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열정으로서의 사랑Liebe als Passion>

옮긴이 후기

1.

외국어로 된 책을 우리말로 옮길 때 옮긴이가 제대로 옮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 말고 더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어려운 책의 내용을 더 쉽게 요약하는 것은 각각의 독자가 해야 할 고투인 이해의 과정을 대신해버리는 일일 테다. 적어도 하나의 책을 완독하고자 마음먹은 독자라면 옮긴이 후기에서 책의 내용에 대한 쉬운 해설을 기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열정으로서의 사랑>처럼 제목이 풍기는 이미지와 그 실내용에 상당한 거리가 있고, 더구나 낯선 용어들로 가득한 책을 옮기면서 독자에게 열심히 읽어보라고만 말하는 것도 무책임한 일일 테다. 그래서 옮긴이는 제대로 옮기기 위한 노력 외에도 세 가지 일을 추가로 했다.

첫째, 옮긴이 주를 다는 일이다. 이를 통해 루만이 설명하지 않고 전제로 하고 있는 개념들, 하지만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개념들을 따라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했다. 복잡한 논리로 인해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들에 대해서도 일부 옮긴이 주를 달긴 했지만, 대부분은 루만의 독특한 용어들 설명 및 그 번역어 선택과 관련된 것이다. 그래서 옮긴이 주는 초반부에 집중되어 있다.

둘째, 이 책이 도대체 어떤 분과학문에 속하며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일이다. ‘열정으로서의 사랑’이라는 제목과 ‘친밀성의 코드화’라는 부제만 보면 이 책을 감정 이론이나 연애 지침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어권에서 출판된 루만의 저서들 중 이 책이 가장 많이 팔린 데는 이런 유치한 착각까지는 아니더라도 거대 사회학자 루만이 쓴 가벼운 에세이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이 분명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옮긴이는 이 책에 대해 무엇을 기대해도 좋은지 알려줄 의무가 있다. 

 

셋째, 이 책 자체를 이해하는 것과는 어느 정도 구별되는 것으로서 이 책이 서 있는 맥락에 대한 이해를 조금 높여주는 일이다. 하나는 루만의 사회적 체계 이론에 있어 이 책의 위상을 밝혀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책이 사랑, 가족, 섹슈얼리티 등과 관련된 사회학 논의에 미친 영향을 짚어보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상세히 다루는 것은 너무 많은 지면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여기서는 참고자료들을 소개하면서 간단하게 다룰 것이다.

따라서 옮긴이 후기에서는 둘째와 셋째를 추가한 후 이 책의 번역 과정과 관련해 독자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것들을 쓰는 것으로 마무리하겠다.

 

2.

이 책이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는지 그리고 독자가 이 책에 대해 무엇을 기대해도 좋은지 알려주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은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독자들이 기대할 만한 것들 중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첫째, 이 책은 사랑에 관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간접적인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결코 연애 지침서가 아니다. 이 책은 사랑이 얼마나 비개연적인(있을 법하지 않은) 일인지 그리고 익명적 관계들을 주로 재생산하는 현대 사회의 구조와 사랑하는 자들의 친밀관계가 어떻게 서로를 보완하면서 얽혀 있는지를 밝힐 뿐 아니라, 17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는 수많은 문헌들을 통해 다양한 사랑하기의 방식들을 보여준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의 사랑뿐 아니라 자기가 맺고 있는 여러 관계들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성찰을 통해 독자들이 더 행복한 사랑을 할 수 있게끔 도와주려는 의향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참된 사랑은 이런 것이라고 알려주거나 사랑을 잘 하려면 이렇게 하라고 알려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 책은 사랑의 레퍼토리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 사랑을 문제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높임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비개연적인 사랑의 비개연성을 더 높일지도 모른다.

둘째, 이 책은 사랑이 어떻게 가족과 결합되었는지를 다루기는 하지만 가족사회학이 아니다. 루만은 혼외 관계에서만 가능했던 열정적 사랑이 결혼이라는 제도와 결부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야 일어난 우연적 결합일 뿐이라고 본다. 그래서 이 책은 낭만적 사랑의 한 계기로서 현대적 결혼과 가족을 다룰 뿐 가족의 역사를 다루는 연구도 아니고 가족이라는 사회적 체계에 대한 연구도 아니다.

