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balmas > 용어 해설-관개체성

 

관개체성貫個體性transindividualité


2부 세 번째 논문 제목의 일부를 이루고 있고 발리바르의 스피노자 해석의 핵심 개념이기도 한 “transindividualité”, 곧 관개체성 개념은 프랑스의 철학자인 질베르 시몽동Glibert Simondon(1924-1989)이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개념이다. 시몽동은 프랑스 바깥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철학자이지만, 구조주의 운동에 중요한 이론적 동력을 제공해준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생전에 국가박사학위 주논문의 일부인 󰡔개체와 그 물리ㆍ생물학적 발생L'individu 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PUF, 1965), 그리고 부논문인 󰡔기술대상들의 실존양식에 관하여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Aubier-Montaigne, 1969) 두 권만을 출간했고, 그의 사후에도 국가박사학위 주논문의 나머지 부분인 󰡔심리ㆍ집합적 개체화L'individuation psychique et collective󰡕(Aubier, 1989)만 출간되었을 정도로 과작寡作의 철학자이지만, 그가 사망한 이후 이 세 권의 저작은 프랑스 철학계에 점점 더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시몽동 철학의 핵심 과제는 개체를 원초적인 실체로 간주하지 않고, 그 발생 과정 속에서, 곧 개체화 과정 속에서 파악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시몽동은 개체 및 개체화individuation를 사고하는 서양 철학의 두 전통, 곧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는 질료형상론과 원자론을 비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 두 전통은 이미 형성된, 또는 더 이상 분해될 수 없는 원초적인 단위로서 개체에서 출발하여 한 개체가 시공간 상에서 변화를 겪는 양상들이나 다른 개체들과 맺는 관계(이것이 일반적인 의미의 개체화다)를 사고하려 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런 철학 전통에 맞서 그는 개체는 원초적 실체, 기원이 아니라 개체에 구조적으로 앞서 개체를 생산하는 과정, 곧 개체화 과정에 의해 생산된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개체화 과정에 의해 개체들로 산출되는 , 그것은 무엇인가, 곧 개체화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불가피하게 제기된다. 시몽동은 이처럼 개체에 앞서는 이것을 “선先개체적 존재être préindividuel”라고 부른다. 시몽동에 따르면 이러한 선개체적 존재는 “하나 이상”, 곧 “통일성/단위 이상이자 동일성 이상”(Simondon, 1989a, p. 30)인 것이다. 왜냐하면 개체들에 대해서만 하나나 통일성 또는 정체성에 대해서 말할 수 있으므로, 개체화 이전에 존재하는 이 선개체적 존재는 정의상 하나, 통일성, 정체성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개체적 존재는 이처럼 부정적으로만 파악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선개체적 존재를 단순히 “하나 아님non-un”이 아니라 “하나 이상” 또는 “통일성/단위 이상이자 동일성 이상”으로 부를 수 있다면, 이는 선개체적 존재가 고정된 동일성을 갖는 개체들 이상의 어떤 것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곧 시몽동이 말하는 선개체적 존재는 이행/변화의 역량, 포텐셜 자체로서, 이는 개체화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일 뿐만 아니라, 개체화 과정을 통해 산출된 개체가 자기 차례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자신을 재생산하거나 변화시킬 수 있게 하는, 또는 자기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써 재생산하거나 일정한 임계점을 통과하면 스스로 변화되도록 하는 힘이다. (따라서 데리다 식으로 말한다면, 시몽동의 “하나 이상plus qu‘un”이라는 개념은 또한 동시에 “더 이상 하나 아님ne plus qu’un”이기도 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몽동은 열역학에서 빌려온 준안정성métastabilité이라는 개념을 통해 선개체적 존재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열역학 또는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준안정적인 상태란 체계의 변수들 중 하나(가령 압력, 온도 따위)가 최소한으로 변동되기만 해도 평형 상태가 깨지는 상태를 가리킨다. 쉬운 사례를 하나 든다면, 이른바 “과냉각액체supercooling liquid”로 남아 있는 물, 곧 0°C 이하에서도 얼지 않고 계속 액체 상태로 남아 있는 물 같은 경우가 여기에 해당하는데, 이 물은 약간의 충격만 가해도 바로 얼어버린다. 시몽동에 따르면 선개체적 존재는 바로 이처럼 준안정적인 상태에 있는 체계 일반을 가리킨다. 따라서 선개체적 존재는 서로 긴장상태에 있는 이질적인 포텐셜들(예컨대 액체와 고체)의 집합이라고 볼 수 있으며, 포텐셜들의 긴장이 해소되는 것, 곧 “위상변화déphasage”를 통해 포텐셜들이 서로 다른 수준, 서로 다른 위상의 체계로 해소되는 것이 바로 개체들의 생성이다.  

  따라서 선개체적 존재는 단순히 개체에 시간적으로 앞서는 상태가 아니라, 개체 안에서 개체의 존속 및 변화를 이끌어가는 포텐셜 또는 역량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그리고 이 때문에 “préindividuel”은 前개체적이라고 해서는 안되며, 구조적으로 우선한다는 의미에서 先개체적이라고 번역하는 게 적합하다).   

