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 그는 정말 매주 하나씩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보기 시작했다. 들어보면 거창한 일들은 아니었다. 아내와 바닷가로 여행가서 해산물 요리 먹기, 종일 바다 보기, 좋아하는 노래를 모아 자식들에게 선물하기, 손주들에게 편지 쓰기, 고향 친구들에게 밥 사주기, 예전에 싸웠던 친구에게 연락하기 같은 일상적이면서도 소소한 일들이었다. 그는 매주 병원에 올 때마다 지난주에 자신이 했던일을 소상히 늘어놓으며 즐거워했다. 진작에 이렇게 살았어야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고 사는 게 즐거워졌는데얼마 남지 않아서 몹시 아쉽다는 이야기도 했다. 나는 그가 들려주는 별것 아니지만 특별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다. - P60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환자가 현실을 직시했으면 했다. 환자의 나이가 적든 많든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일 때 남은 삶에변화가 찾아오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오랜 시간 암 환자들을 마주하면서 내가 깨달은 것이었다. 그런 변화를 지켜보면서 예정된 죽음은 어쩌면 삶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래서 어디까지나 내 욕심인 줄 알면서도 눈앞의 환자에게물었다.
"10년 더 사시면 뭘 하고 싶으세요?"
침묵이 흘렀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더 살게 된다면 해보고 싶은 일 없나요?" - P61

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삶을 얼마나 의미 있게 살아낼 것인가"라는 질문을 안고 태어난다. 일종의 숙제라면 숙제이고, 우리는 모두각자 나름의 숙제를 풀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인생의 숙제를 풀든풀지 않든, 어떻게 풀든 결국 죽는 순간 그 결과는 자신이 안아 드는 것일 테다. 기대여명을 알게 된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특별한 보너스일지도 모른다. 보통은 자기가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 채로 살다가 죽기 때문이다. - P63

문득 두려워졌다. 잘 버텨낼 거라고 믿고 지켜봐온 환자들도 순간순간 ‘차라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어서. 실제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견뎌내는 환자들이 그런 순간에 죽지 않을 살고자할 용기를 찾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걸까. 환자의 모든 순간을지켜볼 수 없는, 그 깊은 속까지 온전히 알 수 없는 의사로서 나는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S가 남기고 간 숙제가 어느 때보다 깊고 무거웠다. - P77

아무리 의학과 분자생물학을 배웠어도 이런 경우는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지않는 일이기에 고작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무슨 미련이 남아서‘ ‘저승 가는 발걸음이 안 떨어져서‘ 같은 것이다. 그게 과학의 영역에있는 사람이 할 소리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궁색해도 그렇다. 설명되지 않는 임종의 지연과 환자들의 버팀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모르겠다.
어차피 과학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라면 임종이 지연될 때 대답할 수 없는 환자에게 묻고 싶어진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무엇때문에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지 알 수만 있다면 알아내서 그 바람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고 싶은 심정이 된다. 평탄하지 않았을 삶과지난한 투병 끝에 떠나는 길만큼은 가능한 한 가볍게 떠날 수 있기를, 의사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바라게 되는 것이다. - P84

"음・・・ 선생님 제가 학교를 계속 다녀야 할까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에서 묻는 질문에는 굳이 반대 의견을 낼이유가 없다. 마음먹은 대로 하라고 독려하고 나도 같은 생각이니잘해보라는 격려가 필요할 뿐이다. 
간혹 ‘마음을 정한 상태에서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는 질문‘과 ‘정말 마음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는 질문‘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묻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이나 서로 괴로워진다. 상대방의 물음 속 숨은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J는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로 보였고 심지어 그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 P110

아버지라는 보호막 없이 홀로 선다는 것은 내게 그런 일이었다.
비가 오면 비를 맞아야 하고 눈이 오면 눈을 맞아야 한다. 남들은비 같은 것 맞지 않고 잘만 사는데 왜 나만 비를 맞아야 하느냐고불평을 늘어놓는 것조차 사치다. 생존의 문제가 걸리면 그런 것은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비를 맞으면서도 비가 그치고 나면 해야 할일들을 눈앞의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나가야 하는가, 같은 것들을 머릿속으로 곱씹어야 한다. 아버지라는 그늘 아래에 머물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던 나이에 정신 차리고 보니 순식간에 무방비 상태로 세상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내 잘못은 아니었으나 온전히 내가 견뎌내야 하는 내 몫이었다.
그 시절에 나를 놓아버리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붙들어야 했던 것은 외롭고도 힘겨운 일이었다. 몰랐으니 지나왔지만 만일 그때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작은 조언이라도 건네주는 어른이 있었다면, 그랬더라면 나는 조금이나마 덜 힘들지 않았을까? 덜 외롭지 않았을까. - P117

