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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발하고 싶은 여자들 - 청년여성들의 자살생각에 관한 연구
이소진 지음 / 오월의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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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 수 있다. 아니, 살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힘겹게 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자유가 있다. (...) 우리는 좀 더 자신감을 갖고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 모든 건 당신의 탓이 아니다. 당신의 탓이라고 여기는 그 모든 것 중에서 아주 조금만 당신의 몫이다.” _185-186쪽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은 청년여성의 자살 생각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범주로 확대해 바라보는 책이다. 제목만 읽었을 때는 ‘자살’에 초점을 맞추었을 거로 생각했으나, 책을 읽으면서 ‘왜’ 자살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청년여성들이 자살 생각을 하는 이유는 3가지로 수렴된다. 노동 문제, 돌봄 문제 그리고 가족. 세 가지 키워드를 좀 더 깊숙이 파고들었을 때 겹치는 지점에는 성차별이 있었다. 같은 전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남성만 정직원으로 채용되는 경우, 아픈 할머니를 6개월 동안 돌보며 가사 노동까지 도맡는 손녀, “성별화된 일터”에서 다양한 괴롭힘에 시달리는 캐디, 사무직원 등등. 책에는 드라마에서 볼 법한 실례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연구 참여자들 중 성차별 문제를 겪고 있는 대부분은 고등학교 졸업자 혹은 전문대학 졸업자였다. 이로 인해 누군가는 성차별이 아닌 참여자의 학력이나 능력이 문제라고 운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노력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한국의) 능력주의는 때때로 성차별을 수용하며, 능력만 고려한다고 할지언정 정말 ‘능력’만 보지는 않는다는 것을 책 속의 ‘대졸’ 여성들은 경험으로 증거한다. 면접을 잘 봤다고 생각했으나, 남성을 채용하길 바랐던 팀장 때문에 불합격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전해 듣게 된 경우, 남성 후배와 사수인 여성 직원의 평가 등급을 임의로 교체해 여성 직원에게 낮은 임금을 지급하고, 연봉 협상 기간이 종료되었다는 이유로 “부서 사람들 연봉 1만원 2만원 씩 떼”서 몰아주는 임시 조치로 갈음하는 경우 등등. 여성들은 예의 불합리한 상황에 체념하거나 퇴사를 택하는데, 이는 현실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현시함과 동시에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는 사회적 경고로 다가온다. 우리에게는 능력주의를 말하기 전 먼저 남성중심적인 사회의 고정된 이념을 인정하고, 이를 뒤흔들려는 움직임이 필요하지 않을까.



더하여 저자는 노동 문제 등이 야기하는 우울, 불안의 감정을 개인 내부의 문제로 삼기보다 사회적인 문제로 바라본다. 나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나, 한편으로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는 스스로를 의심했(한)다. 과거에는 결승점 앞에서 넘어질 때마다 모든 이유를 나에게서 찾았고, 지금은 나 자신이 상황을 핑계 삼고, 그 뒤에 숨어 버린 겁쟁이가 아닐까, 하는 억측과 싸우길 반복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와 타인에 대한 실망이 나에 대한 미움으로도 자주 전이됐다. ‘내가 더 노력했더라면’이라는 가정(假定)에 좀 먹히는 것이다. 나를 통제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리라는 믿음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 멀리 떨어져서 상황을 바라보는 힘이 생겼으나, 슬프게도 아직 불안을, 노력 부족을, 자기 비하를 완전히 멈추진 못하겠다. 언제 움틀지 모르는 작은 불안의 씨앗을 평생 품고 다녔으니까. 결과적으로 이 책은 나의 불안을 종식시켜 주지는 못했다. 다만 불안의 파고는 낮춰 주어, 책을 완독한 후에 꽤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21명의 전우가 생긴 기분이랄까. 21명의 청년 여성들이 풀어놓은 진솔한 이야기는 우리가 공감하는 ‘우리’의 것이 되었으니까. 혼자에서 우리로 우리에서 더 큰 우리가 되는 미래를 상상해 보고 무수하고 반짝이는 ‘우리’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싶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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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위대한 승리일 뿐
김솔 지음 / 안온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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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언제나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렇기에 처음 펼친 이야기에서 기존의 취향을 만나기도 하고, 내면에 숨어 있는 기호를 발견하기도 한다. 둘 다 아닐 수도 있지만.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혼자만의 시간. 그 귀한 시간을 줄 수 있기에 소설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몸과 마음이 무한히 밖으로 내뻗을 수 있도록 용기를 준다. 한없는 가능성의 세계라는 점에서 소설은, 문학은 그 자체로 승리인 것 같다.