  관개체성 개념은 󰡔심리ㆍ집합적 개체화󰡕에 등장하는 개념으로서, 원래는 심리적 개체화와 집합적 개체화라는 두 가지 개체화 사이의 관계, 또는 오히려 인간의 개체화의 두 측면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다. 곧 이 개념은 정신 또는 심리활동은 인간의 내면을 이루고(심리주의), 사회 또는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는 인간의 외면을 이룬다고 보는(사회학주의) 대개의 이원론적 관점을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2부 두 번째 논문인 「스피노자에서 개체성과 관개체성」에서 시몽동의 이 개념을 빌려와서 스피노자 철학, 특히 그의 ‘존재론’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활용하고 있다. 따라서 발리바르는 이 개념을 시몽동이 원래 사용하던 맥락보다 좀 더 넓은 ‘존재론’ 일반의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발리바르가 사용하는 관개체성 개념은 시몽동이 말하는 일차적 개체화/이차적 개체화(또는 발리바르의 용어법대로 하면 개체화/개성화)를 포괄하는 개체화 과정 전체를 지시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관개체성”의 원어는 “transindividualité”인데, 이를 우리말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윤소영 교수는 이 개념을 “초개인성”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몇 가지 이유에서 부적합하다. 첫째, “individualité”는 “인간 개인”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 일반적인 ‘존재론적’(또는 발리바르의 표현을 따르자면 “비非존재론적mé-ontologique”) 함축을 지닌 개념이기 때문에, “개인성”보다는 “개체성”으로 번역하는 게 옳을 것이다. 둘째, 이 개념의 접두어인 “trans-”는 “초월”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기보다는 오히려 “traverser”라는 단어처럼 “가로지다”, “관통하다”는 의미, 또는 “transformer”라는 단어처럼 “전환하다”, “형태가 변화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더욱이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trans-”는 선개체적인 준안정상태의 퍼텐셜이 나중에 성립된 개체들을 관통하여 존립하고 있고, 더 나아가 이 퍼텐셜이 개체의 형태들을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셋째, 더 나아가 이 접두어는 부분과 전체, 개체와 우주, 개인과 국가/사회 등과 같이 미리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적 항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추상적 관계 개념을 해체하려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trans~”의 집합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초-”라는 번역은 다소 일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trans-”라는 접두어가 지닌 다의적 의미를 살리고, 무엇보다도 이 개념이 기계론 및 유기체론(또는 사회학주의와 심리학주의)에 맞서 관계의 우월성 내지는 원초성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우리는 이를 “관貫”이라는 단어로 번역했다. “trans-”가 갖고 있는 복합적 의미를 모두 담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개체를 관통하는 퍼텐셜 또는 역량의 흐름을 표현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초”나 “횡단” 등보다는 좀 더 적절한 역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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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용어 해설-대중들

 

대중들multitudo


“multitudo”는 지난 1980년대 이후 스피노자 정치학의 핵심 개념으로 등장한 개념이다. “많은”, “다수의” 또는 “큰”이라는 뜻을 지닌 “multus”에서 유래한 이 용어는 17세기 정치철학자들, 특히 홉스와 스피노자의 저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홉스의 경우 물티투도는 법제도의 틀 안에서 구성된 인민people과 대립하는 것으로서, 고유한 정치적 실재성을 지니지 못한 “군중” 내지는 “무리”(󰡔시민론De Cive󰡕 영역본에서는 이를 “crowd”로 번역하고 있다. Hobbes 1998 참조)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홉스 정치학의 원칙에 따를 경우 물티투도는 적법한 정치적 지위를 갖지 못하고 심지어 전혀 정치적 행위를 수행할 수도 없다. 이 때문에 물티투도는 정치학의 대상이 될 수 없지만, 불법적인 소요와 폭력으로 정치적 질서를 위협한다는 점에서는 홉스 정치학이 꼭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다. 홉스는 물티투도를 서로 독립해 있는 “다수의 개인들” 또는 “다수의 의인(疑人)들persons”로 해체함으로써 이 과제를 해결하려고 했다(이 문제에 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2004 참조). 

  반면 스피노자는 물티투도에 대해 좀더 미묘한 태도를 보여준다. 정치학에 관한 스피노자의 첫 번째 주저인 󰡔신학정치론󰡕에서 이 개념은 단 세 차례만 사용되고 있으며, 거의 이론적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6년 뒤에 씌어진 󰡔정치론󰡕에서는 사용 빈도도 늘어날뿐더러, 스피노자의 논의의 핵심 대상으로 등장한다. 󰡔정치론󰡕에서 이 개념은 한편으로 주권 또는 통치권을 규정하는 위치에 놓인다.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정의되는 법/권리를 보통 통치권imperium이라 부른다. 공동의 동의에 따라 국정의 책임을 맡은 이가 이 통치권을 절대적으로 보유한다.”(󰡔정치론󰡕 2장 17절(강조는 인용자). 또한 3장 2절, 7절, 9절도 참조)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스피노자는 물티투도를 결코 자기통치적인 주체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그는 물티투도의 삶을 지배하는 정념적인 동요에 대해 두려움을 품고 있었고, 이를 조절하고 제어할 수 있는 제도적인 매개를 추구했다. 따라서 󰡔정치론󰡕에서 물티투도는 기본적으로 양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물티투도 개념이 스피노자 정치학의 핵심 개념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인 안토니오 네그리의 󰡔야생의 별종󰡕(1981)이라는 저서와 발리바르의 「스피노자, 반오웰」(1982)이라는 논문 덕분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물티투도 개념이 단지 스피노자 정치학만이 아니라 스피노자 철학 전체에 대해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긍정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어떤 점에서 이 개념이 중요한가에 관해서는 상당히 다른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문제는 이 책 2부에 수록된 「스피노자, 반오웰」에서 좀 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간단하게 몇 가지 점만 지적하겠다.

