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문화재 무송 박병천
이치헌 지음, 김태영 기획 / 문보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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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송 박병천의 넋풀이를 다시 듣는다. 장단 소리에 맞추어 구슬피 들리는 목소리가 절절하다. 힘을 주지도 기교도 부리지 않았다. 읊조리듯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한이 서려 있다. 책을 읽는 동안에도 줄곧 그의 소리를 들었다. 김영동, 장사익의 노래를 가끔 들으며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들의 음악 이전에 박병천이 있었다니. 그의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하던 일이 멈춰지고 가만히 눈이 감겨진다.

 

<무송 박병천>(문보재)을 읽는 동안에도 내내 그의 소리를 들었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삶을 엿보며 소리를 듣고, 소리를 듣다가 그의 삶이 그러했음을 짐작했다. 누구처럼 득음을 위해 폭포수 아래 정좌하여 피나는 연습을 한 것도 아니었다. 목포상선고등학교(현 목포해양대학교)를 다녔고 젊은 시절 방황했다. 그러나 무인(巫人)의 삶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의 세계, 소리와 춤은 태어나면서부터 그의 삶이었고, 그의 삶 자체가 무()였다.

 

박병천은 태어나면서부터 굿판에서 자랐다. 그의 집은 9대를 이어온 세습 무가의 가문이었다. 보고 듣는 것이 무악이었고 굿판 음식을 먹고 자랐다. 젊은 시절 당골이 되기 싫어 방황했지만 두 번째 아내 정숙자를 만나며 무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박병천은 진도 민속문화의 대변자로서 진도와 외부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본인 자신도 진도의 민속과 굿 등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인류 무형유산 강강술래를 비롯하여 진도씻김굿, 진도다시래기, 진도만가, 남도들노래 등 진도의 무형유산이 그를 통해 세계 무대에 알려졌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진도의 풍속과 음악은 어떠한 형태로 남아 있을까를 잠시 상상해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로 인해 진도의 문화유산은 더욱 창조적인 형태로 남았다는 것이다. 뼛속 깊이 새겨진 무()DNA, 자유로운 영혼, 창조적인 정신이 만들어낸 굿과 소리와 춤은 박병천 그 자신이자 삶이었다. 그러했기에 누구도 쉽게 따라할 수 없었다. 그를 지켜보았던 사람들은 그가 소리와 춤을 다스릴 줄 안다고 했다. 또한 과거의 것을 그대로 따라 하지 않았던 탓에 그의 공연은 같으면서도 달랐다. 제자들에게 강조한 것 또한 이와 같았다. 그게 바로 무의 속성이다.

 

<무송 박병천>은 인간문화재 박병천을 씻기는 책이라고 저자 이치헌은 말한다. 그래서일까. 여느 책과 달리 주변 인물의 생생한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다. 만약 전기나 평전처럼 그의 생애사 위주로 이야기를 구성했다면 밋밋하고 재미없었을 것이다. 생생한 인터뷰 글들이 그를 보다 현장감 있게 설명한다. 마치 인간 박병천을 씻기듯 그를 스쳐간 인연들이 그를 추억하고 기억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다. 3년에 가까운 시간이 이를 말해준다. 박병천 선생을 기리고, 남은 이들의 복을 빌어주고 싶다는 저자의 의도는 충분히 구현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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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가게 이야기 - 마트와 편의점에는 없는, 우리의 추억과 마을의 이야기가 모여 있는 곳
박혜진.심우장 지음 / 책과함께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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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말 대학 시절 농활을 다녔던 마을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선배와 연이 닿은 것이 계기가 되어 몇몇이 찾아간 것이다. 처음 연을 맺은 지 30년이 다 되어 가는지라 매우 반가웠다. 우리를 챙겨주셨던 마을 형님은 그대로셨고, 여전히 마을을 지키고 계셨다. 마을을 잠시 둘러보고 농활 당시 숙소로 묵었던 구멍가게에 들렸다. 건물 형태는 그대로였으나 구멍가게는 없어진 지 오래였다. 의자와 탁자 몇 개를 남겨 놓고 마을 분들이 잠시 지나다 쉬는 사랑방이 되어 있었다.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내 기억 속 마을의 구멍가게는 그래도 꽤 번잡한 곳이었다. 구멍가게 앞으로 버스 정류장이 있었고, 많지 않은 물건이지만 마을의 필수품을 조달하는 곳이었으며, 들녘에 나가 일을 하던 마을 어르신들이 가게 안 탁자에 모여 앉아 막걸리 한 잔을 마시며 피로를 푸는 곳이었다. 안주는 김치 하나였지만 오가는 술잔 속에 마을의 이야기들이 화기애애하게 펼쳐지는 소통의 장이기도 했다. 나도 그 자리에 붙들려 막걸리를 몇 잔 얻어 마시고 얼굴이 벌게져 논으로 향했던 기억이 난다.

