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열정으로서의 사랑Liebe als Passion>
옮긴이 후기
1.
외국어로 된 책을 우리말로 옮길 때 옮긴이가 제대로 옮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 말고 더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어려운 책의 내용을 더 쉽게 요약하는 것은 각각의 독자가 해야 할 고투인 이해의 과정을 대신해버리는 일일 테다. 적어도 하나의 책을 완독하고자 마음먹은 독자라면 옮긴이 후기에서 책의 내용에 대한 쉬운 해설을 기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열정으로서의 사랑>처럼 제목이 풍기는 이미지와 그 실내용에 상당한 거리가 있고, 더구나 낯선 용어들로 가득한 책을 옮기면서 독자에게 열심히 읽어보라고만 말하는 것도 무책임한 일일 테다. 그래서 옮긴이는 제대로 옮기기 위한 노력 외에도 세 가지 일을 추가로 했다.
첫째, 옮긴이 주를 다는 일이다. 이를 통해 루만이 설명하지 않고 전제로 하고 있는 개념들, 하지만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개념들을 따라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했다. 복잡한 논리로 인해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들에 대해서도 일부 옮긴이 주를 달긴 했지만, 대부분은 루만의 독특한 용어들 설명 및 그 번역어 선택과 관련된 것이다. 그래서 옮긴이 주는 초반부에 집중되어 있다.
둘째, 이 책이 도대체 어떤 분과학문에 속하며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일이다. ‘열정으로서의 사랑’이라는 제목과 ‘친밀성의 코드화’라는 부제만 보면 이 책을 감정 이론이나 연애 지침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어권에서 출판된 루만의 저서들 중 이 책이 가장 많이 팔린 데는 이런 유치한 착각까지는 아니더라도 거대 사회학자 루만이 쓴 가벼운 에세이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이 분명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옮긴이는 이 책에 대해 무엇을 기대해도 좋은지 알려줄 의무가 있다.
셋째, 이 책 자체를 이해하는 것과는 어느 정도 구별되는 것으로서 이 책이 서 있는 맥락에 대한 이해를 조금 높여주는 일이다. 하나는 루만의 사회적 체계 이론에 있어 이 책의 위상을 밝혀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책이 사랑, 가족, 섹슈얼리티 등과 관련된 사회학 논의에 미친 영향을 짚어보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상세히 다루는 것은 너무 많은 지면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여기서는 참고자료들을 소개하면서 간단하게 다룰 것이다.
따라서 옮긴이 후기에서는 둘째와 셋째를 추가한 후 이 책의 번역 과정과 관련해 독자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것들을 쓰는 것으로 마무리하겠다.
2.
이 책이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는지 그리고 독자가 이 책에 대해 무엇을 기대해도 좋은지 알려주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은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독자들이 기대할 만한 것들 중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첫째, 이 책은 사랑에 관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간접적인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결코 연애 지침서가 아니다. 이 책은 사랑이 얼마나 비개연적인(있을 법하지 않은) 일인지 그리고 익명적 관계들을 주로 재생산하는 현대 사회의 구조와 사랑하는 자들의 친밀관계가 어떻게 서로를 보완하면서 얽혀 있는지를 밝힐 뿐 아니라, 17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는 수많은 문헌들을 통해 다양한 사랑하기의 방식들을 보여준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의 사랑뿐 아니라 자기가 맺고 있는 여러 관계들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성찰을 통해 독자들이 더 행복한 사랑을 할 수 있게끔 도와주려는 의향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참된 사랑은 이런 것이라고 알려주거나 사랑을 잘 하려면 이렇게 하라고 알려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 책은 사랑의 레퍼토리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 사랑을 문제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높임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비개연적인 사랑의 비개연성을 더 높일지도 모른다.
둘째, 이 책은 사랑이 어떻게 가족과 결합되었는지를 다루기는 하지만 가족사회학이 아니다. 루만은 혼외 관계에서만 가능했던 열정적 사랑이 결혼이라는 제도와 결부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야 일어난 우연적 결합일 뿐이라고 본다. 그래서 이 책은 낭만적 사랑의 한 계기로서 현대적 결혼과 가족을 다룰 뿐 가족의 역사를 다루는 연구도 아니고 가족이라는 사회적 체계에 대한 연구도 아니다.