  첫째, 두 사람은 물티투도 개념이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 전체를 새롭게 고찰하는 계기를 제공해준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네그리는 물티투도 개념이 실체, 속성 같은 초월적인 형이상학의 범주들 없이 유한양태들의 차원에서 완전한 구성의 존재론을 전개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을 중시하며, 이 때문에 이 개념이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를 “재정초”하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본다. 반면 발리바르에게 대중들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은 이 개념이 󰡔윤리학󰡕 1부와 2부에서 전개된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그의 ‘존재론’을 대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 있지 않고, 오히려 ‘존재론’에서 자연학, 그리고 인간학에서 정치학에 이르는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를 관개체성의 관점에서 재고찰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둘째, 네그리는 물티투도를 일종의 정치적 주체, 더 나아가 해방 운동의 주체로 간주하는 데 비해, 발리바르는 물티투도가 근본적으로 양가적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큰 차이를 보인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네그리는 스피노자의 물티투도가 현대 사회학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 “대중masse”이나 “군중crowd”와 구분되는 존재론적 위상을 지닌다고 본다. 곧 대중이나 군중은 자신의 독특성을 상실한 익명적인 개인들의 집합, 따라서 지배장치에 포섭되어 있는 수동적인 집단을 가리키는 데 반해, 스피노자의 물티투도는 능동적인 역량과 독특성을 지닌 개인들의 결합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네그리는 물티투도는 초월적인 통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자율성을 지닌 다수의 독특한 개인들의 결합체라는 점에서 해방 운동의 정치적 주체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의 물티투도는 ‘존재론적’으로 토대의 위치에 있기는 하지만 수동적인 집단으로서 “대중”이나 “군중”이라는 차원도 포함하고 있다고 간주한다. 그리고 발리바르에 따르면 물티투도에 고유한 이러한 양가성, 이중성은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스피노자의 역량의 존재론이 관계론적 존재론이라는 것, 곧 능동과 수동의 끊임없는 변이과정이라는 것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적대와 갈등을 환원 불가능한 정치의 요소로서 사고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리바르에게 물티투도의 양가성이라는 관점의 중요성은 정치를 막연한 유토피아적(또는 목적론적) 이상이 아니라 실질적인 개조와 변혁 운동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해주는 개념적 토대가 된다는 점에 있다.    

  셋째, 이러한 차이점은 두 사람이 선호하는 용어법의 차이로 이어진다. 네그리는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라틴어 multituo를 줄곧 “multitude”라고 번역해서 사용한다. 그리고 국내의 네그리 연구자들은 다시 이를 “다중多衆”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물티투도가 지닌 “다수, 여럿”의 의미(곧 주권의 초월적 “하나”에 대립하는)를 포함하면서 동시에 네그리의 주장과 일치하게 물티투도를 정치적 주체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번역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발리바르는 이 책 2부에 수록된 세 번째 논문의 한 각주에서 물티투도에 대한 가장 좋은 번역어는 “masses”, 곧 “대중들”이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으며, 스피노자의 물티투도 개념을 (단수로 쓰인) “multitude”, 곧 “다중”으로 번역하는 데 대해 명시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이는 스피노자의 물티투도 개념이 지닌 이중성 내지는 양가성을 보존하기 위한 태도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라틴어 원어는 하나인 데 반해, 이 용어에 대한 적어도 두 가지 상이한 현대적 번역과 용법이 존재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책의 경우에는 또 다른 번역의 어려움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발리바르는 이 책에 수록된 글들에서 물티투도를 몇 가지 상이한 불어 단어(“masse”와 “masses”, 그리고 “multitude”)로 번역하고 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발리바르가 “masses”, 곧 “대중들”이라는 번역을 물티투도에 대한 최상의 번역어로 제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는 이처럼 다양한 번역어들이 혼재되어 있는 점을 감안해서 발리바르가 “masse”라고 번역할 때는 “대중”으로, “masses”로 번역할 때는 “대중들”로, 그리고 “multitude”로 번역할 때는 “다중”으로 각각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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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법의 힘] 한 구절에 대한 질문과 답변

작년에 제 수업을 들은 법대 학생 하나가 요즘 데리다의 「법의 힘」을 읽고 있는데,

재미있지만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도 있다고 하면서 질문을 하나 해왔네요.

질문한 내용을 보니까 다른 분들도 대개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만한 부분이라서

답변을 써서 보내는 김에 페이퍼를 하나 올립니다. 󰡔법의 힘󰡕 읽는 데 얼마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주는 「스피노자와 정치」 원고 교정 보랴, 용어 해설과 역자 해제 마무리하랴 한창 바쁜 주인데, 또 공교롭게도 학생들이 집중적으로 질문을 해대는 통에 좀 정신이 없네요. 이번 주에만 7-8개의 질문을 이메일로 받았는데, ㅎㅎㅎ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좀 얄밉더라구요. 꼭 바쁜 때를 골라서 질문하구 말이야 ... ^^;;;

 

 

질문:


[법의 힘], 31쪽에 보면

 

하지만 그 원칙과 그 동력을 넘어서 파스칼의 이 단편은 아마도 좀 더 본질적인 구조와 관계하는 듯하다. 법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 결코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의와 법의 돌발 자체, 법의 설립과 정초, 정당화의 순간(a-1)은 수행적 힘, 곧 항상 해석적인 힘과 믿음에 대한 호소를 함축하고 있다.(a-2) 이 경우는 법이 힘을 위해 봉사한다는 의미, 지배 권력의 유순하고 비굴한, 따라서 외재적인 도구라는 의미(1)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가 힘 또는 권력이나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과 좀 더 내재적이고 좀 더 복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법이라는 의미의 정의는, 이 정의의 외부에 또는 그 이전에 미리 존재하며 이 정의가 유용성에 따라 순응하거나 일치해야 하는 힘이나 사회적 권력, 예컨대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권력에 단순히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2). 