셋째, 이 책은 사랑이 섹슈얼리티라는 기반을 갖는다고 보지만 성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도 아니고 섹슈얼리티나 에로티시즘의 사회학도 아니다. 루만은 사랑을 감정 상태나 신체적 변화가 아닌 소통매체라고 본다. 물론 이 소통매체는 인간 신체와 공생하는 매체, 즉 섹슈얼리티를 상징하는 매체라는 점에서 우정과 구별된다. 하지만 성관계가 곧 사랑을 뜻하지 않듯이, 소통매체와 그 공생 메커니즘이 동일시될 수는 없다. 따라서 이 책에서 섹슈얼리티는 사랑에 끌어들여지기는 하지만 사랑을 촉진할 수도 교란할 수도 있는 긴장 관계라는 측면에서 다루어진다. 
 

넷째, 이 책은 ‘이상화’에서 ‘역설화’를 거쳐 ‘문제화’로 사랑의 형식이 변해왔다는 점 그리고 시대별 특징으로 보자면 이상적 사랑, 열정적 사랑, 낭만적 사랑, 서로 이해하는 문제로서의 사랑 등으로 사랑의 양상이 변해왔다는 점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사랑을 시대순으로 고찰하는 역사학이 아니다. 금방 말한 사랑의 순서는 하나가 사라지고 다른 하나가 등장하는 시대 전환과 같은 것이 아니다. 어떤 이상도 없는 열정과 역설은 없으며, 시간적 한계를 갖는 열정과 그 역설을 이상적으로 펼치면서 문제를 외면할 때 낭만이 가능하며, 이상의 좌절과 열정의 시간적 한계가 드러날 때 문제가 된다. 이 형식들 모두가 오늘날의 사랑에도 혼합되어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와중에 독자가 자신의 사랑이 17세기 버전과 비슷함을 느낀다 하더라도 그리 주눅 들 필요는 없다. 각 장의 순서도 시대순으로 배치된 것이 아니다. 1장에서 4장까지 전반적인 내용과 연구 방법론을 다룬 후, 5장부터 12장까지는 현대적 사랑의 전형이었던 낭만적 사랑(연애, 결혼, 섹슈얼리티의 통일)으로 모이게 되는 성분들을 분석하고 있다. 13장 이후에는 낭만적 사랑이 문제로 되면서 이 성분들이 다시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17~19세기 문헌들을 다루지만 이는 지나간 ‘근세’로서의 modern을 탐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금도 끊임없이 유동하고 있는 현재의 ‘현대’로서의 modern과 관련된 이질적인 성분들을 밝히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 책은 ‘사랑의 역사’가 아니라 ‘현대적 사랑에 대한 역사 사회학적 해명’이다.

다섯째, 이 책은 현대 사회에서 사랑이 결국 익명적이지 않은 인격적․개인적 관계인 친밀관계로 자리 잡았다고 보지만 친밀성을 중심 주제로 다루는 사회학은 아니다. 루만은 열정으로서의 사랑이 개인화가 본격화되기 이전에 생겨났고 개인화 없이는 친밀관계가 다른 사회적 관계들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하지 못한다고 본다. 물론 열정적 사랑이 이러한 자율성 획득의 기폭제가 되긴 하지만 말이다. 따라서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책은 친밀관계의 성립 및 코드화 과정을 다루고 있는 것이지 친밀관계 자체를 주제로 다루는 것은 아니다.

여섯째, 이 책은 열정으로서의 사랑을 현대적 사랑(사랑을 위한 사랑)의 성립을 위한 중요한 계기라고 보지만 이런 사랑이 오늘날 가능한 사랑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루만에 의하면 능동이면서도 동시에 수동이라는 역설을 담고 있는 열정(passion)은 현대적 사랑의 전형이 되었던 낭만적 사랑의 한 계기일 뿐이며, 20세기 후반에 들어 이런 사랑이 문제화되면서 더 이상 본래의 과격한 성격을 유지하지 못한다. 심지어 루만은 문제들과 대안들을 논하는 15장에서 열정적 사랑이 일종의 이행기 의미론에 불과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런 의미에서 열정적 사랑보다는 낭만적 사랑의 성립 과정 및 그 해체 과정에 대한 진단이 이 책의 중심 주제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책 제목이 ‘낭만적 사랑’이 아니라 ‘열정으로서의 사랑’이 된 것은 아마도 열정적 사랑이야말로 사랑이 역설이라는 점을 투명하게 드러낸 의미론이라는 점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사회적 관계들과 뚜렷이 구별되도록 만든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무엇이 아니라고만 말했는데, 만약 독자들이 이 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사랑의 사회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족 사회학도, 섹슈얼리티 사회학도, 친밀성의 사회학도 아닌 ‘사랑’이라는 사회적 관계가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독립분화되어왔으며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기술하는 사회학 이론이다. 그리고 심리적인 것도, 신체적인 것도 아닌 사회적인 연구 대상으로서 사랑을 다루기 위해 루만은 이 책에서 ‘사랑이라는 사회적 체계에 관한 이론’, ‘사랑이라는 소통매체에 관한 이론’, ‘사랑의 진화에 관한 이론’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그가 사회학의 모든 연구 대상을 체계이론, 소통이론, 진화이론의 세 가지 이론 맥락에서 각각 다루고 이를 서로 연결시켜보고자 기획했던 것과도 연결된다. 그렇다면 이제 그 이미지로만 보면 도무지 사랑 같은 것을 주제로 다룰 수 없을 듯한 ‘체계이론가’가 왜 사랑을 이토록 치열하게 탐구했는지 살펴볼 차례이다.