셋째, 이 책은 사랑이 섹슈얼리티라는 기반을 갖는다고 보지만 성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도 아니고 섹슈얼리티나 에로티시즘의 사회학도 아니다. 루만은 사랑을 감정 상태나 신체적 변화가 아닌 소통매체라고 본다. 물론 이 소통매체는 인간 신체와 공생하는 매체, 즉 섹슈얼리티를 상징하는 매체라는 점에서 우정과 구별된다. 하지만 성관계가 곧 사랑을 뜻하지 않듯이, 소통매체와 그 공생 메커니즘이 동일시될 수는 없다. 따라서 이 책에서 섹슈얼리티는 사랑에 끌어들여지기는 하지만 사랑을 촉진할 수도 교란할 수도 있는 긴장 관계라는 측면에서 다루어진다.
넷째, 이 책은 ‘이상화’에서 ‘역설화’를 거쳐 ‘문제화’로 사랑의 형식이 변해왔다는 점 그리고 시대별 특징으로 보자면 이상적 사랑, 열정적 사랑, 낭만적 사랑, 서로 이해하는 문제로서의 사랑 등으로 사랑의 양상이 변해왔다는 점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사랑을 시대순으로 고찰하는 역사학이 아니다. 금방 말한 사랑의 순서는 하나가 사라지고 다른 하나가 등장하는 시대 전환과 같은 것이 아니다. 어떤 이상도 없는 열정과 역설은 없으며, 시간적 한계를 갖는 열정과 그 역설을 이상적으로 펼치면서 문제를 외면할 때 낭만이 가능하며, 이상의 좌절과 열정의 시간적 한계가 드러날 때 문제가 된다. 이 형식들 모두가 오늘날의 사랑에도 혼합되어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와중에 독자가 자신의 사랑이 17세기 버전과 비슷함을 느낀다 하더라도 그리 주눅 들 필요는 없다. 각 장의 순서도 시대순으로 배치된 것이 아니다. 1장에서 4장까지 전반적인 내용과 연구 방법론을 다룬 후, 5장부터 12장까지는 현대적 사랑의 전형이었던 낭만적 사랑(연애, 결혼, 섹슈얼리티의 통일)으로 모이게 되는 성분들을 분석하고 있다. 13장 이후에는 낭만적 사랑이 문제로 되면서 이 성분들이 다시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17~19세기 문헌들을 다루지만 이는 지나간 ‘근세’로서의 modern을 탐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금도 끊임없이 유동하고 있는 현재의 ‘현대’로서의 modern과 관련된 이질적인 성분들을 밝히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 책은 ‘사랑의 역사’가 아니라 ‘현대적 사랑에 대한 역사 사회학적 해명’이다.
다섯째, 이 책은 현대 사회에서 사랑이 결국 익명적이지 않은 인격적․개인적 관계인 친밀관계로 자리 잡았다고 보지만 친밀성을 중심 주제로 다루는 사회학은 아니다. 루만은 열정으로서의 사랑이 개인화가 본격화되기 이전에 생겨났고 개인화 없이는 친밀관계가 다른 사회적 관계들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하지 못한다고 본다. 물론 열정적 사랑이 이러한 자율성 획득의 기폭제가 되긴 하지만 말이다. 따라서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책은 친밀관계의 성립 및 코드화 과정을 다루고 있는 것이지 친밀관계 자체를 주제로 다루는 것은 아니다.
여섯째, 이 책은 열정으로서의 사랑을 현대적 사랑(사랑을 위한 사랑)의 성립을 위한 중요한 계기라고 보지만 이런 사랑이 오늘날 가능한 사랑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루만에 의하면 능동이면서도 동시에 수동이라는 역설을 담고 있는 열정(passion)은 현대적 사랑의 전형이 되었던 낭만적 사랑의 한 계기일 뿐이며, 20세기 후반에 들어 이런 사랑이 문제화되면서 더 이상 본래의 과격한 성격을 유지하지 못한다. 심지어 루만은 문제들과 대안들을 논하는 15장에서 열정적 사랑이 일종의 이행기 의미론에 불과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런 의미에서 열정적 사랑보다는 낭만적 사랑의 성립 과정 및 그 해체 과정에 대한 진단이 이 책의 중심 주제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책 제목이 ‘낭만적 사랑’이 아니라 ‘열정으로서의 사랑’이 된 것은 아마도 열정적 사랑이야말로 사랑이 역설이라는 점을 투명하게 드러낸 의미론이라는 점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사회적 관계들과 뚜렷이 구별되도록 만든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무엇이 아니라고만 말했는데, 만약 독자들이 이 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사랑의 사회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족 사회학도, 섹슈얼리티 사회학도, 친밀성의 사회학도 아닌 ‘사랑’이라는 사회적 관계가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독립분화되어왔으며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기술하는 사회학 이론이다. 그리고 심리적인 것도, 신체적인 것도 아닌 사회적인 연구 대상으로서 사랑을 다루기 위해 루만은 이 책에서 ‘사랑이라는 사회적 체계에 관한 이론’, ‘사랑이라는 소통매체에 관한 이론’, ‘사랑의 진화에 관한 이론’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그가 사회학의 모든 연구 대상을 체계이론, 소통이론, 진화이론의 세 가지 이론 맥락에서 각각 다루고 이를 서로 연결시켜보고자 기획했던 것과도 연결된다. 그렇다면 이제 그 이미지로만 보면 도무지 사랑 같은 것을 주제로 다룰 수 없을 듯한 ‘체계이론가’가 왜 사랑을 이토록 치열하게 탐구했는지 살펴볼 차례이다.