  더욱이 이것의 정초나 설립의 계기 자체는 결코 어떤 역사의 동질적인 소재 속에 기입되어 있는 한 계기는 아닌데, 왜냐하면 이 계기는 어떤 결정을 통해 이 역사를 절단하기 때문(b-1)이다. 법을 정초하고 창설하고 정당화하는 작용, 법을 만드는 작용은 어떤 힘의 발동, 곧 그 자체로는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은 폭력으로, 이전에 정초되어 있는 어떤 선행하는 정의, 어떤 법, 미리 존재하는 어떤 토대도 정의상 보증하거나 반박할 수 없는 또는 취소할 수 없는(b-2), 수행적이며 따라서 해석적인 폭력(b-3)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부분이 있는데. 법이 이데올로기적 권력에 단순히 봉사하는 것, 도구가 아니라 좀 더 복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들이 계속 나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사실 잘 와 닿지가 않네요. 어떤 점을 지적하려고 하는지, 제가 짐작하기론 뭔가 법의 정초에 내재해있는 폭력성 뭐 이런 걸 지적하려는 것 같긴 한데 그 부분이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 좀 더 자세하게 쉽게 설명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ㅠ.ㅠ..



답변: 

사실 이 구절은 일반 독자들로서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고, 데리다의 핵심 논점 중 하나가 담겨 있는 구절이지.

우선 데리다의 논점을 한 번 정리해보지. (a)에서 알 수 있듯이 데리다는 파스칼의 단편의 핵심은 “정의와 법의 돌발 자체, 법의 설립과 정초, 정당화의 순간”(a-1)에 관한 통찰을 담고 있고, 이러한 통찰은 법의 “수행적 힘”(a-2)에 대한 통찰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지.

그리고 데리다에 따르면 이러한 (a)의 논점은, (1)과 (2)에서 볼 수 있듯이, 법이 권력에 대한 "외재적 도구"라는 생각, 곧 법이 지배계급의 이러저러한 권력의 정당화에 봉사하는 도구라는 생각과 다른 주장이지.  

그럼 “정의와 법의 돌발 자체”이면서 “법의 설립과 정초”를 낳는 법의 힘, 법의 “수행적 폭력”은 어떤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의 실마리는 (b)에서 찾을 수 있지.

(b-1)을 보면, 데리다는 “법의 정초”의 계기는 “역사를 절단한다”고 말하고 있어. 다시 말해 강한 의미에서 새로운 법을 제정하는 것은 앞선 역사와는 다른 새로운 역사를 형성하는 행위라는 거야.

그런데 이렇게 이전의 역사, 또는 이전의 국가나 정치체계와 다른 새로운 역사를 형성하는 이 법은 바로 이처럼 새로움을 형성, 창설한다는 그 이유 때문에, 자기 이전의 역사나 국가, 정치체계 또는 법과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되겠지. 그리고 그렇다면 이 법은 자기 이전에 존재하는 역사나 정치체계, 법에게 자신의 정당성을 의존할 수 없게 되겠지. 또는 만약 그렇게 한다면, 정의상 이 법은 새로운 법이 아닐 테고, 따라서 자신이 새로운 법을 정초한다, 창설한다고 말할 수 없겠지. 이게 바로 (b-2)의 논점이지.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의문이 생기지. 도대체 법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새로운 어떤 것을 창설할 수 있을까, 법이 지닌 어떤 힘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데리다에 따르면 그건 바로 법이 지니고 있는 “수행적 폭력” 덕분이지. (b-3)

따라서 데리다가 말하는 수행적 폭력이란 이전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법을 창설하는 힘, 폭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c-2), 이처럼 전혀 새로운 것은 이전의 법이나 가치, 질서에 의존할 수 없기 때문에, 법이 지닌 수행적 폭력은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권위를 부여하는 힘, 자기 자신을 스스로 정당화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c-2).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보면 이해가 좀더 쉬울 거야. 데리다는 이처럼 새로운 법이 창설되는 행위의 사례, 따라서 수행적 폭력이 발휘되는 대표적인 경우로 “민족국가들의 설립, 또는 불어로 법치 국가라 불리는 것을 창설하는 제헌의 행위”(51쪽)를 들고 있지.

왜 민족국가, 또는 법치 국가가 대표적인 사례가 될까? 사실 모든 국가, 모든 정치 질서의 창설에는 데리다가 말하는 의미에서 수행적 폭력이 작용하지만, 근대 이전의 국가의 창설 또는 재창설에서는 이러한 정초의 행위가 신화적이거나 종교적인 담론에 의해 신비화되어 있기 마련이라서(우리나라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고대 국가의 창설은 항상 신화적 담론과 연계되어 있지) 수행적 폭력이 작용하는 방식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지. 또 대부분의 경우는 명시적인 기록과 선언의 행위를 통해 정초의 과정을 드러내고 있지도 않고.