그래서 그럴까? 나는 종종 그조차도 책상 정리를 하듯이, 집을치우듯이 평소에 정리해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흔적들을, 나의 관계들을, 나의 많은 것들을 오늘 집을 나서면 다시는 들어오지못할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살펴야 한다고.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여기고 지금의 내 흔적이 내 마지막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덜어지르게 되고, 더 치우게 된다. 좋은 관계는 잘 가꾸게 되고 그렇지못한 관계는 조금 더 정리하기가 쉬워진다. 홀가분하게, 덜 혼란스럽게 자주 돌아보고 자주 정리하게 되는 것이다. -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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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 총리마저 성장과 경쟁, 개인의 야망을 찬양한 이래로 40년이 지났고 그러자 팬데믹과 함께 결속과 평등에대한 중요성이 다시 떠올랐다. 귀찮은 의무가 없고 권리뿐인 개인으로 사는 것이 재미있고 자극적일 수 있지만 이는순풍이 불 때만 유효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두려움과 불안감을공유할 수 있는 사람, 당신의 약점과 취약성을 존중하고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느냐다.
시장 이론은 팬데믹 동안 기능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약자는 굴복해야 한다는 것만이 단호한 시장의 법칙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혼란을 정리하는 주체는 그동안 고루하다고 평가받았던 국가와 사회 규범, 한심하다고 외면받았던 시민 단체였다. 개인의 자유를 열렬하게 신봉하던 계층조차 팬데믹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집단적 해결책이 필요 - P35

몇 년 전 달라이 라마를 만났을 때 그는 자신에게 아내와 자녀가 있었다면 영적 지도자로서의 삶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태도는 가톨릭 사제들의 순결 서약을연상시킨다. 달라이 라마의 이 말에서 나는 의외로 철학적삶의 고독함, 때로 부러움을 사기도 하는 은둔자적 삶이 가진 약점을 느꼈다. - P37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하려면 권리와 의무가 가득 찬 천밀한 관계가 필요하다. 배우자, 자녀, 부모 등 다른 사람과함께 살 때는 항상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다. 양보하고 타협해야 한다. 돌보는 사람을 우선해야 해서 출장을 취소하고출세의 야망을 줄여야 할 수도 있다. 두 가지를 모두 갖는것은 항상 가능한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버릴 필요가 없는 사람은 용서와 겸손, 감사의 능력이 온전한사람이 될 수 없다.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철학이 가진 보편적 문제점은 플라톤에서 니체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철학자 대부분이 미혼 남성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의 이론을 넘어서는 것들, 사람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사랑이라는 가느다란 실, 그 실이 끊어질 때 열리는 깊은 심연, 배신당했을 때 분출되는 비이성적인 분노, 폭풍이 가라앉은 후 사람들을 다시 연결시키는 끌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단지 부부나 연인뿐만 아니라 형제 관계, 부모와 자식 관계 혹은 그에 준하는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소크라테스는 반성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고 했지만 나는 혼자만 있는 삶 또한 불만족스럽다고 생각한다.  - P38

내가 관계에 의해 창조되며 그 관계 속에서 계속 재창조된다는 깊이 있는 식견에 이미 도달했다면, 자아실현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개인주의는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 P41