 

박혜진, 심우장의 <구멍가게 이야기>를 읽다가 다시 옛 추억에 젖어 들 수밖에 없었다. 잠시였지만 소중했던 과거의 기억들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듯 생생하게 다가왔다. 저자가 만난 주인공들은 내가 어머니, 할머니로 불렀던 분들이다. 구부정한 허리를 끌며 막걸리를 건네주시고 더운 여름 의자에 앉아 부채를 부치시던, 가게 앞을 지나는 마을 분과 짧은 몇 마디로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지어주시던 어머니였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구멍가게 이야기가 아니다. 구멍가게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정보보고서이자 어쩌면 사라질지 모를 삶의 한 단편을 생생히 기록한 구멍가게 자서전이다.

 

이 책의 남다른 가치는 3년여에 걸친 현장답사와 인터뷰, 기록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에는 책의 분량이 좀 많아 보였는데 책을 읽고 보니 덜어낸 부분이 많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만큼 흡입력 있게 읽혔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챕터를 여러 가지 주제로 나누어 다양한 시각에서 구멍가게를 바라보았으며, 생각지도 못한 부분까지 세밀하게 다루어 뻔한 스토리에서 더 나아가 읽는 재미와 신선함을 주었다. 구멍가게의 위치에서부터 생존 과정, 구성품들, 가게에 얽힌 다양한 사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책을 읽기 전에는 다소 딱딱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그런데 막상 읽고 보니 재미가 있었던 건 바로 그런 이유이다. 구멍가게를 찾아가는 생생한 여정을 시작으로 가게마다 지닌 사연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또한 추임새를 넣듯 아버님, 어머님의 목소리가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로 재연된다. 게다가 굳이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저자는 특정 사건이나 상품에 얽힌 과거의 역사와 기원을 찾아가 소개한다. 구멍가게의 어원에서부터 담배 변천사, 새우깡이나 초코파이 등의 출시와 당시의 상황들을 읽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한편으로는 아련함도 느껴졌다. 구멍가게가 지닌 태생적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구멍가게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던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그런데도 자식들 잘 키웠노라고 자랑스러워하시는 말씀들에 긍정의 위로를 받았다. 사실 매출은 얼마나 되었을 것이며, 365일 자리를 지키며 겪는 스트레스는 오죽했을까. 종종 싸움이 일어나면 중재도 해야 하고 조막만 한 손이 물건을 슬쩍 훔쳐 가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구멍가게는 주인장과 세월을 같이 하며 흘러왔는데 이제 그마저도 힘들다. 간판이 하나씩 내려지고 꽁꽁 닫힌 문은 열리지 않는다.

