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아 만든 천국
심너울 지음 / 래빗홀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허구는 언제나 지극히 현실적이다.


마법과 마력이 존재하는 세계관 속, 지극히 현대적이고 현실적인 대한민국의 모습이 있다. 픽션은 그저 현실에 난입했을 뿐이며, 픽션이 존재한다 해서 세계가 아름다워지는 일은 없다.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누군가는 그것을 악용하고, 또 누군가는 마법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허구적인 것은 언제나 현실을 벗어날 수 없으며, 인간은 현실에서 허구를 쉽게 구출해 내지 못한다. 아무리 마법이 당연시되는 세계라 해도 어떤 능력과 그 능력치를 수용하는 인간 존재의 태도는 갑작스레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연작소설의 첫 번째가 왜 「허무한 매혈기」인가 했다.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에서 허삼관이 돈이 필요할 때마다 피를 팔았던 것처럼, 주인공 허무한은 돈 때문에 마력을 운용할 수 있는 근원인 역장을 팔았다. 허삼관이 그랬던 것처럼, 허무한도 역장을 팔고서 차차 건강을 잃어간다. 마법을 쓸 줄 알고, 체내의 마력을 바탕으로 물이나 나트륨 같은 원소를 창조할 수 있고, 물건을 공중에 띄우거나 순간이동을 할 수도 있다. 픽션은 우리를 훨씬 편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데 정말로, 그거 말고는 변한 것이 없다. 마법을 쓸 수 있는 세계는 오래도록 인간의 이상향이었는데, 『갈아 만든 천국』에서는 마법이 이상을 이루어 주지 못할 것임을 이야기한다. 바뀌어야 하는 것은 어떤 능력의 여부나 세계의 규칙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 그 자체라고 말한다. 


문득, 래빗홀 소설들이 관통하는 공통적인 메시지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보라 작가의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에는 온갖 외계 해양생물들과 말하는 대게 따위가 등장하지만 결국 그들 또한 지구 인간들이 만든 어떤 체계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배명훈 작가의 『화성과 나』는 미지의 세계 화성에 발을 내딛는 순간을 그리지만 동시에 전혀 뛰어나지 않은, 아주 평범한 존재들로 채워진 문명에 관해 고민한다. 『화성과 나』를 리뷰할 때도 래빗홀의 소설들이 "모두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현실과 가장 밀접하게 닿아 있다"는 감상을 썼었다. 픽션이면서도 현실이고, 현실이면서도 픽션인 소설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을 인식하고 직시해야만 비로소 온전한 허구를 생각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래빗홀'의 토끼 굴은 과연 이상한 나라로 통하는 길이 맞을까? 어찌 되었든 탐험의 시작과 끝에는 우리가 함께 사는 '현실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 그런 세계는 진득하게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선명해진다.


* 심너울 장편소설, 래빗홀 펴냄

『갈아 만든 천국』을 경유하여 리뷰


- 서평단 활동을 위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