나는 그때가 우리를 세상과 연결하던 가느다란 실들이썩어 끊어질 위험이 있는, 몹시 결핍된 상황으로 보였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내 바운더리의작은 세상에서 산다. 그럼에도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거나서로 다른 종교에 대해 대화를 나누거나 식민주의라는 뒤틀린 유산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렇게넓고 큰 생각을 할 시대가 완전히 끝나버린 것 같았다. 본능적이고 실존적인 결핍에 집중하는 시대가 된 것 같았다.
세계는 예전보다 심각한 물질적 결핍에서 많이 벗어나있지만, 지금은 다른 형태의 정서적 결핍이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방해하고 있다. 새로이 등장한 정서적인 결핍은 점점 그 존재가 커질 것이다.
살면서 겪는 이런 유의 결핍은 인간에게 필연적인 것이지만 AI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연인에게 버림받은 사람은 누구나 가슴에 구멍을 지닌 채 살아야 한다. 사랑하는사람을 잃어본 사람은 그 비탄에서 결코 완전히 벗어날 수없다. - P68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소비가 아니다. 시장의 수요와 공급의 원칙은 어떤 부분에서는 유용하고 필요하지만사회를 운영하기에는 부적절하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빌리면 시장은 온갖 것들의 가격을 알지만 무형의 가치는 알지 못한다.  - P88

분명 비판의 목소리가 있을 수 있다. 다른 누군가가 결핍을 서정적으로 찬양했다면 나는 이의를 제기했을 것이다.
전 세계 인구의 상당수가 생명에 위협을 받을 정도로 심각한 물질적 결핍 속에서 살고 있다. 그들에게는 적절한 집이없고 운신할 장소도 제한적이다. 그들은 적은 돈을 받고 과중한 노동에 시달린다. 그조차 운 좋게 일자리를 얻었을 때의 이야기다.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받을 기회도 없으며 치료가 가능한 질병을 고치지 못해서 고통 받거나 때로는 목숨을 잃기도 한다. 
가난은 어떻게 보아도 아름다운 모습일수 없다. 배가 부르고 물질에 무감동해진 사람들이 결핍도 일종의 축복이라며 가난한 이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어이 없는 일이다. - P96

역사가들은 로마 제국의 쇠퇴를 떠올리며 현재 우리문명의 미래를 크게 걱정한다. 쾌락에 사로잡혀 지루하게 사는 무지한 귀족이 없을 뿐 그때와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사회학자 소스타인 베블런 Thorstein Veblen은《유한계급론 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에서 소비의 쳇바퀴에 대해 기백 넘치는 풍자를 한 바 있다. 참고로 이 책은 지금처럼 소비의 악순환이 일상화되기 100년 전에 쓰였다.
미국 중서부 시골에서 근면하고 검소하게 자란 베블런은 보이지 않는 가치는 무시한 채 자신의 성공을 공작새처럼 과시하는 신흥 소비주의 문화를 안타깝게 여겼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베블런의 사상이 다시 이야기되는것은 우연이 아니다. 물질적으로 다 가진 듯 보이지만 그것빼고는 가진 게 없는 이 사회에서, 삶에 힘을 부여하는 것은전기차보다 더 심오하고 OTT 서비스보다 더 본질적이고 쇼•핑보다 더 도전적인 그 무엇이다. 
나는 이것을 꿈 혹은 희망이라고 부르고 싶다. - P104

삶에 힘을 부여하는 것은 전기차보다 더 심오하고 ott서비스보다 더 본질적이고 쇼핑보다 더 도전적인 그 무엇이다. 나는 이것을 꿈 혹은 희망이라고 부르고 싶다.

다만 이렇게 삶에서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이 반드시 목표 지향적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도리어 자기목적적인 활동일 때가 많다. 가족과 친구, 반려동물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거나, 강렬한 음악을 듣거나, 따뜻한 여름날 오후에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런 활동으로 사람들과 혹은 자기 자신과 더 가까워질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삶을 의미로 채우기에 충분치 않다. 활동의 방향성을 부여하고 추진력을 키우는 에너지가필요하다. 보통 이야기되는 야망이 그렇다. 언젠가 달성될성취를 목표로 하는 행동은 야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사회에서 인정받는다. 야망은 주로 개인의 성취에 대한 것이지만 다행히 이런 충동은 평등한 집단의 이념과 균형을 이루거나 상쇄된다. 특히 농민 사회에서는 더 그렇다. 반대로 이런 이유로 농촌 청년들이 개인의 야망을 찾아 도시로 이주하고 있지만.
한 번쯤 세상의 중심에 서서 크든 작든 자신의 성취를인정받는 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 어려운 일을 해냈으면인정받는 것이 당연하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상황이 좋든나쁘든, 병이 들든 건강하든 수십 년 동안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처럼 말이다. 노벨상을 수상하는 것, 동네에서 가장 맛있는 빵을 굽는 것, 작년보다 더 나은 조각품을 만드는 것, 색소폰을 연주하는 것, 아름다운 장미 정원을 만들어 이웃과 즐기는 것.