이런 점에서 보면 데리다가 「독립선언들」에서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새로운 법의 창설에서 나타나는 수행적 폭력의 대표적 사례로 들고 있는 건 우연이 아니지. 「독립선언들」은 짧은 글이지만 매우 복잡하고 의미심장한 논점을 담고 있는데, 여기서는 간단하게 몇 가지 점만 검토해 볼까?


1) 이 선언문은 “수행적 폭력”에서 수행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잘 드러내지. 오스틴이 분석하고 데리다가 광범위하게 활용하고 있는 언어의 수행성이라는 것은 언어의 발화 자체가 어떤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 되거나 아니면 어떤 실제적인 효과를 산출하는 행위가 되는 것을 말하지. 그리고 「독립 선언」은 바로 언어가 지닌 이러한 수행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주지. 왜냐하면 이러한 선언 이전에 정의상 독립국이 아니라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메리카는 바로 이러한 선언을 통해 독립국이 되기 때문이야. 「독립선언」이라는 것은 매우 요식적이고 형식적인 행위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 선언, “이에 아메리카 연합주의 대표들은 전체 회의에 모여 이 식민지의 선량한 이름과 권능으로써 ... 이 연합 식민지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들이라고 엄숙히 발표하고 선언한다”([법의 힘] 174쪽)는 발화 행위, 기록 행위를 통해 비로소 아메리카는 아메리카가 된 셈이지. 내가 강조표시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주어인 “연합 식민지”는 바로 이 문장을 다 읽는 그 순간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들”로 바뀌게 되는 셈이야. 이게 바로 데리다가 말하는 수행적 폭력, 법의 정초, 창설 행위에서 볼 수 있는 수행적 폭력이지.    


2) 그런데 왜 이게 폭력이냐구? 그건 첫째, 이러한 선언의 행위, 창설의 행위는 기존의 법질서에서 볼 수 없었던 또는 기존의 법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창설하는 행위이기 때문이지. 폭력은 (근대법의) 정의상 법 바깥에 있는 것, 법과 대립하는 것이라는 점을 가정한다면 말이야. 둘째, 이러한 선언의 행위, 창설의 행위는 바로 자신의 행위를 통해 새로운 법질서, 정치질서를 창설함으로써, 사실 기존의 모든 법질서, 정치질서는 태초에 있었던 어떤 폭력에서 유래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폭력을 요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지. 다시 말하면 어떤 법질서, 정치질서도 객관적이거나 초월적인 정당성의 근거에 따라 자신을 정당화할 수 없으며(만약 그런 게 있다면, 그건 순수하게 비폭력적이라고, 또는 폭력의 타자라고 할 수 있겠지), 따라서 항상 어떤 종류의 폭력, 곧 억압과 분리, 배제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지.


3) 그래서 대부분의 법의 정초 행위, 창설 행위 또는 선언 행위는 자신의 행위가 포함하고 있는 이러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지. 「독립선언」에는 매우 특징적인 근거들이 나타나는데, 첫째는 바로 신, “세계의 최고 판관”으로서 신이고, 둘째는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근대 자연권의 원리지. 다시 말해 영국으로부터 자신들의 독립은 이 두 가지 지고한 원리에 비추어봤을 때 정당하다는 거지. 그리고 이런 절차를 통해 새로운 주체, “아메리카의 선량한 인민”이라는 주체가 탄생하지. 다시 말해 선언 이전까지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메리카의 백성들, 원주민들이 새로운 국가의 국민, 인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얻게 되는 거야.  


이야기가 좀 길어졌는데, 정리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어.


앞에서 본 것처럼 법이 이러저러한 권력의 도구라고 보는 것은 법이 원칙적으로는 그래서 안되는데, 편법적으로, 곧 불법적으로 권력의 이익을 옹호하고 돌본다는 것을 뜻하지. 이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지. 가령 장관이 신호 위반을 했을 때 눈감아준다든가 어떤 불법적인 일을 저질렀음에도 법적 처벌을 면한다든가 하는 사례가 있을 수 있겠지. 또는 마르크스처럼 자유와 평등이라는 부르주아의 법 이데올로기는 생산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착취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다라고 비판하는 것도 사실은 법을 (권력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본다는 점에서는 같은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지.  


반면 데리다가 말하고 싶은 것은 법이 갖는 힘, 법에 고유한 폭력은 이러한 외재적 비판으로는 충분히 해명되지 않고, 또 충분히 비판되거나 극복될 수도 없다는 거지. 왜냐하면 법의 일차적인 폭력은 바로 새롭게 창설하고 정초하는 힘으로서 수행적 폭력에 있기 때문이지. 


위의 구절에 대한 분석은 이 정도로 하면 충분할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좀 이해가 되었나?



아, 그리고 위의 구절에서 데리다가 “해석의 폭력” 또는 “해석의 힘”이라고 말한 것은 49쪽 이하에 나오는 “첫번째 아포리아: 규칙의 판단중지”를 보면 좀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지. 거기서 데리다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법관(또는 배심원)의 판결에 관한 문제인데, 데리다는 정의로운 판결은 일반적인 법의 규칙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되며, 매 순간, 매 경우마다, “마치 지금까지 법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마치 판사 자신이 매 경우마다 이를 발명한 것처럼, 재창설적인 해석의 행위에 의해” 내려져야 한다고 주장하지. 정의란 일반적인 규칙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떤 독특한 타자, 독특한 사례를 배제하는 게 아니라, 그 독특성을 포함할 수 있도록 일반적인 규칙을 변경하거나 또는 적어도 일반적 규칙의 해석적인 가능성을 활용하여 그 독특성을 존중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지.


