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코스키가 간다 - 제2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한재호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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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접하게 된 건 한겨레 신문에 실린 <'세른살 소년'을 만드는 사회- 체념도 구원도 없다>란 제목의 소개글이었다. 이 글을 읽고 책을 읽어봐야 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책 소개를 보고 왠지 이 소설에서 많은 부분을 공감하게 되지 않을까란 기대감이 생겼다. 작가의 나이도 나와 비슷했고, 또 나의 처지도 어쩌면 백수와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평범한 백수의 삶 속에서 주인공이 무언가 의미심장한 말을 해주기를 바랬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가 어떤 깨달음을 얻고 멋지게 성장하는 모습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합격의 지난한 과정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합격수기'들 처럼 잠깐의 방황의 시기가 이후의 깨달음을 더욱 극적으로 만드는 그런 모습을 그려주기를 바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긴 결정적인 이유는 '의미없음'에 있었다.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이 아니라, 부여된 의미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소설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기대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의미를 부여받는 것에 익숙해서인지 소설속에 나타나는 일견 '무의미해보이는 사건들과 행동들'의 나열이 다소 지루함을 느끼게 한 것도 사실이다. 또 주인공의 주변환경은 친숙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보여주고 있는 체념에선, 당연히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던 불안감은 없고 오히려 너무도 담담해서, 그가 낯설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기존의 질서와 의미를 거부했을(혹은 기존의 길서와 의미에서 거부당했을 때)때 생기기 마련인 불안감이 주인공에겐 그다지 커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이런 불안감을 '미행'이란 행위를 통해 극복하고자 하려고 한 것 같다. 미행을 통해 기존의 의미체계와는 다른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한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행'이란 행위도 그다지 의미있어 보이지 않는다.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미행을 통해 '부코스키'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미행이란 행위자체에 있는 것 같다. 나만의 행위로써. (그런 점에서 꼭 그것은 미행이 아니라도 상관없어 보인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미행이란 행위가 과연 나만의 것인지에 대해서도 작가는 의문을 던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그를 미행하고 있을 수도 있고, 급기야는 나 자신도 미행을 당하고 있으니.     

이런 주인공의 행위가 어떤 사람에게는 한심해 보였나보다. <주간동아>에 실린 서평에서 한기호(한국 출판마케팅연구소장)란 사람은, "‘사회를 기웃거리는 강아지’처럼 행동할 뿐 힘겨운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는 전혀 읽을 수 없다"는 소설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소설은 제2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이다. 심사위원들은 “언뜻 별로 의미 없어 보이는 지루한 사건을 미묘한 반복과 변주로 차근차근 쌓아나간다. 거듭되는 미행 속에서 일상적 공간으로서의 다층적인 면모가 드러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익명의 주민들 간의 건조한 관계가 풍부한 암시로써 새롭게 조명된다. 초월과 구원의 가능성이 봉쇄된 요지부동의 현실에 섣불리 분노하거나 쉽게 체념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승인하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전유해내는 능력은 이 작품만의 미덕”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 현실이 피눈물의 의미를 깨친 자의 현실이 아니라 그저 벤츠 타고 지나가며 한순간 스쳐 지나간 장면을 무미건조하게 그려낸 현실에 불과한 것으로 비쳐졌다. (중략) 적어도 한 방울의 땀이라도 제대로 흘려봐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 젊은이들을 생존투쟁의 현실로 내모는 위기는 자본주의 자체가 지닌 시스템의 위기다. 승자독식의 경쟁사회로 몰아넣은 결과 개인의 삶이 처절하게 피폐해질 수밖에 없음이 만천하에 증명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럴 때일수록 어설픈 백수들의 이야기가 아닌 젊은이들의 고투과정을 핍진하게 그리는 소설이 늘어나야 마땅할 것이다."

사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는 알겠다. 어려울 때일수록 그 어려움을 치열하게 극복하려는 모습을 그려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 스스로 말하지 않았는가? 오늘날 젊은이들을 "생존투쟁의 현실로 내모는 위기는 자본주의 자체가 지닌 시스템의 위기"라고. 그런데 엉뚱하게 왜 치열하지 못함을 탓하고 있는가? 정 그렇게 꾸짖고 싶었다면 오늘날 젊은이들의 위기는 그들이 치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전제하고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닌가? 충고를 하려면 좀 솔직하게 할 것이지. 

어쨋든 이 소설의 작가는 '의미를 달라'고 재촉(혹은 은연중에 기대)하는 독자들에게 '네가 기대하는 의미란 게 도대체 뭔대?'라고 묻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흥미진진한 소설은 아니지만, 다음 작품이 나오면 또 보게는 될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작가라면 이후 작품을 어떻게 써야할지 조금은 막막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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