비물질적인 결핍을 채우는 이런 행위는 음식이나 섹스의 결핍을 채우는 것과 비교했을 때 자각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일단 이런 비물질적인 결핍을 자각하는 순간 그것은 내 안의 갈망과 허기를 자극하고 마침내 성취를 이루고 타인의 인정을 받을 때면 온전한 정서적 포만감을 느끼게 된다. - P105

풍요로운 사회에서는 결핍 자체가 희소한 자원이 된 것처럼 보인다. 관계보다 개인을, 지속 가능성보다 성장을 중요시하는 사회에서는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는 끈, 실, 필라멘트가 얇아지고 때로는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사라진다.
결핍은 삶의 방향성과 집중도에 필요한 요소이지만, 결핍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삶에 윤활유가 되는 마찰과 저항을 야기한다는 점일 것이다. 마찰과 저항으로 인해 당신은원하든 원하지 않든 삶에 전력을 다하게 되고, 극도로 어렵지만 반드시 달성해야 할 과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러한 저항은 결국 성취로 이어진다.
희망이 없으면 저항도 있을 수 없다. 희망은 꿈에서 자란다. 이것이 꿈이 인생의 세 번째 의미인 이유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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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바바 2025-03-13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P와 카세트 테잎, CD와 mp3,4...
그리고 지금의 각종 스트리밍,
그리고 다시 엘피...

그 시대의 현재를 경험하여 들을 수 있었던
모든 때에 감사하고, 또 그립다.

알리바바 2025-03-13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핍과 갈망. liming .
풍요로움 안에서 결핍성과 희소가치를 찾는다.
결핍은 그 해소를 위해 움직인다.
 

그렇게 우리는 피관리자이자 동시에 관리자가 되어 가고 있없다.
마치 이등병 시절에 그렇게 욕하던 병장을 내가 점점 닮아가듯이. 낼름 먼저 퇴근하겠다는 후배 사원이 어느 날 탐탁지 않다.
보이고, 누군가 휴가를 길게 쓰기라도 하면 무심코 저래도 되나싶은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말로는 궁시렁거리면서도 누구보다 MDM을 신경 쓰고 누구보다 이메일을 빨리 확인하고 누구보다 늦게 퇴근하던 나는 어느새 스스로를 관리하고있었다.
이제는 회사의 일방적인 관리가 아닌, 서로가 서로를, 자신이 자신을 관리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 스스로가 자신을 경영하고 착취하는 주체가 된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노출하면서 서로를 감시하는 파놉티콘을 만든다.
-『투명사회」, 한병철 - P120

이름은 말 그대로 나를 무엇이라 ‘이를‘ 것인지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이다. 내 이름을 잊으면 훗날 돌아갈 길을 잃어버릴지도모른다. 직급이나 명함을 의탁하는 차원의 존재가 아닌, 본래의내 이름으로 설 수 있기까지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 P120

다양한 사회생활에 맞는 프로페셔널한 가면을 쓰는 것이 성공하는 인재의 핵심 자질이라고그러나 나의 복면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졌고 나는 갈수록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어느 날 문득 생각했다.
그렇게 완벽히 인격을 분리함으로써 회사에서는 인정받겠지만, 과연 훗날 나 자신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다짐했다.
외향성 이상 사회의 완벽한 히어로가 되기보다는, 불안전한세상의 평범한 나로 돌아오기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브로드웨이에서 ‘관재인 The Committee‘이라는 즉홍극이 공연된 적이 있다.
이 연극의 한 대목에서, 어느 남자가 하품을 하고 마치 잠자리에 들 준비가 된 것처럼 팔을 쭉 뻗으면서 무대 중앙에 등장한다. 그 남자는 모자를벗어서 천천히 상상의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고 나서 가발을 벗는다. 천천히 안경을 벗고 안경에 눌린 콧날을 마사지한다. 그러고 나면 코를 떼어낸다. 그리고 이를 뺀다. 마침내 미소를 풀어버리고 누워서 잠이 든다.
마침내 자신 이 된 것이다. - P1299