데리다는 모든 법은 원초적인 수행적 폭력에 의존해 있기 때문에, 항상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 다시 말해 이러한 원초적인 수행적 폭력 때문에 법은 항상 해체 가능하고, 그래서 정의가 가능하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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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안광복 - 철학하는 이들의 교과서 소크라테스

철학하는 이들의 교과서 소크라테스

안광복

"철학적 사유의 교과서같은 인물"

  소크라테스만큼 못생긴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가 살았던 당시에도 이미 "소크라테스를 닮았다."는 말은 그 자체로 대단히 못생겼음을 나타내는 표현이었다. 수학을 몹시 잘했던 한 젊은이가 이 말을 듣고 정색하며 반박했다는 기록이 아직도 남아있을 정도로 말이다. 반면, "소크라테스같이 생각한다."라는 말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 자체로 매우 진지하고 철학적임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쓰이곤 한다. 확실히 그는 여러 면에서 '철학적 사유의 교과서 같은 인물'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사상을 책으로 쓴 적이 없다. 더욱이, '소크라테스의 사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과연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는 단지 시장거리를 누비며 끊임없이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하며 사색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 자신이 확실히 알고 있었던 것은 "자신은 진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그를 '철학적 사유의 교과서'로 만든 것이다.

  철학을 하는 목적은 지식을 얻는데 있지 않다. 오히려 철학함의 목적은 자신의 지식과 신념이 과연 제대로 된, 의미 있는 것인지를 검토하며 마음 속 깊숙이 박혀있는 독단과 선입견을 제거하는 데 있다. 즉, '편견과 독선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세상과 삶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과연 올바른지 고민하고, 다른 이들과 이성적인 대화를 나눔으로써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것', 이것이 철학 하는 이들의 자세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자세로 평생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건강한 육체에 깃든 건전한 정신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70년 경, 당시 그리스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국가였던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소프로니코스는 석공이었고 어머니 파이아레테는 애 잘 받기로 유명한 산파였다고 한다. 태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귀족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흔히 알려진 대로 소크라테스가 매우 가난한 사람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꽤 알려진 석공이었고 어머니까지 '맞벌이' 하는 상황이었으니 생활이 쪼들렸을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또, 기록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수 차례 굵직한 전투에 참가했었다. 당시 아테네 군대에서는 시민인 병사들 스스로가 전투에 필요한 장비를 구입해야 했다. 때문에 돈이 많은 사람은 말을 사서 기병(騎兵)으로, 그 보다 못한 중산층은 갑옷과 투구를 사 중장갑 보병(paraxis)으로, 이 것도 못사는 사람들은 돌팔매질하는 병사로 전쟁에 나가곤 했다. 소크라테스는 주로 중장갑 보병으로 전투에 참가했다고 한다. 이 점에 미루어 본다면 맨 발인데다가 형편없이 초라한 옷가지로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고유 복장'은, 실제로 그가 가난했기보다 욕심 없는 생활을 원했던 생활태도에서 비롯된 것인 듯 하다.

  아무튼, 2500여 년 전에 석수장이의 아들이었던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소년시절을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어릴 때부터 그와 아주 친한 친구였던 크리톤이 남긴 증언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의 못생긴 용모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장안의 화제'였다고 한다. 소크라테스 조각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확실히 그는 못생겼다. 몹시 거친 피부에 개구리같이 툭 튀어나온 눈, 거기다가 두꺼운 입술에 주저앉은 코...이런 '독특한' 생김새는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이 아무리 놀려도 소크라테스는 밝고 건강하기만 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용모에 대한 아이들의 우스갯소리를 즐기기까지 했다. 자기 눈은 '사방을 잘 볼 수 있도록' 툭 튀어 나왔으며, 길고 똑바른 코 보다 뭉툭한 코가 냄새를 더 잘 맡는다고 자랑하여 주변을 웃기기까지 할 정도로 말이다. 게다가 그는 타고난 건강체질이었다. 그는 나중에 중년이 되어서도 한겨울에 맨 발로 행군을 하고 얇은 겉옷만 걸치고 다녔는데도 별 탈이 없었다고 한다. 나아가, 나이 칠십에 독약을 마셨어도 너무나 건강한 나머지 독기가 퍼지지 않아 '약효가 나오기 위해' 감옥 안을 걸어다녀야 했다는 일화까지 전해진다. '건강한 육체에 깃든 건전한 정신', 이는 어린 시절부터 소크라테스가 평생동안 간직했던 모습이었다.