 

농촌 인구가 점점 줄어드니 당연한 현상일 테지만 아련한 추억 속의 구멍가게가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게 못내 아쉽다. 그나마 저자가 이렇게 구멍가게를 찾아다니며 기록이라도 하여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책을 읽고 난 후 지난 3월 방문했던 구멍가게의 사진을 다시 보았다. 놀랍게도 저자가 책에서 소개한 케이블드럼통 앞에서 다섯 명의 남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책과 과거의 기억들이 넘나들며 잠시나마 즐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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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해보니 나름 할 만합니다 - 40대에 시작한 전원생활, 독립서점, 가사 노동, 채식
김영우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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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뤘으면 못 왔지! 그렇다. 40대에 시작한 전원생활, 독립서점, 가사 노동, 채식. 미뤘으면 절대 가지지 못했거나 이제 겨우 시작했을 단어들. 10여 년의 세월은 김영우 작가의 삶을 많은 부분 변화시켰고 행복을 일상화시켰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은 없고 여전히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있는 나는 언감생심 꿈만 꾸고 있다. 작은 텃밭 하나에 만족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이 책은 '해보니'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어야 할 것이다. 꿈이 아닌 현실로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해보지 않고 말하기는 누구나 쉽다. 전원생활에 대한 이상을 그리지만 벌레와 추위란 현실을 모르고, 작은책방을 운영하는 일이 꽤나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당장의 손익은 헤아릴 수 없고, 가사 노동을 한다고 하면 설겆이나 청소 정도 거드는 정도로 인식할 것이며, 채식하는 일이 고기만 안 먹으면 되는 줄 알지만 일상의 음식을 마주하며 얼마나 많은 투쟁을 해야 하는지 상상할 수 없다.

 

그러니 이 책 <제가 해보니 나름 할 만합니다>(흐름출판)는 전원에서 한 10여 년 살았더니 행복합니다, 살 만 합니다라고 자화자찬하는 책이 아니다. 작가와 아내, , 그리고 강아지 하이가 오손도손 만들어 가는 소소한 일상과 행복, 시행착오를 겪으며 깨달아가는 가치관의 변화, 거창하지는 않지만 할 수 있는 일부터 변화시켜 나가는 작은 실천들에 대한 기록이다.

 

저명한 페미니즘 책이나 채식주의에 관한 책들보다 더 큰 울림을 주었던 부분은 일상에서 겪은 작가의 솔직한 심경들 때문이다. 살림을 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나름 안정적으로 살림을 하고 있던 작가에게 어느 해 명절 딸과 외출했던 아내가 집에 있는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 '미안한데 부탁이 있어'라는 말로 시작하며 빨래를 부탁했다고 한다. 작가는 계속 이 말을 떠올렸고, 그동안 자신이 살림을 한 것이 아니라 소꿉놀이를 한 것은 아닌지, 가사노동을 떠 안는다고 달라지지 않는 남성 위주의 세상에 대해 새삼 절감했다.

 

채식 또한 가능한 범위에서 실천해간다. 재미 있는 건 가족 모두가 채식을 하는 건 아니다. 작가가 살림을 도맡기 때문에 삼시 세 끼를 준비해야 하는데 아내와 딸의 적절한 영양 공급을 위해 노력하고 맛을 보지 못하는 고기 요리를 종종 내어야 하며 육식을 하지 않기 때문에 생선을 자주 먹게 되었는데 그럼 생선은 먹어도 되는지 고민하는 모습이 정겨웠다.

 

나도 세상을 쫌 살아보니 거창하게 한 번에 되는 일은 없다는 걸 알겠다. 미루고 미루다 보면 사는 대로 시간만 흘러가게 될 뿐. 조금 부족하더라도 한 발을 내디디면 계속 걸어갈 수 있다. 비록 시행착오를 겪고, 더디 가더라도 말이다. 작가는 설악면 작은 책방 '북유럽'에 매일 출근하면서 오늘도 두 권만 팔렸으면 좋겠다고 웃으며 말하지만, 나는 책방이 더 알려져 오가는 손님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책도 삶의 변화를 꿈꾸는 이들에게 많이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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