"너의 우선순위가 무엇이냐."
나는 잠시 대답이 망설여졌다.
과거에는 명쾌했던 그것이 이제는 흐릿하기에 아직 찾고 있는 중이라고. 그러자 그는 눈썹을 한 번 올리더니 나를 보며 알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 P174

내가 짧게나마 경험한 전략 수립은 보통 목표 설정, 시장 조사, 세부 추진안 등 크게 세 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목표 설정 단계에서는 보통, 임원의 지침으로 당사의 사업비전과 목표를 정의한다. 대개 기업의 비전이란 것은 ‘인류의 영원한 행복 추구‘, ‘소비자 가치 극대화‘와 같은 구름 위의 단어들이나 ‘글로벌 No.1 달성‘, ‘신규시장 3위권 진입‘, ‘매출 100억원목표‘와 같은 건조한 숫자들로 점철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짧은 문장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온갖 소설가와 과학자, 정치가의 역량이 집약되어야만 한다.
시장 조사 단계는 스마트폰 판매 및 매출 규모부터 산업별 고객 동향, 경쟁사 분석 등이 포함된다. 보통 전문 시장조사업체 - P178

자료를 참고하거나 구글을 검색하는데, 여러 업체의 시장 데이터가 조금씩 다를 경우가 있다. 그러면 보다 정교한 데이터를 위해 변수들을 고려하고 가정하여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분석 여행이 시작된다. 그렇게 쪼그려 앉은 사무실 구석에서 글로벌 모바일 시장의 거대한 캔버스가 완성되는 것이다.
세부 추진안 단계에서는 임원의 대략적인 가이드를 기반으로 한 ‘하향식(Top down)‘ 방식과 실무 부서장들의 인터뷰와 취합을 통한 ‘상향식(Bottom up)‘ 방식을 접목한다. 10대 추진안의 순서를 바꾸기도 하고, 10대에서 5대로 줄이는거나 문장을 바꾸는둥 지난한 퇴고의 과정을 묵묵히 견디는 완벽주의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내용을 단 한 장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한 장을 위해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의 세월을 보냈던가. 실로 전략 수립의 정수는 이 한 장을 얼마나 완벽하게 그리는 것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매일 밤 나는 단 한 장의 핵심 장표, 아니 오징어를 만들었다. - P179

일요일 밤마다 ‘일‘이란 단어는 전 인류에게 재앙이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괴로움을 벗어날 고육책을 찾아냈다. 바로일과 삶을 철저히 분리시키는 것이다.
2일을 위해 5일을 사는 삶‘
‘일년에 두 번 있는 휴가를 위해 일 년 내내 야근하는 삶이러면 우린 견딜 수 있다. 퇴근과 휴가라는 구원이 있기에비록 매우 드물지라도 그 기나긴 일이라는 괴로움도 어떻게든참아낸다.
우리는 그렇게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이 진짜 나의 삶은아니라고 선을 그으며 인생을 믿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내가 무엇을 믿지고 있는지조차 망각하는 순간이온다. 일할 땐 주말을 생각하고, 주말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때문이다. - P240

tvN의 ‘꽃보다 청춘‘을 보면 사십대가 된 세 명의 가수들이 남미로 여행을 떠난 시즌이 있다. 어느 날 그들이 저녁을 먹으며음악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옆에서 지켜보던 PD가 물었다.
"어떻게 보면 일 얘기 아닌가요?"
그때 한 가수가 대답했다. 일 얘기는 앨범 작업이나 녹음 방식같은 것이고, 음악 그 자체를 논하는 것은 일이 아니라고 그러면서 그들은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다시 음악 이야기를 이어갔는데, 난 그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 P241

‘나는 왜 이것을 하고 싶은 걸까?
하고 싶은 게 명확한 사람들이 있다. 어릴 때부터 그 목표를위해 내 안의 열정을 불사르며 스스로 타오르는 태양과 같은 사람들.
그러나 나는 달빛과 같은 사람이었다. 주위의 인정이 없다면스스로 빛날 수 없는 사람. 세상이 원하는 것을 나의 목표로 설정하며 나는 잘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던 것이다. 내가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는데,
그것을 깨닫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 P246

