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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는 이들의 교과서 소크라테스
안광복
"철학적 사유의 교과서같은 인물"
소크라테스만큼 못생긴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가 살았던 당시에도 이미 "소크라테스를 닮았다."는 말은 그 자체로 대단히 못생겼음을 나타내는 표현이었다. 수학을 몹시 잘했던 한 젊은이가 이 말을 듣고 정색하며 반박했다는 기록이 아직도 남아있을 정도로 말이다. 반면, "소크라테스같이 생각한다."라는 말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 자체로 매우 진지하고 철학적임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쓰이곤 한다. 확실히 그는 여러 면에서 '철학적 사유의 교과서 같은 인물'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사상을 책으로 쓴 적이 없다. 더욱이, '소크라테스의 사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과연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는 단지 시장거리를 누비며 끊임없이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하며 사색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 자신이 확실히 알고 있었던 것은 "자신은 진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그를 '철학적 사유의 교과서'로 만든 것이다.
철학을 하는 목적은 지식을 얻는데 있지 않다. 오히려 철학함의 목적은 자신의 지식과 신념이 과연 제대로 된, 의미 있는 것인지를 검토하며 마음 속 깊숙이 박혀있는 독단과 선입견을 제거하는 데 있다. 즉, '편견과 독선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세상과 삶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과연 올바른지 고민하고, 다른 이들과 이성적인 대화를 나눔으로써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것', 이것이 철학 하는 이들의 자세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자세로 평생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건강한 육체에 깃든 건전한 정신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70년 경, 당시 그리스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국가였던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소프로니코스는 석공이었고 어머니 파이아레테는 애 잘 받기로 유명한 산파였다고 한다. 태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귀족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흔히 알려진 대로 소크라테스가 매우 가난한 사람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꽤 알려진 석공이었고 어머니까지 '맞벌이' 하는 상황이었으니 생활이 쪼들렸을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또, 기록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수 차례 굵직한 전투에 참가했었다. 당시 아테네 군대에서는 시민인 병사들 스스로가 전투에 필요한 장비를 구입해야 했다. 때문에 돈이 많은 사람은 말을 사서 기병(騎兵)으로, 그 보다 못한 중산층은 갑옷과 투구를 사 중장갑 보병(paraxis)으로, 이 것도 못사는 사람들은 돌팔매질하는 병사로 전쟁에 나가곤 했다. 소크라테스는 주로 중장갑 보병으로 전투에 참가했다고 한다. 이 점에 미루어 본다면 맨 발인데다가 형편없이 초라한 옷가지로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고유 복장'은, 실제로 그가 가난했기보다 욕심 없는 생활을 원했던 생활태도에서 비롯된 것인 듯 하다.
아무튼, 2500여 년 전에 석수장이의 아들이었던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소년시절을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어릴 때부터 그와 아주 친한 친구였던 크리톤이 남긴 증언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의 못생긴 용모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장안의 화제'였다고 한다. 소크라테스 조각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확실히 그는 못생겼다. 몹시 거친 피부에 개구리같이 툭 튀어나온 눈, 거기다가 두꺼운 입술에 주저앉은 코...이런 '독특한' 생김새는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이 아무리 놀려도 소크라테스는 밝고 건강하기만 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용모에 대한 아이들의 우스갯소리를 즐기기까지 했다. 자기 눈은 '사방을 잘 볼 수 있도록' 툭 튀어 나왔으며, 길고 똑바른 코 보다 뭉툭한 코가 냄새를 더 잘 맡는다고 자랑하여 주변을 웃기기까지 할 정도로 말이다. 게다가 그는 타고난 건강체질이었다. 그는 나중에 중년이 되어서도 한겨울에 맨 발로 행군을 하고 얇은 겉옷만 걸치고 다녔는데도 별 탈이 없었다고 한다. 나아가, 나이 칠십에 독약을 마셨어도 너무나 건강한 나머지 독기가 퍼지지 않아 '약효가 나오기 위해' 감옥 안을 걸어다녀야 했다는 일화까지 전해진다. '건강한 육체에 깃든 건전한 정신', 이는 어린 시절부터 소크라테스가 평생동안 간직했던 모습이었다.
