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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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서술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삶은 이야기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세계는 붕괴하려는 경향이 있고 그와 더불어 내 삶의 서사도 붕괴하기 일쑤다. 그때 주체는 무너지는 삶의 서사를 필사적으로 복구해야만 한다. 이런 시도는 김연수가 창조한 인물들이 세계의 붕괴 이후 절박하게 보여주는 전형적인 행동 패턴이다.-p304

 

이름만으로 시작도 하기 전에 왠지 끌리는 작가가 둘 있었다. 그것은 김훈과 김연수였다. 그리하여 집에도 몇 권의 김연수 작가의 책이 있다. 하지만 그냥 무심코 덤볐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가볍게 대한 나의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너무나 몽상적이고 쉽지 않은 책 읽기를 하며 끝까지 읽지 못하고 다시 책꽂이에 넣어놓았다. 그것은 생각보다 무거웠고 만만히 볼 작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번 신간을 봤을 때 김연수니까, 사인도 해준다기에 예약주문을 했다. 내 이름은 없었지만 그래도 글씨가 참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으로 '단편은 싫다'라는 편견이 있었다. 지금껏 맘에 드는 단편을 만나지 못한 점도 있고 도무지 그 짧게 압축해놓은 내용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아내지 못한 적이 많고 이야기가 너무 짧아 빈약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름만 보고 주문한 이 책은 9개의 이야기가 들어있으니 시작부터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렵다고 느껴지는 작가라면 에세이나 단편으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김훈도 에세이로 시작했으니 김연수는 단편으로 좀 알아가 보자는 마음으로.

 

먼저 말하자면 단편에 대한 나의 편견도 없애줬고 이 작가의 글에 대해 조금 친밀감을 느꼈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스르르 빠지는 글이 아닌 뿌리 깊은 든든한 나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쩜 앞, 뒤, 옆 다른 매력을 가진 글이라니. 처음 읽을 때도 좋고 두 번 읽어도 새로운 글이었다. 이제 서야 이 작가의 내공과 인기에 공감할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서 인간의 본능에 대해 많은 부분을 들을 수 있었다. 감추며 잊으며 살아가도 불연 듯 툭 하고 터져 나오는 잊을 수가 없는 일들에 대한 그리움, 후회, 속죄 등 다양한 감정들이 담겨져 있었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야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최소한 세 번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먼저 ‘세계’라는 이야기에 대해, 그리고 ‘나’라는 이야기에 대해, 결국에는 ‘우리’라는 이야기에 대해.-p314

 

전체적으로 슬픈 느낌이 묻어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한 없이 슬프고 절망적이면 책을 다 읽고 나면 그 찝찝한 여운이 남아 있는 적이 있어 별로 좋지 않은 기분이 남아있기도 하는데 이 책에는 그 슬픔 뒤에 희망이 남아있는 그런 느낌이 들어서 다행이었다. 작가가 왠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쩜 표현해 내는 부분이 끝이 없을까? 묘사도 다양하고 느낌도 비슷한 듯 달랐다. 정말 많이 읽고 사물에 관심도 많고 작가로서 필요한 감수성까지 모두 가진 듯 보였다.

 

나는 우리가 걸어가는 길을 바라봤다. 호수 건너편, 메타세쿼이아가 서 있는 세계의 끝까지 갔다가 거기서 더 가지 못하고 시인과 여자 친구는 다시 그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무척 행복했고, 또 무척 슬펐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그 거리에 그들의 사랑은 영원히 남게 됐다. 다시 수만 년이 흐르고, 빙하기를 지나면서 여러 나무들이 멸절하는 동안에도, 어쩌면 한 그루의 나무는 살아남을지도 모르고, 그 나무는 한 연인의 사랑을 기억하는 나무일지도 모른다.-p87

 

2009.09.botongsa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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