3.
사회학의 일반 이론부터 경제, 학문, 법, 예술, 정치, 종교, 교육 등 현대 사회의 여러 기능체계들에 관한 이론들까지 다룬 거대 사회학자 루만이 사랑을 주제로 한 책도 썼다는 말에 대한 반응은 대개 ‘그 사람도 그렇게 가벼운 글을 썼어?’라는 식이다. 이 책을 몇 줄만 읽어보면 알겠지만 루만은 사랑을 결코 가볍게 다루고 있지 않으며, 이 책이 그의 광범위한 이론적 관심을 자랑하기 위한 장식품도 아니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주제는 그가 거대이론의 야망에 시동과 재시동을 걸 때 가장 먼저 다룬 주제이다.
<열정으로서의 사랑>은 1982년에 출간되었지만 이미 1968년에 그가 대학 강단에서 행한 첫 세미나의 주제였다. 1969년 빌레펠트 대학교의 세미나를 위한 원고는 2008년 독일에서 <사랑-하나의 습작Liebe-Eine Übung>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1968년에 착수해 1982년에 완성했다는 점은 그의 학문적 일대기에 비추어보면 매우 의미심장하다. 처음 사회학 교수가 되어 ‘제목: 사회이론, 기간: 30년, 비용: 0’이라는 프로젝트를 대학에 제출한 시점(<사회의 사회>의 서문 참조) 그리고 루만 체계이론의 새로운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자기지시적․자기생산적 체계이론으로 전환하던 시점에 가장 먼저 택한 주제가 사랑이었던 것이다.
경제도 법도 정치도 아닌 사랑에서 시작한 이유를 루만이 직접 밝히 적은 없는 듯하다. 다만 옮긴이는 두 가지 추측을 해본다. 첫째, 다루기에 가장 까다롭게 보이는 작은 규모의 상호작용 체계를 다룸으로써 자신이 연마해나가던 새로운 개념틀의 적합성을 시험해보고자 했던 것 같다. 둘째, 익명적 관계가 지배적인 현대 사회에서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전인격적 친밀관계가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엄청나게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현대 사회를 설명하는 중요한 실마리로 간주했던 것 같다.
어쨌거나 <열정으로서의 사랑>을 완성한 직후 루만은 모든 사회적 관계들을 다룰 수 있는 일반 이론의 기본 개요를 집필하기 시작해 1984년에 <사회적 체계들Soziale Systeme>이라는 첫번째 주저를 내놓았다. 그리고 그 이후 앞서 언급한 여러 기능체계들을 연구한 단행본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1997년에는 자신의 사회이론을 집대성한 두번째 주저 <사회의 사회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를 출간했고, 이듬해 혈액암으로 사망한다. 루만의 생애와 그의 체계이론이 변천해온 과정에서 대해서는 옮긴이가 번역한 게오르그 크네어/아민 낫세이, <니클라스 루만으로의 초대>(갈무리, 2008)를 참조하기 바란다. 하버마스와의 비교를 통해 루만 체계이론에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쓴 논문인 「루만(N. Luhmann)과 하버마스(J. Habermas)의 대립구도에 관한 하나의 이해」(<진보평론> 2009 여름)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루만의 체계이론과 그 사회이론을 더 상세하게 소개한 옮긴이의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보완해 조만간 책으로 출간할 계획이다.