"너 자신을 알라."
정상적인 아테네 시민의 삶을 살았다면, 소크라테스는 아마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석공이 되었을 것이다.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아크로폴리스 유적은 그가 이,삼십대를 보낼 무렵에 건축된 것들이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건물 중 어느 부분은 분명 당대 유명한 석공이었던 아버지 소프로니코스를 따라 일을 배우던 젊은 소크라테스의 작품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석수로 알려졌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안 나오는 것을 보면, 소크라테스의 재주는 돌을 쪼아 멋있는 조각을 만드는 데 있지 않았나 보다. 후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그의 재주는 오히려 정신을 모아 아름다운 대화를 만들어 내는 데 있었다.
당시 아테네는 페리클레스란 현명한 정치가의 지도 아래 최고의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경제가 일어나면 문화도 따라 발전하는 법, 지혜로운 수많은 사람들이 아테네로 모여들었다. 게다가 아테네는 민주주의의 본고장이다. 시민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임없이 토론을 즐겼고, 이 토론의 결과가 국가의 정책과 각종 재판의 판정에 있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곤 했다. 때문에, 아테네에서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조리 있고 설득력 있게 말하는 기술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이 가운데 등장한 사람들이 이른바 '소피스트' 들이다.
소피스트는 지금의 기준으로 본다면, 변호사와 논술강사, 철학자를 한데 합쳐 논 것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주로 재판에서 벌어지는 논쟁이나 연설에 필요한 기술을 가르쳤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법정에 직접 서기도 하면서 돈을 벌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있어 진리는 상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이들은 돈을 주는 쪽이 갑이냐 을이냐에 따라 어느 경우에는 갑이, 다른 경우에는 을이 '진리'의 입장에 선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소피스트들은 절대적으로 옳은 진리란 없거나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으며, 옳고 그름은 자신이 처한 관점에 따라 서로 달라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프라타고라스의 말은 이러한 그들의 관점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라 하겠다.
반면, 학자들이 '자연철학자'라고 부르는 한 무리의 철학자들도 아테네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주로 자연현상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세상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어떤 이는 세상의 본질이 '물'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불'이라 하며, 또 어떤 이는 '원자'라고 주장하기도 하면서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는 데 몰두했다. 특히, 아낙사고라스같은 사람들은 '지구는 둥글고 허공에 떠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했다가 아테네를 온통 시끄럽게 하기도 했는데, 이 사실을 보면 이들이 시민들에게 끼쳤던 영향력도 소피스트 못지 않게 컸다고 생각된다.
소크라테스는 당시 젊은이들이 흔히 그랬던 것처럼 법정과 시장 거리를 누비며 소피스트들의 논변을 듣고 배웠을 것이다. 또한, 그는 아낙사고라스의 제자로부터 철학을 배우기도 했다. 때문에 그가 인간의 일을 판정할 때의 기준이 소피스트들의 주장처럼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을 연구할 때처럼 절대적이지 않은지 고민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만약 인간 사이의 갈등을 판정해 줄 절대적인 진리가 있고 이것을 알 수 있다면, 나아가 이 진리가 이끄는 데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사람들은 훨씬 행복할 것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알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런 진리였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당시 현명하다고 알려진 사람들을 붙잡고 과연 이런 진리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다녔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누구도 소크라테스가 물음에 대해 답변을 줄 수 없었다. 그들에게 물음을 던지면 던질수록 실제로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르며 단지 아는 척하고 있다는 것만이 드러날 뿐이었다.