"너 자신을 알라."
  정상적인 아테네 시민의 삶을 살았다면, 소크라테스는 아마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석공이 되었을 것이다.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아크로폴리스 유적은 그가 이,삼십대를 보낼 무렵에 건축된 것들이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건물 중 어느 부분은 분명 당대 유명한 석공이었던 아버지 소프로니코스를 따라 일을 배우던 젊은 소크라테스의 작품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석수로 알려졌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안 나오는 것을 보면, 소크라테스의 재주는 돌을 쪼아 멋있는 조각을 만드는 데 있지 않았나 보다. 후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그의 재주는 오히려 정신을 모아 아름다운 대화를 만들어 내는 데 있었다.
  당시 아테네는 페리클레스란 현명한 정치가의 지도 아래 최고의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경제가 일어나면 문화도 따라 발전하는 법, 지혜로운 수많은 사람들이 아테네로 모여들었다. 게다가 아테네는 민주주의의 본고장이다. 시민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임없이 토론을 즐겼고, 이 토론의 결과가 국가의 정책과 각종 재판의 판정에 있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곤 했다. 때문에, 아테네에서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조리 있고 설득력 있게 말하는 기술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이 가운데 등장한 사람들이 이른바 '소피스트' 들이다.
  소피스트는 지금의 기준으로 본다면, 변호사와 논술강사, 철학자를 한데 합쳐 논 것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주로 재판에서 벌어지는 논쟁이나 연설에 필요한 기술을 가르쳤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법정에 직접 서기도 하면서 돈을 벌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있어 진리는 상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이들은 돈을 주는 쪽이 갑이냐 을이냐에 따라 어느 경우에는 갑이, 다른 경우에는 을이 '진리'의 입장에 선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소피스트들은 절대적으로 옳은 진리란 없거나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으며, 옳고 그름은 자신이 처한 관점에 따라 서로 달라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프라타고라스의 말은 이러한 그들의 관점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라 하겠다.

  반면, 학자들이 '자연철학자'라고 부르는 한 무리의 철학자들도 아테네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주로 자연현상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세상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어떤 이는 세상의 본질이 '물'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불'이라 하며, 또 어떤 이는 '원자'라고 주장하기도 하면서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는 데 몰두했다. 특히, 아낙사고라스같은 사람들은 '지구는 둥글고 허공에 떠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했다가 아테네를 온통 시끄럽게 하기도 했는데, 이 사실을 보면 이들이 시민들에게 끼쳤던 영향력도 소피스트 못지 않게 컸다고 생각된다.

  소크라테스는 당시 젊은이들이 흔히 그랬던 것처럼 법정과 시장 거리를 누비며 소피스트들의 논변을 듣고 배웠을 것이다. 또한, 그는 아낙사고라스의 제자로부터 철학을 배우기도 했다. 때문에 그가 인간의 일을 판정할 때의 기준이 소피스트들의 주장처럼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을 연구할 때처럼 절대적이지 않은지 고민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만약 인간 사이의 갈등을 판정해 줄 절대적인 진리가 있고 이것을 알 수 있다면, 나아가 이 진리가 이끄는 데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사람들은 훨씬 행복할 것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알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런 진리였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당시 현명하다고 알려진 사람들을 붙잡고 과연 이런 진리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다녔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누구도 소크라테스가 물음에 대해 답변을 줄 수 없었다. 그들에게 물음을 던지면 던질수록 실제로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르며 단지 아는 척하고 있다는 것만이 드러날 뿐이었다.

  이런 가운데, 소크라테스가 깨달음을 얻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델피에는 아폴로 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었고, 사람들은 큰 행사나 사건이 있을 때마다 이 곳에 가서 사제로부터 신탁(神託)을 얻곤 했다. 한 번은 그의 친구 카에레폰이 델피 신전에 가서 이 세상에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 대답은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소크라테스는 이를 믿지 않았다. 그러다 세상에 어떤 현명한 사람에게서도 자신이 원하던 진리를 얻을 수 없었던 소크라테스는 결국 자신이 직접 델피 신전에 가서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묻게 되었다. 그 대답은 놀랍게도 "소크라테스 바로 너 자신이다."는 것이었다. 이에 놀란 소크라테스는 신전의 문을 나서다가 기둥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Gnoti seauton)"는 문구를 보게 된다. 이 문구를 보고 그는 비로소 깨닫는다. 그가 알고 있던 유일한 사실은 자신이 진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그는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현명해 보이는 다른 이들도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진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지만 그들은 자신이 진리를 알고 있다고 믿으며 확신에 차서 행동하고 있다. 이런 행동은 위험한 산길을 마치 길을 다 안다는 듯이 눈을 가리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다. 따라서, 이제 소크라테스는 석공 일을 그만두고 사람들의 '무지(無知)'를 깨우치는 데 일생을 걸게 된다.

"세상을 깨우는 등에"

  소크라테스는 매우 용감한 사람이었다. 이 점은 그가 참가했던 유명한 전투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포티다에아 공략전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부상당한 전우를 구출해 냈으며, 일리온 전투에서는 모두가 도망쳐 버린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남은 졸병으로 장군과 함께 '침착하게 우군과 적군을 둘러보면서' 태연하게 전쟁터를 걸어갔다고 한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용감한 사람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그는 이 용기를 이후 사람들의 무지를 깨우치는 데 사용한다.