<열정으로서의 사랑>은 <사회적 체계들> 이전에 나왔다. 그래서 더 완성된 루만의 개념틀에 비추어보면 이 책에는 다소 불명확한 용어 사용이 많다. ‘소통’,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소통매체’, ‘상호침투’ 등의 주요 개념들이 그리 뚜렷하게 정식화되어 있지 않고, 이로 인해 독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옮긴이는 옮긴이 주를 통해 이를 보완했다). 완성기 저작들에서는 정치의 코드를 통치/피통치(혹은 통치/반대)로 보지만 이 책에서는 진보/보수로 파악하는 등 혼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부분도 많다. 그럼에도 이런 약점을 충분히 상쇄할 만큼 이 책은 이행기 저작으로서의 매력을 갖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 상태를 전달하기 쉬운 일상 언어와 루만 특유의 탈인본주의적․추상적 개념들을 혼합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루만의 저서들에 비해 독자들이 루만 이론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그의 개념들이 그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경험들로부터 도출된 추상이라는 점을 느끼게 해준다. 옮긴이가 추측컨대 만약 루만이 1990년대에 이 책을 다시 썼다면 이처럼 - 어려우면서도 - 매력적인 글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열정으로서의 사랑>은 사랑, 섹슈얼리티, 가족 등을 주제로 한 사회학의 여러 논의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상적 사랑, 열정적 사랑, 낭만적 사랑 등의 시기 구별법뿐 아니라 낭만적 사랑을 이루는 여러 계기들에 대한 분석과 그에 함축되어 있는 남성중심성에 대한 지적 그리고 낭만적 사랑 이후 사랑이 어떻게 문제가 되어버렸는지에 대한 통찰 등등이 그러하다.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의 <현대 사회의 성, 사랑 그리고 에로티시즘>(새물결, 2001), 울리히 벡(Ulrich Beck)과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Elizabeth Beck-Gernsheim)의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새물결, 1999), 크리스티안 슐트(Christian Schuldt)의 <낭만적이고 전략적인 사랑의 코드>(푸른숲, 2008)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에는 오히려 먼저 번역된 이 책들과 비교해 보면, 우선 루만은 오늘날 사랑이 처한 문제를 지금 제기되고 있는 구체적인 문제 상황을 통해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의미론이 변천해온 과정을 통해 그리고 그 속에 함축되어 있는 사랑이라는 코드 자체가 벗어날 수 없는 역설을 통해 다룬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20세기 후반의 변화에 많은 분량을 할당하고 있는 데 반해 루만은 오히려 현대적 사랑의 성립 시기인 17~18세기의 문헌들을 연구하는 데 더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루만은 기든스의 ‘수렴적(congruent) 사랑’이나 슐트의 ‘낭만적이고 전략적인 사랑’과 같은 희망적인 대안을 제시하려 하지 않는다. “비정상적인 것일 뿐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비개연성”인 사랑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더 치밀하게 드러내고자 할 뿐이다. 이런 면에서도 <열정으로서의 사랑>은 사랑에 대한 지침이 아니라 사랑을 문제 삼고 다루어나가는 법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사회학적 기술(記述)이다.
4.
번역 용어 선택과 관련해 주요한 것들은 본문에 처음 나오는 곳에 옮긴이 주를 달아 설명해놓았다. 또한 찾아보기에 독일어 단어를 병기해 이를 통해 전체 용어에 대한 독한 대조가 가능하도록 했다. 여기서는 추가로 두 가지만 밝히겠다.
첫째는 Intimität(영어로는 intimacy)의 번역어로 ‘친밀성’을 택한 이유이다. 이 단어를 ‘내밀성’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기 때문이다. intim이 그 어원상 내적인 것을 뜻하므로 내밀성이 적합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intimacy는 현대의 용법에서 그저 내밀한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런 내밀한 것을 소통하는 관계를 뜻한다. 그런 관계를 우리말로 표현할 때 ‘내밀관계’보다는 ‘친밀관계’가 더 적합하다고 본다. 또한 한자어 ‘친(親)’은 ‘친히’, ‘친필’ 등의 표현에 남아있듯이 본래 ‘자기 자신’을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현대로 올수록 친한 ‘관계’를 뜻하는 말이 된 것이기 때문에 intim의 쓰임새 변화와 비슷한 변화 과정을 겪어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옮긴이는 ‘친밀성’, ‘친밀관계’, ‘친밀소통’ 등의 표현을 선택했다.