 

3.

사회학의 일반 이론부터 경제, 학문, 법, 예술, 정치, 종교, 교육 등 현대 사회의 여러 기능체계들에 관한 이론들까지 다룬 거대 사회학자 루만이 사랑을 주제로 한 책도 썼다는 말에 대한 반응은 대개 ‘그 사람도 그렇게 가벼운 글을 썼어?’라는 식이다. 이 책을 몇 줄만 읽어보면 알겠지만 루만은 사랑을 결코 가볍게 다루고 있지 않으며, 이 책이 그의 광범위한 이론적 관심을 자랑하기 위한 장식품도 아니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주제는 그가 거대이론의 야망에 시동과 재시동을 걸 때 가장 먼저 다룬 주제이다.

<열정으로서의 사랑>은 1982년에 출간되었지만 이미 1968년에 그가 대학 강단에서 행한 첫 세미나의 주제였다. 1969년 빌레펠트 대학교의 세미나를 위한 원고는 2008년 독일에서 <사랑-하나의 습작Liebe-Eine Übung>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1968년에 착수해 1982년에 완성했다는 점은 그의 학문적 일대기에 비추어보면 매우 의미심장하다. 처음 사회학 교수가 되어 ‘제목: 사회이론, 기간: 30년, 비용: 0’이라는 프로젝트를 대학에 제출한 시점(<사회의 사회>의 서문 참조) 그리고 루만 체계이론의 새로운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자기지시적․자기생산적 체계이론으로 전환하던 시점에 가장 먼저 택한 주제가 사랑이었던 것이다.

경제도 법도 정치도 아닌 사랑에서 시작한 이유를 루만이 직접 밝히 적은 없는 듯하다. 다만 옮긴이는 두 가지 추측을 해본다. 첫째, 다루기에 가장 까다롭게 보이는 작은 규모의 상호작용 체계를 다룸으로써 자신이 연마해나가던 새로운 개념틀의 적합성을 시험해보고자 했던 것 같다. 둘째, 익명적 관계가 지배적인 현대 사회에서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전인격적 친밀관계가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엄청나게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현대 사회를 설명하는 중요한 실마리로 간주했던 것 같다. 
 

어쨌거나 <열정으로서의 사랑>을 완성한 직후 루만은 모든 사회적 관계들을 다룰 수 있는 일반 이론의 기본 개요를 집필하기 시작해 1984년에 <사회적 체계들Soziale Systeme>이라는 첫번째 주저를 내놓았다. 그리고 그 이후 앞서 언급한 여러 기능체계들을 연구한 단행본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1997년에는 자신의 사회이론을 집대성한 두번째 주저 <사회의 사회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를 출간했고, 이듬해 혈액암으로 사망한다. 루만의 생애와 그의 체계이론이 변천해온 과정에서 대해서는 옮긴이가 번역한 게오르그 크네어/아민 낫세이, <니클라스 루만으로의 초대>(갈무리, 2008)를 참조하기 바란다. 하버마스와의 비교를 통해 루만 체계이론에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쓴 논문인 「루만(N. Luhmann)과 하버마스(J. Habermas)의 대립구도에 관한 하나의 이해」(<진보평론> 2009 여름)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루만의 체계이론과 그 사회이론을 더 상세하게 소개한 옮긴이의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보완해 조만간 책으로 출간할 계획이다.

