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의 페르소나
박성준 지음 / 모던앤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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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한시. 내가 사랑하는 시간.

이 집안에 나를 제외한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잠든 시간.

한스 짐머의 인터스텔라를 무한 재생 중이다.

우주 속을 유영하듯 홀로 불을 밝힌 채.

이 시간은 나 홀로 자기연민이든 자기혐오든 맘껏 나를 유린하는 시간이다. 이 자유가, 이 외로움이 너무 맘에 든다.


나의 페르소나를 꺼냈다.

두껍고, 어렵고, 난해하고.

시인이 쓰는 시 평론집이라니.

얼마나 자기모순적인가.


어려운 수학 문제집을 끌어 안고 낑낑대며 풀다가

답지를 본다. 오답이다. 그래서 해설집을 본다.

하지만 그 해설이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 먹을 수가 없다.

이 문제에 대한 수학 공식에 대한 해설이것만, 이 해설을 이해하기 위해 또 다른 해설집이 필요한 느낌..

이 책이 딱 내게 그러했다.


마이너스 백터, 앙가주망, 헤테로토피아, 파토스, 시니시즘,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피고넨 기타 등등등...


'그래서 뭐? 뭐라는거야? 아.. 몰라도 되는거였어?'


하지만 읽다 보니, 뭔가 가슴이 간질 거리게 만들었다. 

새벽 한 시. 인터스텔라는 흐르고, 우주 속을 유영하듯, 

어려운 수학 공식 같은 철학의 용어들이, 낯선 기호들이,

굳이 그 뜻을 몰라도 내 마음에 스며들듯 그렇게 다가왔다.


'감당할 수 없는 나'는 

나를 만드는 수많은 나에게, 챕터에서는

로버트 하인라인의 단편 '너희 모든 좀비들' 영화 내용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유계영의 시를 소개한다. 내가 나이고, 나 아닌 나이고, 너도 내가 되고, 네가 나도 되고. 

버려진 나와, 억압된 나와, 취향에 맞지 않은 나는 '너는 모르고 나는 알고' 난리 부르스다. 그들은 멋대로 시적 주체가 되어 만나고 헤어지고 웃고 울고 난리가 났다. 


김소형의 시집 <'ㅅㅜㅍ'에서 만난 '나'> 

'죽지 않고 지속 되는 나'가 '죽었던 나'를 인지한다.

왜 이리도 많은 죽음을 경험하는 것인지 '이미 죽은 당신'들에게 묻는다. 그 죽음에 대해 서둘러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황유원의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 

나로부터 시작해 나로 귀결되는 나의 감흥 탐색집이라고 표현했다. 현실 속에 고립된 시적 주체와 자기도취에 빠져버린 엉뚱한 결론과 안과 밖의 공간 사유가 빈번하게 드러나는 '창밖', 몽유병을 앓고 있는 주체, 정지된 것들 속에서 가장 활달한 율동성을 발견해 내는 주체, 죽음에서부터 도약하는 분절된 몸.


자꾸만 가공된 페르소나는 끝없이 등장해서 내가 유영하고 있는 우주에서 마주친다. 그러니까 뭐라고? 무슨 말을 했지?


나는 시인을 동경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내가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것 같다. 한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그들의 화법을 재차 읽고 또 읽다보면 조금은 다가온다. 아니 다가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한걸음 또 물러난다. 아는 만큼 더 커지고, 보이는 만큼 더 무거워 진다. 그래서 시는 내게 참 어렵고 낯선 존재다. 그 시를 박성준 시인은 자신만의 언어로 해설을 했다. 그래서 이 평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박성준 시인의 언어에 대해 다시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오백십팔페이지나 할애하면서 무던히도 타인의 언어를 해설해 주고 있다. 어느새 나는 낯선 시들을 이해하기 보다는 박성준 시인의 언어를 이해하게 되었다. 


지난달 조지아에 여행을 갔다. 그곳은 구소련 국가로 대부분 사람들은 러시아어와 조지아어를 사용했다. 나는 그곳에서 여행 가이드를 해줄 친구와 동행했다. 여행 마지막 날 그 집에 초대되어 티타임을 가졌다. 90세의 증조할머니와 65세의 할머니 그리고 손자인 나의 친구가 있었다. 나는 한국어로 생각해낸 것들을 압축하고 하찮은 영어로 그에게 말했다. 그는 그것을 다시 러시아어로 통역해서 할머니들에게 전달했다. 그들은 나를 보며 웃었고, 러시아어로 말하고, 내 친구는 영어로 번역하고, 나는 한국어로 답했다. 우리는 웃었다. 분명 서로의 언어는 달랐는데, 우리는 서로에 말을 이해했다. 


시도 그러하다.

낯선 언어들로 가득찼고, 그 낯선 언어들을 통역해주는 박성준 시인의 언어가 있다. 나는 3단계를 거쳐서 다시 시를 들여다 본다. 들어본다. 씹어 삼킨다. 맛본다. 그들의 세계로 들어간다. 환영받지 못하고 튕겨져 나온다. 다른 시의 세계로 들어간다. 잠시 그들과 조우하고 다시 빠져나온다. 두 시간 동안 그렇게 헤매이다 다시 나의 우주로 돌아왔다. 여전히 헤매고 있고 정확히 이해는 못하겠지만 어느 정도의 감정선은 공유하게 되었다. 그들의 언어가 더이상 낯설지 않다. 그럼 된거 아닌가?


1977년 우주로 발사되어 240억㎞ 떨어진 태양계 밖을 비행 중인 보이저호가 외계로 전파를 보낸다. 어딘가 있을지 모를 외계인에게 초대장을 보내며 지금도 돌고 있다. 시인은 그런 존재다. 어딘가 존재할지도 모를 자신의 시를 완전히 이해해줄 타인을 찾아 나서는 보이저호다. 


가장 마지막 페이지의 문장을 읽고 덮는다.

'지금 나는 무슨 말을 더 못하고 있는 걸까. 그래, 부끄럽게도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이 글은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 서평단을 통해 모던앤북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 입니다. 


‘지금 나는 무슨 말을 더 못하고 있는 걸까. 그래, 부끄럽게도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 P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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