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진,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
데이비드 바사미언.하워드 진 지음, 강주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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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의 ‘반인간주의’,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과 전후 ‘포스트’ 담론의 대두 이후, 오랫동안 서구 지성사의 중추적 역할을 자임해온 인문주의(Humanism)의 몰락의 속도는 가팔랐다. 그 여파는 주지하다시피 현재진행중이다. 단적으로 오늘날 미국과 한국에서 인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원생들의 처지만 살펴보더라도 異論의 여지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변변한 ‘일자리’가 없다는 사실과, 정년 보장은커녕 건강보험 혜택도 받지 못한 채 미래에 대한 어떤 전망도 없이 시간강사나 기껏해야 겸임교수로 여러 학교를 전전하며 강의를 해야 하는 암울한 상황 앞에서 한숨짓기가 일쑤다. 보스턴대 명예교수인 역사학자 하워드 진을 다룬 『하워드 진,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는 전술한 시대적 조류와는 걸맞지 않게 ‘인문주의의 부활’을 역설하고 있다.

 

反인문주의의 역사적 연원은 얕지 않다. 1960~70년대 이후 미국과 영국 대학의 인문학부에 프랑스 이론이 출현하고, 베트남 전쟁에 대해 널리 퍼진 반감 등의 영향으로 반인문주의의 기운은 여지없이 미국의 지성계를 강타하기에 이른다. 이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사상가들인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소쉬르의 사유 전반을 관류하는 ‘인간-저자의 죽음’이라는 핵심적인 테제로 요약이 가능하다. 이전까지 충분히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받아온 ‘위대한 문학 텍스트의 중심성’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호메로스, 헤로도토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성서, 베르길리우스, 단테, 아우구스티누스,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도스토예프스키 등을 망라하는 유서 깊은 인문학 도서목록의 질이 이제 ‘해체’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의심’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사이드는 『저항의 인문학』의 진정한 주제가 ‘말 그대로의 인문주의’가 아니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전통의 ‘방향성’ 자체는 이어받되 그것을 ‘매우 선택적으로만 이용’하겠다고 밝힌다. 그가 강조점을 두는 것은 현재적 맥락의 인문주의이다. “인문주의의 현재성을 재숙고하고 재검토하고 재정식화해야 하는 때”가 도래했다. 사이드는 덧붙인다. ‘변화는 곧 인간의 역사’ 자체인데 이 역사야말로 ‘인문학의 근본 전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변화’란 “인문주의라는 관념을 구성하면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비극적 결함”으로, 구체적으로는, 달라진 그리고 달라지고 있는 ‘우리’라는 범주 기준을 전제한 것이다. 미국과 같이 근본적으로 다문화 사회인 곳에서 “백인, 남성, 유럽인이자 미국인인 우리”의 개념이야말로 해체되어 마땅한 것이 아니냐고 사이드는 주장한 바 있다.


사이드적 인문주의의 종착점은 문학을 포함한 예술이라고 하는 ‘불안정한 추방의 장소’에로 향한다. ‘추방의 장소’라는 표현이 구사된 것이 특이한데, 이는 사이드 스스로 그 장소가 “유감스럽게도 그 안에서 누구도 후퇴하거나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긴급하고 저항적이며 비타협적인 예술의 영역”이라 생각한 것과 맞닿는다. 그리고는, 필연적으로 ‘실천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때문에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의 하워드 진이라면 사이드의 예술론을 틀림없이 명백한 ‘자기기만’ 행위로 비판할 것이다. 일례로 영화 「대부」는 예술적으로 훌륭한 영화라 하더라도 그 속에 등장하는 자객, 암살자, 폭력배조차 결국에는 마치 선한 사람인양 미화되고 만다는 것이다.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에서 드러나는 하워드 진의 인문주의적 태도는 굉장히 간결하고 명쾌하다. 이는 시대의 양심으로 대변되는 그의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와 더불어, 이 책이 저널리스트이자 인터뷰의 대가로 알려진 데이비드 바사미언과의 현장감 있는 인터뷰 형식의 외피를 띠고 있는 것에 연유한다. 하워드 진의 문화예술론의 핵심은 “사회적 맥락 안에서 개인의 이야기에 접근”해보려는 것에 있다. 방점은 ‘사회적 맥락 안에서’에 찍힌다. 예술은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힘’을 주는데, 재미없는 수차례의 강의보다 한 편의 예술작품이 사회의 핵심을 보다 정확히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가 옹호하는 문학작품의 전형이 여론조작과 언어조작 ― ‘이중 언어’와 ‘이중 사고’가 횡행하고 있는 미래 전체사회를 비판한 조지 오웰의 『1984』와 같은 류의 작품이 되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워드 진의 예술론은 군더더기가 없는 만큼 적지 않은 논쟁의 씨앗을 품고 있다. 자연스레 문학의 가치를 외재적 측면에만 둘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반론을 예상할 수밖에 없다. ‘문학과 활자화된 글의 가치’만을 중시한 나머지 영상 미디어의 존재론적 가치를 손쉽게 폄하한 태도 역시 뒷맛이 개운치 않다.

 

오늘날 인문주의의 부활 담론을 살펴볼 때 상당부분 ‘정체성’ 연구에 중점을 둔 “탈식민주의, 민족학, 문화 연구 같은 최신 유행” 사조의 흐름이 두드러지는 경향을 그리 어렵지 않게 확인하게 된다.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 중에는 “단어-회전과 태평한 전문성이라는 공장”의 엘리트주의적 나르시시즘에 지나지 않을 뿐임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경우가 심심찮은데, 사이드의 다음과 같은 전언을 경청해볼 필요가 있다. 인문주의적 지식에는 “근본적으로 불완전하고, 불충분하며 임시적이고, 의문스럽고 논쟁적인 무언가”가 항시 존재하게 마련이니 이야말로 ‘비극적 결함’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비극’은 다른 한편 “인간의 의지와 행위능력이 이뤄낸 형식의 성취”를 가능케 하는 인문주의의 또 하나의 얼굴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인문주의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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