『사랑의 위대한 승리일 뿐』은 작가 김솔의 독특한 상상력이 빚어 낸, 재밌는 구조가 인상적이었다. 큰 특징은 홀수 장(1, 3, 5장)과 짝수 장(2, 4, 6장)의 이야기가 다르다는 점이다. 홀수 장에는 중남미 여행담을 들려주는 대가로 맛 좋은 음식을 요구하는, ‘겟세마네’라는 수용소에서 살고 있는 ‘남자’의 이야기가, 짝수 장에는 ‘나’의 복수 이야기가 펼쳐진다. 두 이야기를 풀어놓는 두 명의 화자가 등장해 처음에는 얼떨떨했지만, 이를 눈치채고는 바로 몰입해 읽을 수 있었다.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는 경험의 반복이 좋았다. 흥미진진해 나도 모르는 새 한 칸 한 칸 문을 젖히고 소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게 된 것도. 작가는 욕구, 망각, 복수, 삶, 죄악, 증오, 사랑 등 다양한 낱말로 질문을 던진다. 질문 속에서 사유를 확장하고, 융합하는 즐거움을 바라는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는 데 필요한 것은 시간에 대한 세 가지 믿음뿐이죠. 시간은 언제 어디서나 똑같은 속도와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 시작은 없어도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 갇혀 있는 인간들은 미세한 흐름을 결코 감지할 수 없다는 것. _15쪽


어떤 자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습관적으로 타인을 죽이지요. 그리고 어떤 자는 타인을 살리려고 습관적으로 자신을 죽이기도 한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한 인간을 완전히 죽이거나 살려낼 순 없는데,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이미 반쯤 죽은 채로 살아 있기 때문이죠. _22쪽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솔직하게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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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도 거기 있어
임솔아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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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학동네』에서 연재되었던 임솔아의 장편 『나는 지금도 거기 있어』의 정식 출간 전, 티저북 서평단으로서 2장 ‘관찰의 끝’을 읽어 보게 되었다.



선미는 옥상에서 불을 피우고 싶다고 했다. 화목난로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 우주는 화목난로를 만들지 않았다. 완제품을 구입하는 것도 반대했다. 높은 건물에 있는 창문들이 옥상을 내려다볼 것만 같았다. 화목난로를 사용하는 것이 불법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원주택이 아닌 다세대주택 옥상에 화목난로가 있는 것을 사람들은 처음 볼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이상한 일이 해선 안 되는 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일 것이다. 우주는 초등학생 때부터 그것을 배워왔다. _80-81쪽(이하 티저북 기준)


‘우주’는 어릴 적부터 사물을 관찰하고 원리를 탐구하는 일을 좋아했다. “궁리할 만한 요소를 일부러 제거해놓은” 듯한 인형 놀이를 주로 하는 여자아이들보다 탐구력을 요하는 팽이치기를 하는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우주가 아홉 살이던 어느 날, 반 아이들은 “머리핀”으로 만든 탱크를 학교에 가져간 우주에게 “호모”라는 별명을 붙인다. 그날 이후 우주는 자신의 본모습을 감춘 채 여자아이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메모하며 여자다움을 학습한다. 사회의 렌즈에서 비주류로 분류되는 자신을 철저히 숨기는 게 지쳐갈 즈음 우주는 ‘선미’와 가까워지며 사랑의 감정을 싹틔우게 된다. 그러나 이 감정에는 차츰 균열이 생긴다.



“내일이 전시 오픈이거든.” (...) “같이 전시하는 사람들한테 소개하고 싶어.” 우주가 말했다. 그동안 선미와 우주가 함께 만난 타인은 선미의 남자친구들뿐이었다. “애인이라고 말하고 싶어.” 선미는 우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애인?” 이상하다는 듯 선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네 애인이 아니잖아.” “아니라고?” “아니지.” 선미는 정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뭔데?” 선미가 손끝으로 미간을 긁적였다. “없어. 우리를 가리키는 단어는.” 선미는 웃었다. 이내 웃음을 거두고 리플릿을 두 번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시간이 된다면 오프닝 행사에 참석하겠다고 말했다. _84-85쪽


우주는 선미를 좋아한다. 선미도 우주를 좋아한다. 그러나 우주와 선미의 마음은 미묘하지만 확실하게 다르다. 선미는 “남성으로 태어난” 존재를 갈망한다. 선미가 원하는 사랑(의 대상)의 총합에는 생물학적 남성이 반드시 포함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선미가 우주에게 “네가 남자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한탄하는 대목에서 그 마음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우주와 “애인” 사이는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면서도 우주와 한 침대를 쓰고, 스킨십도 마다치 않는 선미의 태도는 언뜻 모순적이고 불가해하게 느껴진다.



