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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책에 관련된 여러 잡담들을 기록하려 한다. 크게는 내가 무슨 책을 어디서 샀는지, 어떤 동기로 책을 사게 되었는지, 책을 구입하면서 알게된 사실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또 특정 책을 구입하게 된 계기로 구입하고 싶은 또 다른 책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에 대해 정리할 것이다. 

그냥, 무언가라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읽기만 하고, 쓰지 않으면, 무언가 남겨놓지 않으면, 결국 무엇이라도 남아있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이다. 책을 읽고 책의 내용에 관해 정리를 하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능력과 노력이 부족해 이렇게 책에 관한 잡담이라도 남겨야 할 것 같다.  
 

오늘 3권의 책을 구입했다. 로버트 O. 팩스턴의 <파시즘: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이하 <파시즘>)과 마크 마조어의 <발칸의 역사>, 마지막으로 박홍규의 <누가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었다 하는가>이다. 교내에서 주요 사회과학 출판사들이 할인 행사를 하길래, 또 책 욕심을 내게 되었다. 

 <파시즘>이란 책을 알게 된 계기는 김진석의 <기우뚱한 균형>을 읽으면서 였다. '민주주의, 우파 근본주의와 좌파 근본주의 사이로'란 챕터에서 김진석은 우파 근본주의와 좌파 근본주의 모두 밎주우의를 "타락 혹은 변질이라는 이름으로, 비판하고 비난(167쪽)"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든 필자들이 공병호와 임지현이다. 자유주의자들과 민주주의와의 긴장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터라 그다지 새로운 것은 없었지만(유독 재벌문제에 대해서는 관대한 자유주의자로서의 일관성도 지키지 않고 있다는 사실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임지현의 이른바 '일상적 파시즘'론에 대한 비판은 흥미로웠다. 임지현에 대한 김진석의 비판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임지현이 독재와 파시즘이 '대중의 자발적 동원'에 의해 가능했다는 사실을 너무 강조하려다 보니, 파시즘을 하나의 역사적 현상이 아닌 "본질적 실체"로 규정(177쪽)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이것의 함의와 관련해 결국 임지현은 '대중의 자발적 참여와 동의'라는 메커니즘의 역사성은 무시한채, 은근히 "대중민주주의 자체의 위험을 끊임없이 환기하는 악의적 역할을 하고 있다"(180쪽)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가 임지현의 논리에 대한 반박의 근거로 인용하고 있는 책이 팩스턴의 <파시즘>이었다. 성공회대 조효제 교수가 쓴 머리글을 잠시 보니, 그 역시 '일상적 파시즘'이나 '대중 독재'논의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일상적 파시즘'이나 '대중 독재'등의 논의가 왜 파시즘의 이해를 명료하게 해주기보다는 오히려 흐리게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중략) 파시즘을 정확한 기술적 용어로 쓰지 않고 일종의 유행어로 남발하는 것은 파시즘을 예방하기보다는 오히려 파시즘의 독성에 무감각해질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14쪽)
사실 '대중의 자발적 동의'에 대한 문제는 나에게도 흥미로우면서도 어려운 주제인데, 팩스턴은 파시즘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한편 김진석과 조효제의 주장을 평가하기 위해선 임지현의 글들 또한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으로 구입한 책은 마크 마조어의 <발칸의 역사>이다. 이 책은 책의 내용이나 주제보다는 순전히 저자를 보고 구입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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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생활백서 - 2006 제30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민음사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성실하게 그것을 준비해 경쟁에서 이기는 것.
이것이 오늘날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서 목표란 사회가 인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른바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소수이다.
경쟁에서 진 나머지 사람들은 실망하고, 체념하며, 때론 소리없이 반항한다.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대게 불행한 듯 보인다.

애써 자신만의 가치에 의미를 부여하려 해도, 왠만한 확신이 없는 한 그렇게 살기란 무척 피곤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위에서 불쌍하고, 한심하게 볼 것이므로..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가 싫어서, 혹은 그 가치에 자신을 맞출 능력이 되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능력이 안되는 자신을 합리화하다보니 그 가치를 싫어하게 된것인지, 그 가치가 싫어서 특별히 그런 능력을 갖출 노력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인지(그럴경우 주로 책으로 도피하는 경우가 많다) 선후관계가 애매하긴 하다.  