어쩌면 나는 이런 세상을 동경했는지도 모르겠다. 현대판 월든과 같이 본질에 집중하는 삶. (여기서 ‘본질‘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모두가 꿈처럼 생각하지만 현실은 다르다며 단념하는 책 속의 이야기.
그러나 나는 당장 무슨 거창한 가치나 새로운 이상을 추구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회사를 벗어나 자유를 누린다 해도 경제적요인을 무시할 순 없었다.
뉴욕타임즈 기자 출신인 케빈 루스는 그의 저서 「영 머니」에서,
‘돈이나 직업 안정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열정만으로 진로를 결정하는건 특권층처럼 소수만이 누리는 특권‘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저 나는 몇 년 뒤를 바라보며 실험을 하고 싶었다. 회사라는세계 밖에서도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경제적 기반을 확보할 수있을지. 헬렌 니어링처럼,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시간을 쓰는 삶을지속할 수 있을지 말이다. - P268

불안하지만 후회는 없다.
후회는 없지만 불안하다.
두 가지는 같은 말이지만 다른 말이고또한 둘 다 사실이기도 하다 - P289

1인분 인생, 우석훈, 상상너머, 2012년••4천원 인생, 안수찬 외, 한겨레출판, 2010년•Management, 피터 드러커, 이건 외 역, 21세기북스, 2008년•Work, CrimethInc., 박준호 역, 마티, 2012년•가치란 무엇인가. 짐 월리스, 박세혁 역, MP, 2011년감정노동, 엘리 러셀 혹실드, 이가람 역, 이매진, 2009년•구글은 어떻게 일하는가, 에릭 슈미트 외, 박병화 역, 김영사, 2014년•기업과 문화의 충격, 이어령, 문학사상사, 2003년.
•기업의 시대, 중국 CCTV 다큐제작팀, 허유영 역, 다산북스, 2014년• 기업의 역사, 존 미클스웨이트, 유경찬 역, 을유문화사, 2004년.
꽃들에게 희망을, 트리나 폴러스, 시공주니어, 1999년•당신은 전략가입니까, 신시아 A 몽고메리, 이현주 역, 리더북스, 2014년・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유하, 문학과지성사, 1991년•보다. 김영하, 문학동네, 2014년• 삼국지, 나관중, 이문열 평역, 민음사, 1988년• 스티브 잡스, 월터 아이작슨, 안진환 역, 민음사, 2011년• 시간, 칼 하인츠 A 가이슬러, 박계수 역, 석필, 2002년시간의 향기, 한병철, 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2013년실론섬 앞에서 부르는 노래, 파블로 네루다, 고혜선 역, 문학과지성사, 2000년·심리정치, 한병철, 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2015년 - P290

・어떻게 일할 것인가, 안냐 푀르스터 외, 장혜경 역, 북하우스, 2014년•영 머니, 케빈 루스, 이유영 역, 부키, 2015년・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오찬호, 개마고원, 2013년•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강승영 역, 이레, 1993년·이문재 산문집, 이문재, 호미, 2006년• 인연, 피천득, 샘터, 2002년• 일의 기쁨과 슬픔, 알랭 드 보통, 정영목 역, 은행나무, 2012년● 입사 후 3년, 신현만, 위즈덤하우스,2005년•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오찬호 해제, 후루이치 노리토시, 이언숙 역민음사, 2014년조직의 재발견, 우석훈, 개마고원, 2008년•조화로운 삶, 헬렌 니어링 외, 류시화 역, 보리, 2000년콰이어트, 수전 케인, 김우열 역, 알에이치코리아, 2012년•투명사회, 한병철, 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2014년•편의점 사회학, 전상인, 민음사, 2014년•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노명우 풀어씀, 사계절, 2008년・피로사회, 한병철, 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2012년•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이어령, 문학사상사, 2008년・희망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 전미영 역, 부키, 2012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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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혜림 -『음악의 쓰임』

유일하게 소진되지 않는 재료, ˝열정˝

백종원의 레미제라블 요리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보다가
눈에 띈 자막 한 줄에 떠오른 사람, ˝조혜림˝

<음악의 쓰임>이라는 책을 펴낸 작가 조혜림은
음악 콘텐츠 기획자이자 평론가이다.

뒤늦은 인스타를 접하면서 좋아하는 뮤지션들의 게시물을 보다가
점차 그녀와 그녀의 글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파이퍼]의 ‘경험자들‘로 선정이 되어
그녀의 책을 손에 받아보게 되었다.