선미가 고시원에서 지내던 때였다. 그때만 해도 선미는 집밖에서도 스스럼없이 우주의 몸을 향해 손을 뻗었다. (...) 우주는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뭐 어떠냐며 선미는 웃었지만, 우주는 손사래를 쳤다. 한번은 인적이 없는 주택가 골목에서 선미와 키스를 했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이층 창문에서 한 여자가 창밖으로 상체를 내민 채 선미와 우주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주는 선미의 손목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 “아무도 안 쫓아와.” 선미가 말했다. 우주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길가에 쪼그려 앉았다. 눈앞이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무서워?” 선미가 물었다. “무서워.” 우주가 답했다. 선미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윽고 입꼬리가 휘어졌고, 눈빛이 무덤덤하게 바뀌었다. “무섭구나.” 선미가 중얼거렸다. _75-76쪽


아홉 살 때 들은 ‘호모’라는 단어는 낙인이 되어 우주의 가슴속에서 떨어지지 않는 듯하다. 우주는 낙인당한 자신의 본체를 공개하는 데에 두려움을 느끼고, 타인의 시선을 극도로 의식한다. 반면 타인을 개의치 않는 선미의 태도는 우주와 전면적으로 대조를 띄는데, 선미는 참고 있는 듯하다. 우주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타인 앞에서 우주를 만지고 드러내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꾹꾹 누른다. 속상하고 답답하지만, 우주와 함께 있기 위해, 우주를 지켜 주기 위해서.



우주는 수플레 팬케이크를 천천히 음미했다. 낯선 사람과 음식을 먹는 것이 편안했다. 그 까닭을 생각하다가 우주는 이 자리의 사람들이 음식을 먹는 방식이 제각각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 그 누구도 남이 먹는 방식을 주시하지 않았다. 같이 앉아 있으면서도 혼자 먹는 것처럼 그랬다. _62쪽


헤어질 때마다 우주는 사람들을 따라 걸었다. 걷다보면 매번 누군가 무엇인가를 더 보고 싶다고 말했다. 골목을 더 돌아보고 싶다거나, 멀리 삐죽이 솟아 있는 나무를 보러 가고 싶다거나, 나무를 보러 갔을 때에는 정말 나무만 봤다. 물을 보러 갔을 때에도 물만 봤다. 나무가 정말 크다거나, 강이 이제 녹을 것 같지 않냐거나 하는 대화를 했다. 서로 떨어진 자리에서 혼잣말을 하듯 그들은 말을 이었다. (...) 미래에 대해서라면 이제 얼마든지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우주는 깨달았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어갈 것인지. 우선 옆돌기부터 마스터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과 함께 광장에 갈 것이다. 광장 한복판에서 옆돌기를 할 것이다. 이 사람들은 놀라거나 박수를 치거나 눈썹을 찡그리지 않을 것이다. 나무나 물을 볼 때처럼. 옆돌기를 옆돌기로 볼 것이다. _93-94쪽


시간을 견디며 지었던 집으로 미술 공모전에 당선된 우주는 그룹 전시 후에도 성현, 보라, 정수와 지속적으로 만난다. 우주는 먼 듯 가까운 듯 한 편안한 거리감이 주는 느슨한 관계에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각자만의 방식으로 팬케이크 먹는 법, 부당한 대우를 하는 사람에게 항의하고, 타인을 위해 싸우는 법을 배우며 자신의 마음을 새로이 돌아본다. 남 얘기 하며 친목 쌓기 좋은 타이밍에 서로의 눈앞에 있는 것, 함께 공유하는 장소만으로도 이야기가 이어지고, 서로를 향한 안온하고 적당한 배려가 있는 관계. 그 관계 속에서 우주는 기뻤고, 자유로웠고, 자신이 되었다. 단지 함께 서 있어 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타인이 옆에 머물기만 해도 마음의 빈 공간이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말이다. 지지한다는 것. “곁에 서 있”겠다는 진실된 마음은 한 사람이 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인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생활이 안정되어갈수록 우주는 무엇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평생을 고시원에서 살아가게 될까봐 선미가 두려워했듯, 우주도 이대로 평생을 살아가게 될까봐 두려웠다. 남자를 좇는 선미의 뒤에 평생 서 있을 우주. 내 마음 같지 않은 애인이나 꿈과 상관없는 직업을 택한 나. 이보다 보통의 이야기가 또 어디에 있을까. 보통이라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지 우주는 이제 잘 알았다. _82쪽