둘째는 Person(영어로는 person)과 Individuum(영어로는 individual)을 ‘개인’으로 번역하지 않고 ‘인격’과 ‘개체’로 구별해 번역했으며, 이 두 단어의 형용사 및 그 명사형도 ‘인격적’, ‘인성’, ‘개체적’, ‘개체성’ 등으로 구별해 번역했다. ‘가면’을 뜻하는 라틴어 persona에서 나온 person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개인을 뜻하는 말로 주로 쓰이는 반면, ‘나누어질 수 없다’는 뜻에서 나온 individual은 개인의 영혼이나 의식만을 뜻하다가 점차 몸이나 사회적 존재도 뜻할 수 있는 말로 바뀌었다. 특히 루만은 Person을 의식도 몸도 아닌 소통의 주소지, 즉 사회적 체계들에서의 행위 귀속 지점을 뜻하는 전문용어로 사용하기 때문에 더더욱 individual 계통의 단어와 구별해 번역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 책에서 특별히 개념적인 방식으로 쓰이지 않을 때는 원만한 독서를 위해 가끔 ‘개인’이라는 표현을 썼다. 즉 개인을 person으로 보건 individual로 보건 별 문제가 없을 때 그렇게 했다.
이 책은 오랜 시간 동안 여러 명의 옮긴이들에 의해 작업되어왔다. 먼저 번역을 맡은 분들은 영어판을 많이 참조했는데 영어판 자체가 너무 오역이 많아서 원저인 독어판을 참조한 전면 교정 작업이 이루어졌다. 재번역에 가까운 교정 작업을 하면서 이 글을 쓴 옮긴이가 번역 대본으로 삼은 것은 1982년에 처음 나온 독일어판을 주어캄프(Suhrkamp) 출판사가 그대로 1994년에 문고판으로 낸 Liebe als Passion - Zur Codierung von Intimität, suhrkamp taschenbuch wissenschaft 1124권이다. 하지만 루만의 각주에 등장하는 문헌의 상당수는 프랑스와 영미권에서 나온 책들이라서 영어판의 표기 방식을 따랐다. 그리고 루만이 1985년에 직접 쓴 영어판 서문을 독일어 용어들과의 조응관계를 충분히 고려해 함께 실었다. 사회적 체계들 이후에 쓴 영어판 서문은 독어판 서문보다 명료하게 이 책의 이론적 위상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이 이 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영어판 서문의 출처는 Love as Passion - The Codification of Intimacy,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6이다.
루만은 이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수많은 프랑스어, 영어, 라틴어 등의 문헌들을 독일어로 번역해놓지 않았다. 독일 독자들을 매우 곤란하게 만들었겠지만 수백 년 전에 쓰인 원문이 풍기는 향취를 손상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한국어판에서도 반복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독일어 이외의 언어로 된 문장들과 용어들은 병기해놓았다. 이 글을 쓰는 옮긴이는 독일어 이외의 언어를 번역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들 문장의 번역은 앞선 옮긴이들의 작업을 받아들였다. 다만 새물결출판사 편집부가 독일어로부터 새로 번역된 용어들을 감안해 다시 손보는 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어색한 곳은 별로 없으리라 믿는다.
여러 명의 작업을 거친 것이긴 하지만 독일어에서 번역한 문장들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오역이나 어색한 문장에 대한 모든 책임은 최종 번역자인 이 글을 쓰는 옮긴이에게 귀속된다는 점을 밝혀둔다. 그리고 여러 번의 교정 과정을 통해서도 여전히 미흡한 곳이 남아 있겠지만 적어도 영어판보다는 더 나은 한국어판을 만들어냈다고는 장담할 수 있다.
이미 오래전에 출간을 예고하고도 까다로운 루만 전공자의 방해(?)로 전면 교정의 결단을 내려주신 새물결 출판사의 열정에 감사드린다. 또한 교정에 대한 모든 권한을 위임해준 다른 옮긴이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내용 요약에 대한 기대를 충족하는 대신 옮긴이의 독후 감상을 아주 짧게 밝히면서 불친절한 옮긴이의 말을 마무리하겠다. 이 책을 읽으며 유신시대에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왜 금지곡이었는지를 그리고 그 곡이 해금된 후 과연 사랑은 쉬워졌는가를 생각해보길 바라면서.
누구나 할 수는 없었던 사랑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이
이루어진 후
다시 문제가 되어버린 사랑
자유, 평등, 정의, 인권, 법치, 민주 등
우리의 현대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2009년 7월에 쓰고 9월에 고쳐 씀, 정성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