  '법을 잘 지켜야 한다.', '전쟁터에서는 적에게 용감해야 한다.'와 같은 말들은 누구나 지켜야 할 도덕 규범이다. 그러나 이것을 비판 없이 무조건 따르는 것은 오히려 무법천지, 비겁함보다 더 큰 해로움을 가져올 수 있다. 예컨대, 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법에 정해진 신께 바치는 예배를 소홀히 한 아버지를 고소하는 것이 과연 사회정의를 이루는 일이라 할 수 있을까? 또, 단 한 사람 남은 적군을 상대로 수 백 명의 병사들이 '용기'를 발휘하여 그를 처참하게 죽이는 것이 과연 진정 올바른 행위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정의와 용기가 과연 무엇인지를 진정 고민해 보아야 진정으로 정의로운 판단과 용기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끊임없이 사람들을 붙잡고 깨우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그러나 그가 한 일은 설교도 책을 쓰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만나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는 것뿐이었다. 그는 정의와 경건과 용기가 무엇인지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이 것이 무엇인지를 자신에게 정의 내려 줄 것을 요구한다. 질문을 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모순된 것이며 사실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방법을 학자들은 반어법(反語法:elenchus)이라 부른다. 이는 소크라테스 자신이 직접 틀렸음을 설명하지 않고 안다고 확신하고 있는 상대방이 스스로 사유의 과정을 거쳐 자신의 믿음이 잘못되어 있음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방법이다. 이런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지혜를 낳는 산파'라고 부른다. 산파가 하는 역할은 아이 낳기를 도와주는 것이지 직접 애를 낳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도 지혜를 제시해 주는 것이 아니라 대화하는 사람이 지혜를 스스로 깨닫도록 도와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법을 '산파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행동이 항상 시민들에게 환영받은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어하는 것만을 듣는 경향이 있다. 듣기 싫은 물음만 골라서 던지며 자기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드러내도록 대화를 이끄는 소크라테스가 그들에게 만나고 싶은 사람이었을 리 없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무지(無智)에 빠져 맹목적으로 행동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질문을 해댔다. 그는 스스로 '아테네라는 혈통 좋은 거대한 말(馬)이 졸지 않도록 끊임없이 깨물어대는 등에'임을 자처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그리고 죽음

  그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유명해지기 시작한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산파술로 깨달음을 얻고 제자가 되었다. '서양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플라톤도 그 중 하나이다. 심지어 어떤 젊은이들은 그를 흉내내어 남들을 가르치려고 까지 했다.  그러나 유명해 지면 스캔들도 많아지는 법, 하루종일 시장 바닥을 누비며 사람들을 붙잡고 무지(無智)를 깨우치려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이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한편으로 우스꽝스럽게도 보였나 보다. 안티스테네스의 유명한 희곡 {구름들}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당시 코메디 물의 풍자 소재로 자주 등장하곤 했다. 그의 아내 크산티페가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악처(惡妻)'로 떠오른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날이 갈수록 '괴짜' 수준을 넘어서 권력자들에게 '위험인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결국 젊은이들에게 권력자의 권위와 지혜에 대해 물음을 던지며 비판할 능력을 키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권력을 가진 자들의 조용한 압력이 시작된다. 스파르타의 조종으로 집권한 30인의 참주들은 그에게 가르침을 중단할 것을 명령했으며, 이후 다시 나타난 민주정에서도 권력자들은 그가 자신들의 입장에 야합할 것을 권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단호히 거절하곤 했다. 악과 타협하지 않고 오로지 진리만을 좇는 자세를 널리 퍼뜨리는 그의 태도는, 비판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다수의 사람들 때문에 집권할 수 있었던 권력자들에게는 점점 큰 위협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기원전 399년, 마침내 그는 세 명의 시민에게서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신을 믿지 않는다'는 죄명으로 고소를 당하고 500인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사실, 고소한 이들도 소크라테스를 굳이 처벌하려고 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최소한 쩔쩔매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고소 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움찔하여 가르침을 '자제하는' 수준에 머물러 주기를 더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법정에서의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이들의 예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는 법정에서 고소 당한 사람이 흔히 그렇듯 '눈물로써 애원하지 않았다.' 그는 당당하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다. 이때의 그의 변론 내용은 제자 플라톤의 기록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너무도 당당한 모습에 반감을 샀는지 어리석은 아테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에게 360대 240이라는 표차로 유죄를 선고한다. 유죄 이후에 형량을 선고받는 데에 있어서도 소크라테스는 판결을 받아드리고 관대한 처벌을 바라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은 국가에 기여한 공로로 영빈관에서 평생 식사를 제공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주장하여 배심원들의 분노를 산다. 그래서 이번에는 더욱 압도적인 표차로 사형을 언도받고 만다.
  사형 선고를 내리기는 했지만 그가 실제로 사형 받으리라고 믿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런 '유명인'들은 보통 뇌물을 써서 탈출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사형 선고는 단지 '망신주기' 정도의 의미였던 듯 싶다. 실제로 크리톤을 비롯한 친구들은 그를 탈출시키기 위해 돈을 모아 간수를 매수해 놓기도 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친구들의 탈출 제안을 단호히 거절한다. 그 이유는 평생 다른 이들에게 법을 지키라고 한 자신이 스스로 법을 어길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결국 그는 독약을 마시고 숨을 거둔다. 그는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한 최초의 '철학의 순교자'였던 것이다.  

"인류를 위한 윤리 교사"

  소크라테스가 평생 자신이 확실히 알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은 '자신은 진리를 모른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현자(賢者)가 될 수 있었다. 그의 시대에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많은 편견과 선입관 속에서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믿으며 별다른 비판의식 없이 행동하고 살아간다.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편견에서 빠져 나와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진정 의미 있고 올바른 것인지 스스로 묻도록 권유하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위대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철학 하는 자세에 있다. 그는 생애를 통해 철학하는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는 진정 비판정신이 살아있는 바람직한 삶의 태도를 제시한 인류를 위한 최초의 윤리교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안광복(서강대 철학과 박사과정, 중동고 철학교사)이 작성한 이 글은 "고교독서평설" (지학사) 2001년 1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상업적 이용에 대한 권리는 지학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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