우주는 선미를 축으로써 움직인다. 그는 선미의 요구에 맞춰 재수를 했고, 선미가 원하는 직장에 입사했다. 공간에 욕구가 있는 “우주의 꿈”은 “선미를 위한 집을 만드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우주는 “우주가 없어”야 “선미를 위한 집”이 완성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모른 체”한다. 우주의 집은 회사 생활, 선미를 기다리는 시간을 견딜 때마다 만든 미니어처 집뿐이다. 마침내 우주는 본인의 시선이 투영된, 선미 없는 ‘선미의 집’을 만듦으로써 별렸던 관계에 마침표를 찍고, 선미는 그에 담담히 응한다. 기실 알고 보면, 선미와 우주는 서로를 기다려 준 듯싶다. 상대가 결정의 준비를 마쳤을 때 이별이라는 “결실”을 함께 맺기 위해. 둘은 끝내, 무사히, “기어이 같이,” 평온한 “축복”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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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게리 - 건축을 넘어서 현대 예술의 거장
폴 골드버거 지음, 강경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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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프랭크 게리의 유년시절부터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생애사적 면뿐 아니라 건축가로서의 업적을 두루 살폈다.

캐나다에서 성장한 프랭크 게리는 유년시절 부엌에서 할머니 리아와 목재 조각을 갖고 노는 것을 좋아했고, 문화생활을 중시한 어머니 텔마의 교육 아래 음악 행사, 미술관, 박물관 등에 자주 다녔다. 이때의 촉각적, 시각적, 청각적 자극은 그 안의 예술적 씨앗을 싹틔웠다. 불안정한 사업으로 출렁대는 마음을 소유한 아버지 어빙과는 돈독하지는 않았지만, 부자는 “함께 그림을 그리거나 뭔가를 만드는 일을 즐겼다”(59쪽). 10대 시절에는 독서, 과학, 만들기, 그림 그리기, 비행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왕성한 호기심을 보였다.

게리가 18세가 되던 해 어빙의 건강 악화로 가족들은 LA로 이주한다. 게리는 USC 대학에서 도예 수업 수강 중 교수 루켄스의 건축 공부 제안으로 건축학과로 편입 후 건축가가 되기로 마음을 굳힌다. LA에서 자유분방한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그의 세계는 더욱 확장된다.

건축가의 길로 들어선 게리는 자신이 맡았던 혹은 맡지 못했던 프로젝트들 사이에서 크고 작은 고뇌와 갈등을 맞닥뜨리고, 오해도 받는다. “부업으로 시작한(308쪽)” 이지 에지 가구의 인기에 가구 디자이너로 방향을 틀게 될 두려움에 처하기도 하고, 자기 복제를 요구하는 설계를 의뢰 받거나,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하려는 클라이언트를 만나기도 한다.

오로지 ‘건축가’로서 도약하고자 하는 열망은 프랭크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는 “건축물의 기능적 필요를 충족하는 과정에서 미학적 경험을”(678쪽) 더한 자신의 욕구가 담긴 건축물을 설계했고, 그중 하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프리츠커상을 받았을 뿐 아니라 디즈니 콘서트홀, 파리의 루이뷔통 재단 건물 등 유수의 건물을 설계하며 대체할 수 없는 ‘프랭크 게리다움’을 선보였다.

이 책에 등장하는, 게리와 인연이 닿은 부동산업자, 사업가, 예술가, 건축가, 비평가, 박물관 큐레이터 등 무수한 인물들은 그가 독단적이고 이기적이지 않으며, 클라이언트와의 소통을 중요시했던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그가 건축에 진심이었고, 일에 몰두했다는 것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건축을 넘어 내밀한 이야기까지 아우르는 이 책은 프랭크 게리의 삶의 총체다. 건축가와 인간 프랭크 게리의 경계의 모호함 덕에 우리는 그를 훨씬 자세하고 촘촘하게 탐구할 수 있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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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놀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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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간된 소설이라는 소식에 설렜던 미궁. 이 책은 끝까지 미궁이다. 마지막 인형을 찾을 수 없는 마트료시카 같다. 또는 미로 속을 탐험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과연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 책은 추리소설 하면 떠오르는, 사건의 실마리를 짠! 하고 찾는, 맺고 끊음이 분명한 소설은 아니다. 찾았지만 진짜인지 자꾸 의심하게 된다. 살인 사건에 포인트를 두기보다 시건에 얽혀있는 인물의 심리와 상황 등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어두운 인간의 내면을 다루고 있는데 다 읽고 책을 덮으면 조금 찝찝한 기분이 남는다. 살인사건을 곁들인(?) 기이한 등장인물들이 궁금하다면 읽어보시길

 

다산북스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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