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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 ㅣ 반달 그림책
오세나 지음 / 반달(킨더랜드) / 2018년 4월
평점 :
이 그림책은 숨은 뜻이 있는 그림책으로 보입니다.
물론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저는 이 그림책 속에서 어떠한 메시지를 발견하고 나니 매우 참신하게 느껴지며 재미있었습니다.
처음에 이 그림책을 읽은 후에는 '뭐지?'라는 반응이 나왔습니다.
스토리라인도 알 수 없고 메시지도 알 수 없고 이해되는 부분이 단 한 가지도 없어서 당황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금까지 읽어본 그림책 중에 저를 가장 당혹스럽게 한 그림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매우 이상하고 엉망진창인 그림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몇 번을 읽으며 발견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상호작용 양식 중 부정적인 측면이었습니다.
이 그림책의 등장인물은 연필과 지우개만이 아닙니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독자까지 포함됩니다.
그림책에는 글씨를 쓰고 지우며 언쟁하는 듯 보이는 장면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연속되어 등장합니다.
싸우는 주체는 연필과 지우개로 보이고, 중반부터는 지우개가 두 동강 나면서 등장인물의 수가 한 명 더 늘어나게 됩니다.
글씨를 쓰고 여러 번 지우다보면 지우개가 반토막 날 때가 종종 있는데, 그러한 경험이 떠올라 순간적으로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무엇 때문에 시작된 언쟁인지 독자는 알지 못한 채 연필과 지우개들이 끝까지 싸우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그리고 결국 종이가 찢어지게 되는데, 마지막 장을 넘기면 찢어진 종이의 뒷면이 등장하고 연필이 찢어진 구멍 사이로 빠져나와 다시 무언가를 쓰기 시작합니다. 싸움은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는 암시를 주며 그림책은 마무리됩니다.
독자는 이 언쟁을 바라보면서 어떠한 생각을 하게 될까요?
제3자인 독자 눈에는 각자가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는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소통의 관계라고 볼 수 있을까요?
공유되는 기준 없이 이루어지는 대화 속에 맥락이나 메시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는 가치관이 공유된 사회라면 언쟁은 끝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져다 준 긍정적인 변화와 함께 극단적인 상대주의로 인한 혼란스러움도 찾아왔습니다.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부분을 수용한다는 의미일텐데,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시대가 되어버리지는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다양성 존중이라는 명분 하에 자신의 권리만을 내세운다면 그림책에서 보여지는 모습으로 결국 치닫게 되지 않을까요?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고 외치는 시대에서의 소통 양식은 결국 이 그림책에서 보여주는 모습으로 흘러가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제3자로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독자의 갑갑한 마음은 자신의 의견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소통의 장 앞에서 겪게 되는 우리 모두의 마음은 아닐까요?
만약 제3자가 진리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면 어떠한 기분이 들까요?
짧고 심플한 그림책, 심지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던 그림책 속에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할 거리가 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