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17 - 박경리 대하소설, 5부 2권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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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한이 많아서 남 원망할 새도 없었다.
원망을 받아야 할 내가 누구를 원망하겄노.”
-393쪽-

《토지》를 필사한 지도 어느덧 17권째가 되었다. 해가 바뀌고 계절이 몇 번이나 순환하는 동안 나는 《토지》와 함께 걸어왔다.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은 마치 이 땅의 만물이 돋아나고, 시들고, 다시 흩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결국 우리의 삶과도 닮아 있었다.

이번 권에서 유독 마음에 남은 것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 조찬하는 십 년 만에 중국에서 우연히 만난 유인실에게 그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녀가 낳고 떠난 아이를 십 년 동안 사랑으로 키워왔다는 사실, 그리고 이제는 그 진실을 오가타에게도 알려야 한다는 사실을 전한다. 자신의 아이를 뒤로한 채 독립운동의 길을 선택했던 유인실. 그러나 나라를 위한 희생은 세월 속으로 흩어져 갔고, 결국 남은 것은 사랑뿐이었다.

《토지》는 나라를 잃고 떠돌아야 했던 민족이 겪는 뿌리 없는 삶의 고통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작품 속에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온전하지 못한 경우가 유난히 많다. 봉순이가 기생의 신분으로 딸을 낳고 세상을 떠난 뒤, 그 아이를 품어 키운 이는 서희였다. 아이는 훌륭한 의사가 되었지만 자신의 뿌리에 대한 혼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기생의 딸이라는 혈통은 여전히 그녀를 옭아맨다.

영광 또한 마찬가지다. 할아버지가 백정이었다는 이유로 뛰어난 재능을 지녔음에도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고 떠돌이 음악꾼의 삶을 살아간다. 그는 자신의 능력보다 조상의 신분으로 평가받는 현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법적으로는 신분 차별이 사라졌지만, 당시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벽이 남아 있었다. 양반이든 천민이든 스스로 운명을 선택하기보다 운명에 이끌려 살아가는 모습이 안타깝게 다가온다. 과연 이들의 진정한 해방은 언제 가능할까.

그럼에도 박경리는 절망 속에서도 사람을 지켜내는 힘이 사랑임을 보여준다. 양현을 정성껏 키워낸 서희, 유인실과 오가타의 아이를 십 년 동안 품어준 조찬하, 부모를 잃은 한복이를 보살펴 준 평사리 사람들, 그리고 악독한 임이네로부터 홍이를 지켜낸 월선까지. 이들은 모두 자신의 혈육이 아닌 아이들을 사랑으로 품어낸 사람들이다.

일제강점기라는 비극 속에서 공동체는 무너졌지만, 사람들은 서로를 돌보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박경리는 이러한 모습을 통해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 또한 결국 사랑과 연대에 있음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정체성을 잃고 자신의 뿌리를 찾아 헤매던 사람들은 결국 삶이라는 토지 위에 저마다의 뿌리를 내리며 살아간다.

5월의 밤은 깊어가고, 《토지》의 인물들 또한 여전히 어둠 속을 헤매고 있다. 그러나 긴 방황 끝에 그들 역시 자신만의 운명을 풀어내고 앞으로 나아가리라 믿는다.


* 이 글은 #채성모의손에잡히는독서 서평단을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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