사실 처음에는 혹시나 피상적인 글엮음이 아닐까
모종의 선입견을 가졌던 것같다.
그런데 그녀의 담백하고도 열정어린 삶의 고백들이 담긴
글을 읽어나가면서, 나도 그녀의 그간의 여정을
함께 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순수하고도, 담대하고, 사랑스럽게
‘음악‘ 하나로 자신의 길을 만들어나갈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며 나는 뮤지션들과의 에피소드들도 반가웠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성실하고도 꾸준한 열정과 용기에
감동하게 되었다.

EBS 스페이스 ‘공감‘, ‘온스테이지‘의 향연처럼,
그녀의 음악에 대한 사랑은 뮤지션과 리스너 간의
‘연대‘를 이끌어내준다.

일관되게 흐르는 그녀의 ‘음악‘을 통한 발걸음은,
‘음악의 쓰임‘이 무엇인지를 명징하게 증명해내었다.

그녀 덕분에 이 책을 통하여 김사월이라는
아티스트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고, 오늘 내내 듣고있다.

여기서 솔직히 고백하자면, 폴의 팬으로서,
그녀가 뮤지션과 모더레이터로서 그를 일터에서 만난 일화가
뜻깊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ㅎㅎ

그녀는 음악을 모른다고 하지만, 나는
그녀 또한 아티스트라는 생각이 든다.

‘삶‘ 자체를 ‘음악‘으로 이야기 해내는 그녀.

숫자가, 글자가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음악만큼 즉각적으로 영혼을 울리는 것은 드문 것 같다.

삶은 곧 사랑일진대,
사랑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음악이 빠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아티스트들의 열정이 그녀에게 힘이 되었노라고 하지만,
아마도 아티스트들도 그녀를 통하여 열정을 다시금 새기고,
새로운 그들 자신을 발견하게 해주지 않았을까.

음악에 사무치는 오늘, 그녀의 글을 읽어서 감사한 마음이다.

˝..너를 알게 된 후로 계속 나는 꿈꿨지
우리 사랑하게 되고
우리 헤어진 후에도
나의 여생을 함께할
확률이 있는 그런 사람˝
- 김사월, <확률>

@missj1227 #음악의쓰임
@piper.read #파이퍼프레스
#북리뷰_demi #북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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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페이퍼


이것은 내가 철학에서 배운 매우 유용한 사고법이다. 누군가어떤 주장을 할 때, 그 주장의 전제부터 되짚어 보는 것이다. 누군가 늑대는 집단생활과 사냥 같은 자연적 행동을 할 때만 행복하다고 주장한다면 먼저 그 전제부터 본다. 그 속에는 대부분 인간의 거만함이 표현되어 있을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는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existence precedes their essence‘고 정의한 적이 있다. 이것은 실존주의로 알려진 철학 사조의 기본 명제이다. 그는 인간 존재가 대자적 존재being-for-itself. 자신을 대상화해서 관찰하고 반성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했는데 이것은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존재가 즉자적 존재being-in-itself. 필연성에 지배받는 존재인 것과 대조를 이룬다.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지배한다. - P62

즉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선택하고 종교 · 도덕·과학 등이 정해 놓은 기존의 규칙이나 원칙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정 원칙,
도덕 또는 종교적 금언을 채택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일 뿐, 우리가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든 그것은 전적으로 각자가 지닌 자유의지의 표현이다.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자유롭도록 태어난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 철학의 이면은 인간 이외의 모든 존재가 자유롭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다른 것들, 심지어 그 어떤 생명체조차도 주어진 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늑대가 사냥을 하고 무리지어 사는 동물로 진화했다면 그렇게만 살아야 한단다. 시간이 끝없이 흘러도 늑대는 자신의 존재를 지배할 수 없단다. 늑대는 그저주어진 삶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늑대에게 그럴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깔린 전제는 ‘늑대는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다.
물론 사르트르가 인간의 자유에 대해 주장한 바가 옳은 것인지조차 명확하진 않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그 주장의 진위보다는존재의 유연성에 대한 보편화된 생각들에 가 닿는다. 왜 오로지 인간만이 수천 가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고, 다른 생명은 생물학적 유산에 속박되고 자연의 역사에 종속되어 살아야만 한다는 말인가? 이것이 인간의 오만함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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