아마 이 둘은 엉켜있을 것이다.   

요즘들어 "꼭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하나?"란 생각이 자주든다.

그러다 보니 사회에서 낙오자들이라고 평가받는 뭔가 흐리멍텅한,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흥미가 간다. 

처음 이 책에 흥미를 느끼게 된건, 책 이야기가 소설의 주된 소재였기 때문이었다. 책에 대한 막연한 욕심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서두는 흥미로웠다.  

"오래전 나는 쇼핑몰에 있는 카트를 끌고 서점의 책들을 쓸어 담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덤벙덤벙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담는 것은 곤란하다. (....) 그러나 끝내는 재빠르게, 한 시간 남짓 카트 하나를 책으로 가득 채워 계산을 하고 차 트렁크를 책으로 꽈악 채우고서 예정된 곳으로 떠나는 일을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다" (9쪽). 

한번쯤은 그런 장면을 꿈꿔본 적이
있었기에.   

학부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는 것 또한 흥미로웠고, 같은 전공의 대학원을 다녔다는 사실 또한 흥미롭다. 비록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책'들 중에 사회과학서라고 할만한 책은 거의 없지만. 

책만 읽고 사는 것. 이것이 (용인될 수 있는) 목표가 될 수 있을까?  
뭐 돈만 있다면야.  

경계너머 20대의 한 감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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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1월 김연수의 장편소설을 읽었다. 김연수 작가의 책을 읽은것은 처음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전까진 작가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다. 따라서 이 책을 고른데에는 몇가지 사소한 계기가 있었다. <창작과비평>에서 백낙청이 언급한, 최근 주목하고 있는 젊은 작가에 김연수란 이름이 있었고, 며칠 간격으로 로쟈란 아이디로 알라딘에서 서평을 올리는 이가 쓴 ‘11월에 읽을만한 책’에서 김연수의 이 소설이 들어있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한겨레 21> 에서 드문드문 실리는 시읽어주는 남자라는 코너에서 김연수의 책이 언급된 것을 봤기 때문이다. 이 코너에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 신형철이란 평론가임을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최근 <몰락의 에티카>란 평론집을 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사실 나만 모르고 있었지 김연수는 나름 유명한 작가였다. 지금에서야 깨닫게 되는 거지만, 그 만큼 여러 매체에 노출이 되고 있는(더불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이기도 한 셈이기 때문이다(책을 읽고나서, 그의 이름을 의식하게 된 후, 신문, 잡지, 인터넷에서 그의 이름을 더욱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팬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  

   이 책의 해제를 쓴 역사학자 한홍구의 말을 빌리자면, 이 책은 "1930년대 초반 동만주의 항일유격근거지에서 벌어진 ‘민생단 사건’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이 사건을 주제로 박사학위논문을 썼다고 하는 한홍구의 해제를 나름대로 정리하면 민생단 사건은 당시 복잡했던 항일세력내 전선들[크게는 공산주의 노선 내 민족주의 노선(조선공산주의운동)과 공산주의 노선(중국공산주의 및 국제공산주의운동)] 간의 세력다툼이 빚어낸 일종의 마녀사냥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혁명조직 내에서 서로가 서로를 의심해서 죽고 죽인 숫자가 최소 500여명이었다고 하는 이 사건은 한홍구의 말처럼 그 "역사적 맥락은 매우 특수한 것이었지만," 그 속에 나타난 인간본성의 보편성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소재라고 생각한다. 나또한 이처럼 어떤 특수하고도 절박한 상황에서 오히려 인간의 본성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 같은 소재를 택했으며,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심지어 지난날 한국을 독립시키겠다는 일념으로 함께 만주로 떠난 친구들끼리 서로 총을 쏘기도 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그게 내 최초의 의문이었다."  

