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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용 (반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김일이라는 프로레슬러가 있었다. 7,80년대 배고프고 암울했던 시절 그의 박치기 하나면 모든 걸 잊을 수 있었다. 일본의 반칙왕 이노키와의 대전이 있는 날이면 온 나라가 들썩였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인가 프로레슬링이 짜여진 각본에 의한 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사람들이 눈치챘다. 시나리오만 있을 뿐 상대를 그로기에 빠지게 했던 박치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프로레슬링은 급속도로 외면당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프로레슬러라는 직업은 밥벌이가 걱정스러울 지경이 됐다. 그렇지만 미국은 다르다. WWE를 위시하여 대형 프로모션들이 프로레슬링의 황금시장을 구가하고 있다. 과장되고 트릭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아이들이나 어른들 너나없이 프로레슬링을 즐기고 있다.
각설하고, <파피용>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건 프로레슬링이다. 그것도 7,80년대의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김일의 레슬링이 아니라 지금 미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프로레슬링이다. 짜고하는 걸 알고 있는 관객을 계속 붙들어두기 위해서 프로레슬링은 갈수록 화려해지고 파격적이 돼 간다. 그야말로 이것저것 총 망라된 버라이어티다. <파피용>도 그렇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관점에 따라 책에 대한 평가도 극명하게 다르지 싶다. 스토리 전개와 치밀한 구성에 중점을 두느냐 아니면 기발한 상상력에 중점을 두느냐로 볼 때, 전자에 중점을 둔 독자라면 베르나르 베르베르 전작에 비하여 엄청 실망할 것이고, 후자에 중점을 둔 독자라면 새로운 시도에 대해 만족할 만한 점수를 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에 비토를 걸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렇지만 그 상상력을 뒷받침하는 구성이 너무 작위적이고 허술하다는 건 분명하다. 물경, 34킬로미터에 달하는 우주선에 대륙만한 넓이의 날개를 달고 우주를 항해하는 우주선이 <파피용>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는 더 이상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탐욕과 과소비, 끊임없는 전쟁은 태초의 인간과는 너무 큰 괴리감이 보인다. 이대로 있다가는 인간의 생명체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새로운 지구를 찾기 위한 <마지막 희망>이라는 프로젝트를 수립한다. 우역곡절 끝에 선택된 14만 4천 명의 사람들을 태운 파피용 호는 1,200년 동안 우주를 떠돌며 새로운 지구를 찾아 나선다.
작가는 지구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특히 지구를 지탱하고 있는 인간들에 대해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언젠가 이 책장을 뒤적이고 이 글을 읽는 눈들이 있을 것이다. 난 그들이 이것만은 꼭 알아주었으면 한다. 우리가 뿌리를 둔 행성에서 떠나온 것은 그곳에 더 이상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희망은 탈출이며 인간종의 미래가 우주의 다른 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321쪽 인용) , 창세기 하느님은 타락한 사람들을 홍수로 심판했다. ‘노아의 방주’에 탔던 생물을 제외하고는 모든 생물이 전멸시켰다. 베르베르도 제2의 창세기를 그리고 있다. 인간에 대한 전망 없음은 무시하고라도, 인간 모두를 없애버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치명적인 시도가 어색하기만 하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또옙스키는 노름빚을 갚기 위해 지겹게 글을 썼다. 아폴리네르는 생활고를 타개하기 위해 호색소설 <돈주앙>을 썼다. 요즘 베르나르 베르베르에게도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노아의 방주'와 '창세기'를 섞어 급조하여 1,200년 동안 항해해도 괜찮은 <파피용>호를 창조해 낸 것까지는 참아주더라도, 그렇게 찾아간 새로운 지구에서의 인간의 행동과 생각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작가 베르베르여! 거리낌없이 휘두르는 조물주 같은 상상력보다는 치밀하게 고민한 <개미>의 진정성이 많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