이런 가운데, 소크라테스가 깨달음을 얻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델피에는 아폴로 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었고, 사람들은 큰 행사나 사건이 있을 때마다 이 곳에 가서 사제로부터 신탁(神託)을 얻곤 했다. 한 번은 그의 친구 카에레폰이 델피 신전에 가서 이 세상에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 대답은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소크라테스는 이를 믿지 않았다. 그러다 세상에 어떤 현명한 사람에게서도 자신이 원하던 진리를 얻을 수 없었던 소크라테스는 결국 자신이 직접 델피 신전에 가서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묻게 되었다. 그 대답은 놀랍게도 "소크라테스 바로 너 자신이다."는 것이었다. 이에 놀란 소크라테스는 신전의 문을 나서다가 기둥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Gnoti seauton)"는 문구를 보게 된다. 이 문구를 보고 그는 비로소 깨닫는다. 그가 알고 있던 유일한 사실은 자신이 진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그는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현명해 보이는 다른 이들도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진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지만 그들은 자신이 진리를 알고 있다고 믿으며 확신에 차서 행동하고 있다. 이런 행동은 위험한 산길을 마치 길을 다 안다는 듯이 눈을 가리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다. 따라서, 이제 소크라테스는 석공 일을 그만두고 사람들의 '무지(無知)'를 깨우치는 데 일생을 걸게 된다.
"세상을 깨우는 등에"
소크라테스는 매우 용감한 사람이었다. 이 점은 그가 참가했던 유명한 전투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포티다에아 공략전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부상당한 전우를 구출해 냈으며, 일리온 전투에서는 모두가 도망쳐 버린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남은 졸병으로 장군과 함께 '침착하게 우군과 적군을 둘러보면서' 태연하게 전쟁터를 걸어갔다고 한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용감한 사람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그는 이 용기를 이후 사람들의 무지를 깨우치는 데 사용한다.
'법을 잘 지켜야 한다.', '전쟁터에서는 적에게 용감해야 한다.'와 같은 말들은 누구나 지켜야 할 도덕 규범이다. 그러나 이것을 비판 없이 무조건 따르는 것은 오히려 무법천지, 비겁함보다 더 큰 해로움을 가져올 수 있다. 예컨대, 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법에 정해진 신께 바치는 예배를 소홀히 한 아버지를 고소하는 것이 과연 사회정의를 이루는 일이라 할 수 있을까? 또, 단 한 사람 남은 적군을 상대로 수 백 명의 병사들이 '용기'를 발휘하여 그를 처참하게 죽이는 것이 과연 진정 올바른 행위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정의와 용기가 과연 무엇인지를 진정 고민해 보아야 진정으로 정의로운 판단과 용기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끊임없이 사람들을 붙잡고 깨우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그러나 그가 한 일은 설교도 책을 쓰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만나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는 것뿐이었다. 그는 정의와 경건과 용기가 무엇인지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이 것이 무엇인지를 자신에게 정의 내려 줄 것을 요구한다. 질문을 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모순된 것이며 사실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방법을 학자들은 반어법(反語法:elenchus)이라 부른다. 이는 소크라테스 자신이 직접 틀렸음을 설명하지 않고 안다고 확신하고 있는 상대방이 스스로 사유의 과정을 거쳐 자신의 믿음이 잘못되어 있음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방법이다. 이런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지혜를 낳는 산파'라고 부른다. 산파가 하는 역할은 아이 낳기를 도와주는 것이지 직접 애를 낳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도 지혜를 제시해 주는 것이 아니라 대화하는 사람이 지혜를 스스로 깨닫도록 도와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법을 '산파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행동이 항상 시민들에게 환영받은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어하는 것만을 듣는 경향이 있다. 듣기 싫은 물음만 골라서 던지며 자기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드러내도록 대화를 이끄는 소크라테스가 그들에게 만나고 싶은 사람이었을 리 없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무지(無智)에 빠져 맹목적으로 행동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질문을 해댔다. 그는 스스로 '아테네라는 혈통 좋은 거대한 말(馬)이 졸지 않도록 끊임없이 깨물어대는 등에'임을 자처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그리고 죽음
