그 독특성을 포함할 수 있도록 일반적인 규칙을 변경하거나 또는 적어도 일반적 규칙의 해석적인 가능성을 활용하여 그 독특성을 존중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지.
데리다는 모든 법은 원초적인 수행적 폭력에 의존해 있기 때문에, 항상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 다시 말해 이러한 원초적인 수행적 폭력 때문에 법은 항상 해체 가능하고, 그래서 정의가 가능하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