<열정으로서의 사랑>은 <사회적 체계들> 이전에 나왔다. 그래서 더 완성된 루만의 개념틀에 비추어보면 이 책에는 다소 불명확한 용어 사용이 많다. ‘소통’,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소통매체’, ‘상호침투’ 등의 주요 개념들이 그리 뚜렷하게 정식화되어 있지 않고, 이로 인해 독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옮긴이는 옮긴이 주를 통해 이를 보완했다). 완성기 저작들에서는 정치의 코드를 통치/피통치(혹은 통치/반대)로 보지만 이 책에서는 진보/보수로 파악하는 등 혼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부분도 많다. 그럼에도 이런 약점을 충분히 상쇄할 만큼 이 책은 이행기 저작으로서의 매력을 갖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 상태를 전달하기 쉬운 일상 언어와 루만 특유의 탈인본주의적․추상적 개념들을 혼합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루만의 저서들에 비해 독자들이 루만 이론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그의 개념들이 그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경험들로부터 도출된 추상이라는 점을 느끼게 해준다. 옮긴이가 추측컨대 만약 루만이 1990년대에 이 책을 다시 썼다면 이처럼 - 어려우면서도 - 매력적인 글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열정으로서의 사랑>은 사랑, 섹슈얼리티, 가족 등을 주제로 한 사회학의 여러 논의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상적 사랑, 열정적 사랑, 낭만적 사랑 등의 시기 구별법뿐 아니라 낭만적 사랑을 이루는 여러 계기들에 대한 분석과 그에 함축되어 있는 남성중심성에 대한 지적 그리고 낭만적 사랑 이후 사랑이 어떻게 문제가 되어버렸는지에 대한 통찰 등등이 그러하다.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의 <현대 사회의 성, 사랑 그리고 에로티시즘>(새물결, 2001), 울리히 벡(Ulrich Beck)과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Elizabeth Beck-Gernsheim)의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새물결, 1999), 크리스티안 슐트(Christian Schuldt)의 <낭만적이고 전략적인 사랑의 코드>(푸른숲, 2008)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에는 오히려 먼저 번역된 이 책들과 비교해 보면, 우선 루만은 오늘날 사랑이 처한 문제를 지금 제기되고 있는 구체적인 문제 상황을 통해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의미론이 변천해온 과정을 통해 그리고 그 속에 함축되어 있는 사랑이라는 코드 자체가 벗어날 수 없는 역설을 통해 다룬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20세기 후반의 변화에 많은 분량을 할당하고 있는 데 반해 루만은 오히려 현대적 사랑의 성립 시기인 17~18세기의 문헌들을 연구하는 데 더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루만은 기든스의 ‘수렴적(congruent) 사랑’이나 슐트의 ‘낭만적이고 전략적인 사랑’과 같은 희망적인 대안을 제시하려 하지 않는다. “비정상적인 것일 뿐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비개연성”인 사랑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더 치밀하게 드러내고자 할 뿐이다. 이런 면에서도 <열정으로서의 사랑>은 사랑에 대한 지침이 아니라 사랑을 문제 삼고 다루어나가는 법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사회학적 기술(記述)이다.

 

4.

번역 용어 선택과 관련해 주요한 것들은 본문에 처음 나오는 곳에 옮긴이 주를 달아 설명해놓았다. 또한 찾아보기에 독일어 단어를 병기해 이를 통해 전체 용어에 대한 독한 대조가 가능하도록 했다. 여기서는 추가로 두 가지만 밝히겠다.

첫째는 Intimität(영어로는 intimacy)의 번역어로 ‘친밀성’을 택한 이유이다. 이 단어를 ‘내밀성’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기 때문이다. intim이 그 어원상 내적인 것을 뜻하므로 내밀성이 적합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intimacy는 현대의 용법에서 그저 내밀한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런 내밀한 것을 소통하는 관계를 뜻한다. 그런 관계를 우리말로 표현할 때 ‘내밀관계’보다는 ‘친밀관계’가 더 적합하다고 본다. 또한 한자어 ‘친(親)’은 ‘친히’, ‘친필’ 등의 표현에 남아있듯이 본래 ‘자기 자신’을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현대로 올수록 친한 ‘관계’를 뜻하는 말이 된 것이기 때문에 intim의 쓰임새 변화와 비슷한 변화 과정을 겪어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옮긴이는 ‘친밀성’, ‘친밀관계’, ‘친밀소통’ 등의 표현을 선택했다.