그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유명해지기 시작한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산파술로 깨달음을 얻고 제자가 되었다. '서양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플라톤도 그 중 하나이다. 심지어 어떤 젊은이들은 그를 흉내내어 남들을 가르치려고 까지 했다. 그러나 유명해 지면 스캔들도 많아지는 법, 하루종일 시장 바닥을 누비며 사람들을 붙잡고 무지(無智)를 깨우치려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이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한편으로 우스꽝스럽게도 보였나 보다. 안티스테네스의 유명한 희곡 {구름들}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당시 코메디 물의 풍자 소재로 자주 등장하곤 했다. 그의 아내 크산티페가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악처(惡妻)'로 떠오른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날이 갈수록 '괴짜' 수준을 넘어서 권력자들에게 '위험인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결국 젊은이들에게 권력자의 권위와 지혜에 대해 물음을 던지며 비판할 능력을 키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권력을 가진 자들의 조용한 압력이 시작된다. 스파르타의 조종으로 집권한 30인의 참주들은 그에게 가르침을 중단할 것을 명령했으며, 이후 다시 나타난 민주정에서도 권력자들은 그가 자신들의 입장에 야합할 것을 권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단호히 거절하곤 했다. 악과 타협하지 않고 오로지 진리만을 좇는 자세를 널리 퍼뜨리는 그의 태도는, 비판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다수의 사람들 때문에 집권할 수 있었던 권력자들에게는 점점 큰 위협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기원전 399년, 마침내 그는 세 명의 시민에게서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신을 믿지 않는다'는 죄명으로 고소를 당하고 500인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사실, 고소한 이들도 소크라테스를 굳이 처벌하려고 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최소한 쩔쩔매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고소 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움찔하여 가르침을 '자제하는' 수준에 머물러 주기를 더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법정에서의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이들의 예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는 법정에서 고소 당한 사람이 흔히 그렇듯 '눈물로써 애원하지 않았다.' 그는 당당하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다. 이때의 그의 변론 내용은 제자 플라톤의 기록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너무도 당당한 모습에 반감을 샀는지 어리석은 아테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에게 360대 240이라는 표차로 유죄를 선고한다. 유죄 이후에 형량을 선고받는 데에 있어서도 소크라테스는 판결을 받아드리고 관대한 처벌을 바라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은 국가에 기여한 공로로 영빈관에서 평생 식사를 제공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주장하여 배심원들의 분노를 산다. 그래서 이번에는 더욱 압도적인 표차로 사형을 언도받고 만다.
사형 선고를 내리기는 했지만 그가 실제로 사형 받으리라고 믿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런 '유명인'들은 보통 뇌물을 써서 탈출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사형 선고는 단지 '망신주기' 정도의 의미였던 듯 싶다. 실제로 크리톤을 비롯한 친구들은 그를 탈출시키기 위해 돈을 모아 간수를 매수해 놓기도 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친구들의 탈출 제안을 단호히 거절한다. 그 이유는 평생 다른 이들에게 법을 지키라고 한 자신이 스스로 법을 어길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결국 그는 독약을 마시고 숨을 거둔다. 그는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한 최초의 '철학의 순교자'였던 것이다.
"인류를 위한 윤리 교사"
소크라테스가 평생 자신이 확실히 알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은 '자신은 진리를 모른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현자(賢者)가 될 수 있었다. 그의 시대에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많은 편견과 선입관 속에서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믿으며 별다른 비판의식 없이 행동하고 살아간다.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편견에서 빠져 나와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진정 의미 있고 올바른 것인지 스스로 묻도록 권유하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위대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철학 하는 자세에 있다. 그는 생애를 통해 철학하는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는 진정 비판정신이 살아있는 바람직한 삶의 태도를 제시한 인류를 위한 최초의 윤리교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안광복(서강대 철학과 박사과정, 중동고 철학교사)이 작성한 이 글은 "고교독서평설" (지학사) 2001년 1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상업적 이용에 대한 권리는 지학사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