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나는 손으로 걷는다”: 글쓰기=패배라는 불가능성
헤르타 뮐러의 노벨문학상 수상 그리고 연이은 방한 소식이라는 후광으로 인해 우리가 제대로 곱씹어보지 못한 측면이 존재하는 듯 보인다. “우리의 숨을 멎게 하던 ‘굴락(수용소) 문학’은 이제 자연적인 수명을 다했다.” 2009년 독일의 주간지 <차이트>에 실린 『숨그네』에 대한 코멘트다. 헤르타 뮐러의 ‘문학성’(litterarite)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결코 에두르지 않고 그녀에게 직격탄을 날린 셈인데, 그녀의 소설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조어(造語) 사용과 시적인 비유가, 외투에 흘린 침마저도 그대로 얼어붙게 만드는 강제수용소라는 엄혹한 현실을 추상화시키고 있다는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물론 그녀의 소설에 비판적인 목소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황은 반대였다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특히나 지난해 들려온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 이후에는 더더욱이나. 다만 우리를 사로잡는 화두는 이런 것, 너무나 해묵은, 해묵었다는 표현마저 해묵은, 다음과 같은 질문인 것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범박하게 말하자면, 헤르타 뮐러의 소설은 ‘프로파간다’가 아니다. 그보다는 구체적 개인의 실존에 그녀는 오로지 집중해왔을 뿐이었다. 기실 문학이라는 것이 그러한 것이었지 않았나. “지푸라기 하나에서도 큰 싸움을 찾아내는”(『햄릿』4막 4장)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다만 그녀는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에서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낱말들이 너무나 강압적이어서, 체험은 그 낱말들에 매달려야만 와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263).” 과연, 헤르타 뮐러는 이를테면 단장(短章)으로 구성된 『저지대』의 첫 장에서 하필이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자신의 최초의 문학적 여정을 시작했었다. “아버지가 방 한가운데 관 속에 누워 있었다.”(7) 이는 어쩌면 자못 감동적인 지점이다. 그녀는 아버지를 결코,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랑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나치에 부역한 전력을 가진 아버지는 그녀에게 차라리 애증의 대상에 가깝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 애증의 대상으로서의 아버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떨림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다시 한 번 증명되는 명제가 하나 있다. “소설은 가족들의 이야기다.” 이것이 우리에게 헤르타 뮐러의 소설이 당혹스럽게 감동스러운 이유다.
헤르타 뮐러는 반문한다. ‘나’는 모래로 집을 짓고 있는데, 어째서 “아이들이 하는 것은 전부 놀이라고 할까.”(67) 어째서 어머니들이 하는 것만이 일이 되나요. 이 말은 우리에게 흡사 이렇게 들려온다. 나는 윤리(의 정치)를 말하고 있는데 왜 당신들은 나에게 정치(의 윤리)를 요구하시나요. 말하자면 이는, 문학은 윤리를 통해 정치를 말하는 것이지, 정치를 통해 윤리를 말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전언인 것이 아닐까. 자신이 소설 속에서 (언어로) 형상화하는 그 어는 것 하나 엄혹한 현실과 합치하지 않으나, 또 합치될 수도 없으나, 동시에 “그 모든 것이 진실”(261)이 될 수 있다는 것. ‘사건’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그녀 스스로 너무나 자명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녀의 소설이 감동스러운 두 번째 지점이 여기에 있다. 그녀는 포기하는 대신 결단한다. 비록 다음과 같을 지라도. “침묵하면 불편해지고, 말을 하면 우스워져.”(7) 언어의 불가능성 앞에서 그녀는 부단한 시지프스적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것이다. 바위가 둔덕에서 굴러 떨어진다. 공(功)을 들여 다시 위에 올려놓는다. 허나 또 한 번 하락하는 돌덩이. 묵묵히 바위를 밀어 올리는 그녀의 숭고하리만치 돈키호테적인 노력.
“손톱을 막 깎고 나면 제대로 걸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녀는 여기서 행을 나누고, 다시 말해, 숨을 한 번 크게 고르고는 기어이 다시 말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손으로 걷는다.” 제대로 걷기 힘들다 해도 결코 멈추지는 않겠다는 것. 말하자면 이 행간의 침묵, 그것이 헤르타 뮐러의 소설이 기어이 감동스러운 이유다. 이 사이-공간에서 그녀는 멈추지 않고, 다시 말하건대, ‘결단’한다. 그녀는 글쓰기(언어)의 불가능성 앞에서 겸손해진다. 주저 없이, 아니 그냥 묵묵히 글쓰기(언어의) 몰락을 선택한다. 몰락 자체는 패배다. 물론이다. 하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닌 법이라고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말했다. 그녀는 그렇게 계속 글쓰기=패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