둘째는 Person(영어로는 person)과 Individuum(영어로는 individual)을 ‘개인’으로 번역하지 않고 ‘인격’과 ‘개체’로 구별해 번역했으며, 이 두 단어의 형용사 및 그 명사형도 ‘인격적’, ‘인성’, ‘개체적’, ‘개체성’ 등으로 구별해 번역했다. ‘가면’을 뜻하는 라틴어 persona에서 나온 person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개인을 뜻하는 말로 주로 쓰이는 반면, ‘나누어질 수 없다’는 뜻에서 나온 individual은 개인의 영혼이나 의식만을 뜻하다가 점차 몸이나 사회적 존재도 뜻할 수 있는 말로 바뀌었다. 특히 루만은 Person을 의식도 몸도 아닌 소통의 주소지, 즉 사회적 체계들에서의 행위 귀속 지점을 뜻하는 전문용어로 사용하기 때문에 더더욱 individual 계통의 단어와 구별해 번역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 책에서 특별히 개념적인 방식으로 쓰이지 않을 때는 원만한 독서를 위해 가끔 ‘개인’이라는 표현을 썼다. 즉 개인을 person으로 보건 individual로 보건 별 문제가 없을 때 그렇게 했다. 
 

이 책은 오랜 시간 동안 여러 명의 옮긴이들에 의해 작업되어왔다. 먼저 번역을 맡은 분들은 영어판을 많이 참조했는데 영어판 자체가 너무 오역이 많아서 원저인 독어판을 참조한 전면 교정 작업이 이루어졌다. 재번역에 가까운 교정 작업을 하면서 이 글을 쓴 옮긴이가 번역 대본으로 삼은 것은 1982년에 처음 나온 독일어판을 주어캄프(Suhrkamp) 출판사가 그대로 1994년에 문고판으로 낸 Liebe als Passion - Zur Codierung von Intimität, suhrkamp taschenbuch wissenschaft 1124권이다. 하지만 루만의 각주에 등장하는 문헌의 상당수는 프랑스와 영미권에서 나온 책들이라서 영어판의 표기 방식을 따랐다. 그리고 루만이 1985년에 직접 쓴 영어판 서문을 독일어 용어들과의 조응관계를 충분히 고려해 함께 실었다. 󰡔사회적 체계들󰡕 이후에 쓴 영어판 서문은 독어판 서문보다 명료하게 이 책의 이론적 위상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이 이 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영어판 서문의 출처는 Love as Passion - The Codification of Intimacy,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6이다.

루만은 이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수많은 프랑스어, 영어, 라틴어 등의 문헌들을 독일어로 번역해놓지 않았다. 독일 독자들을 매우 곤란하게 만들었겠지만 수백 년 전에 쓰인 원문이 풍기는 향취를 손상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한국어판에서도 반복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독일어 이외의 언어로 된 문장들과 용어들은 병기해놓았다. 이 글을 쓰는 옮긴이는 독일어 이외의 언어를 번역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들 문장의 번역은 앞선 옮긴이들의 작업을 받아들였다. 다만 새물결출판사 편집부가 독일어로부터 새로 번역된 용어들을 감안해 다시 손보는 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어색한 곳은 별로 없으리라 믿는다.

여러 명의 작업을 거친 것이긴 하지만 독일어에서 번역한 문장들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오역이나 어색한 문장에 대한 모든 책임은 최종 번역자인 이 글을 쓰는 옮긴이에게 귀속된다는 점을 밝혀둔다. 그리고 여러 번의 교정 과정을 통해서도 여전히 미흡한 곳이 남아 있겠지만 적어도 영어판보다는 더 나은 한국어판을 만들어냈다고는 장담할 수 있다.

이미 오래전에 출간을 예고하고도 까다로운 루만 전공자의 방해(?)로 전면 교정의 결단을 내려주신 새물결 출판사의 열정에 감사드린다. 또한 교정에 대한 모든 권한을 위임해준 다른 옮긴이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내용 요약에 대한 기대를 충족하는 대신 옮긴이의 독후 감상을 아주 짧게 밝히면서 불친절한 옮긴이의 말을 마무리하겠다. 이 책을 읽으며 유신시대에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왜 금지곡이었는지를 그리고 그 곡이 해금된 후 과연 사랑은 쉬워졌는가를 생각해보길 바라면서. 
 

누구나 할 수는 없었던 사랑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이

이루어진 후

다시 문제가 되어버린 사랑

자유, 평등, 정의, 인권, 법치, 민주 등

우리의 현대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2009년 7월에 쓰고 9월에 고쳐 씀, 정성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제8장. 구조와 시간, 제3절

<사회체계이론> 2권 61쪽
그래서 우리는 구체적 (현실중심적) 구조개념과 분석적 (방법론을 도입한) 구조개념에 대한 통상적인 대안을 택했으며, 선택성을 겨냥하는 가운데 어째서 구조개념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 개념이 왜 단순히 관계, 상호의존성, 불변체 이상의 것을 진술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했다.