   작가뿐만 아니라 실은 나도 궁금하다. 어쨋든 작가는 위의 의문에 답하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이 의문에 답할 수 없어 소설의 초고(특히 결론을)를 몇번이나 고치고, 출간을 미뤘다고 한다.

   하지만 어쨋든 소설은 책으로 출판되었고, 이에 대한 작가의 설명이 이어진다. 출판하지 못했던 소설을 출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란 작품을 쓰면서 자신의 이십대를 이해할 수 있었기에. 둘째는 2008년 저자가 나갔던 촛불시위 현장에서 전경들 앞에서 춤을 추던 학생들을 보고 무엇가를 느꼈기 때문에.

   지금으로썬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을 읽어보지 못해서 뭐라 말하기는 힘들지만 작가는 <네가얼마나 외롭든>에서 자신이 20대에 느꼈던 의문으로 돌아갔다고 말한다.  "왜 우리가 간절히 열망하는데도 이 세계는 조금도 바뀌지 않는가? 그런게 우리가 사는 세계라면 우리는 마땅히 현실에 순응하고 권력에 복종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더 이상 뭔가를 간절히 열망하면 안 되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이 책을 출판하게 된 첫번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데 실마리가 되어줄 위의 의문에 대한 작가의 답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쩌면 열망은 그 열망이 이뤄지는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리라. 열망으로 이뤄지는 일은 하나도 없다. 열망은 결코 원인이 아니다. 열망은 그 자체로 결과이리라. 열망은 단지 열망하는 그 순간에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뿐이다." 솔직히 말해 무슨 선문답 같다. 실은 작가 스스로도 자문하고는 있다. "과연 이것이 해답이 될 수 있을까?" 난 해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질문에 성실하게 답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첫번째 사연에 수긍하지 못하게 되니 이 소설의 근본질문에 대한 작가의 해명도 설득력이 없다고 느껴진다.

   이런 의문은 두번째 사연, 즉 촛불시위에서 목격한 춤추는 젊은이들에 대한 얘기에서 더욱 깊어진다. 시위현장에서 대중가요에 맞쳐 춤을 추는 이들을 보고 그는 많은 사람들의 열망과는 관계없이 어쨌든 우리는 어제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고, 바로 그 새로운 세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반드시 복수해야 하지 않아도, 당장 정의가 이뤄지지 않아도 그것이 어제와 다른 새로운 세계라면 좋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소설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모르겠다. 왜 반드시 복수하지 않아도, 정의가 이뤄지지 않아도 그것이 어제와 다른 새로운 세계라면 좋은지, 또 시위현장에서 춤을 추는 학생들이 왜 새로운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지. 그는 질문을 던졌지만, 나는 그것을 그의 소설속에서도, 또 그의 말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왜 독립을 위해 만주로 갔던 이들이 서로 죽여야만 했는가? 왜 간절히 열망해도 세상을 변하지 않은가?

   그의 소설을 통해 내가 이해한 대로 답하자면 이들이 서로 죽여야만 했던 이유는 소설 속 인물 이정희를 둘러싼 연정 때문이며, 간절히 열망해도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소설로만 보자면 우리가 열망하던, 그렇지 않던 어쨋든 세상은 변한다는 것이다.  

   결국 소설의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려는 노력보다는, 그럼으로써 한홍구가 지적했듯이 인간본성의 근원을 찾으려고 애쓰기 보다는, 마치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소회하는 것으로 긴장과 갈등의 끈을 너무도 쉽게 놓아버렸다는 생각에, 또 그것을 설득력 있게 해명하려고 하기 보다는 선명하지 못한 말로(어쨋든이란 말로) 초월해 버렸다는 생각에 맘이 불편하다. 질문을 던져놓고 한참을 고민하는 것 같더니 결국엔 ‘음, 나는 나름대로 이제 해결한거 같아.’하고 말아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그렇기 때문에 그가 소설의 배경으로 택한 ‘민생단 사건’은 단지 말 그대로 소설 속 이야기가 진행되는 하나의 배경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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