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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지음, 정해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평점 :
30년을 넘게 살아왔지만 내 인생을 어떤 키워드로 말할 수 있겠느냐 하면, 부끄럽지만 한 가지도 제대로 말할 수 없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더더욱. 나는 제대로 어떤 역할을 살아낸 적이 없다.
독후감을 쓰면 상금을 준다고? 그렇담 재미있게 읽고 독후감을 써야지. 얄팍한 생각으로 읽기 시작한 책이었다. 오우… 결코 마냥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오히려 괴로운 쪽에 가까웠다. 그간 나는 나를 소수자라 생각하고, 소수자에 대해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다고 여겼다. 젊은 미혼 여성, 1인 가구, 월세 원룸 거주, 부와 권력 없음, 그렇다고 비빌 언덕이 있는 것도 아니니 이 정도면 소수자 아닌가? …책을 읽고는 감히 소수자라 함부로 말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야말로 생존의 위협을 수시로 받는 여자의 이야기가 내내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왜??” 이유 없이 저질러지는 악행 앞에서 의미 없는 질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 왜라는 말이 나왔다. 아니, 도대체 왜 저런 짓을 당해야 하는 거냐고… 수시로 화가 나고, 한숨이 나오고, 슬펐다.
종국에는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왜 나를 화가 나게 하고, 슬프게 하는 이야기를 이토록 열심히 몰입해서 읽고 있는 것일까. 여덟 가지 인생을 다 읽고 난 지금은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기 위해서’, 그럼으로써 내 인생의 ‘제1장을 열기 위해서’였다고 뒤늦게 깨닫는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것과 같다. 우리는 종종 나도 영원히 살고 너도 영원히 살 거라고 착각하지만,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명징하다. 마지막을 보살펴주고 또 들어줘야 한다. 사실 들어주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이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라면… 생각만으로도 이미 거부감이 들지 않나? 팔팔한 친구의 가벼운 불평불만을 듣는 일도 종종 피곤하게 다가오는데. 왜 이렇게 거부감이 든다고 대번에 말할 수 있냐 하면 나에게도 꼭 그런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엄마. 엄마는 쇠하고 있고, 인생을 살며 수많은 고통을 겪어 왔고 또 겪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 울분을 터뜨리듯 이야기한다. 그 앞에서 난 늘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엄마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엄마 대신 아파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엄마 대신 운동을 하거나 엄마의 건강을 챙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엄마 대신 행복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엄마 삶에서 대신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내 삶에나 충실하자고. 부끄럽다. 왜 들어줄 수 있다는 걸 몰랐을까. 아마 ‘잘’ 듣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아무런 생각과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책에서 독을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일컫는 대목이 나온다. 그것은 아무도 차별하지 않고 부자건 가난뱅이건, 공산당이건 자본주의자건, 여자건 남자건, 누구나 해치운다고. 죽음 역시 아무도 차별하지 않고 누구나 해치운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우리는 모두 나약하고 고통스러운 한낱 인간일 뿐이고, “때로는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이자 유일한 것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이다.(343)”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야기를 제대로 잘 들어주고 나면 제1장이 형성된다. 그것은 시작이기도 하고 끝이기도 하며, 숫자 8과 같은 한 획의 아름다운 곡선의 고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