<Soziale Systeme> S.387
이를 통해 우리는 구체적 (현실과 관련된) 구조 개념과 분석적 (방법론적으로 도입된) 구조 개념이라는 관례적인 양자택일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선택성을 겨냥함으로써, 무엇 때문에 구조 개념이 도대체 필요한지, 그리고 단순하게 관계들, 상호의존성, 불변성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구조 개념이 더 많은 것을 진술한다는 점 또한 설명했다.

 

<사회체계이론> 2권 62쪽
제한의 선택은 그 선택이 이중의 우발성이라는 조건에서 재생산을 성립시킬 경우에만 구조가치를 확보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실패확률을 구조 속에서 선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Soziale Systeme> S.388
제약들에 대한 선택은 그 선택이 이중의 우연성 조건 아래서 재생산을 가능하게 할 때만 구조로서의 가치를 획득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구조가 실망할 가능성을 미리 가려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체계이론> 2권 64쪽
그에 의하면 사건이란 (사회적으로는 실현가능성이 가장 낮은) 시간원자이자 “눈에 보이지 않는 실무율(all or none)적 사건”이다. “그래서 단일적 사건은 ‘이분화하는’ 계량화될 수 없는 사건에 불과하다. 그 사건을 시공간 모델 속에 표상한다면 아마 점에 불과할 것이다.”

<Soziale Systeme> S.389
그에 따르면 사건은 (사회적으로 가능한 최소의) 시간 원자이다: “나눌 수 없는(indivisible) 전부 아니면 전무인 사건”, “따라서 단일한 사건은 ‘이분법적인’ 사건, 양으로 측정될 수 없는 사건이며, 그 이상은 아니다. 시공간 모델 위에서 그 사건을 재현한다면 하나의 점일 뿐이다.”

<사회체계이론> 2권 64쪽
이러한 자유획득은 구조의 형성을 통해 지불되어야 한다.

<Soziale Systeme> S.390
이러한 자유 획득은 구조 형성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사회체계이론> 2권 67쪽
현재는 과거 속으로 사라질 것이며 그후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의미상으로 농축된 연쇄체를 진행시킬 경우 전화번호를 택할 때처럼 가장 가까운 번호를 고르거나, 문을 여는 초인종을 누를 때처럼 이질적인 보완적 행동을 기대하듯이, 여타 행위의 기대지평 속에서 행위의미가 구축되어야만 저지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행위 자체가 순간적 일시성을 벗어나서 저 멀리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잠재적 에네르게이아, 즉 작용하는 행위의 힘을 통해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행위 자체가 관계설정의 선택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을 정도로 미래(와 행위라는 개별요소의 시간적 재귀준거)의 불확실성을 축소하는 기대구조를 제시하고 지속적으로 재활성화해야만 성립한다.
물론 이 행위가 다른 행위에 대해서도 사회체계로서 기능하는지는 별도로 연구해야 한다. 기대의 안정성이야말로 행위들 사이의 중단과 새 출발의 부단한 연속, 즉 “궁극성”에 근거한다. 기저사건의 질료가 변동하는 것은 우리가 변화하는 현상과 구별하여 기대를 산출하고 확장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Soziale Systeme> S.392
현재는 과거 속으로 사라질 것이며, 어떤 것도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사라짐은 행위의 의미가 더 나아간 행위에 대한 기대 지평 속에서 구성된다는 점을 통해 방해를 받을 수 있을 뿐이다 - 전화번호 숫자를 고를 때 그 다음 숫자를 기대하는 것처럼 의미상에서 농축된 연쇄가 진전될 것을 기대하거나, 문을 열어 달라는 벨이 울릴 때 다른 종류의 보충적 행동을 기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되면 행위는 순간적 일시성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을 넘어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런데 이는 내재적 에네르게이아energeia, 힘, 행위의 잠재력élan vital을 통해 가능한 것이 아니라 기대구조들의 주어지고 계속 재활성화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기대구조들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그리고 이를 통해 행위라는 개별 요소의 시간적 자기지시도) 크게 감축시켜서, 행위가 관계맺기의 선택을 통해 스스로를 특정하게 규정할 수 있게 만든다. 이것이 사회적 체계가 아닌 다른 체계들에도 유효한가의 문제는 전문적인 탐구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래서 기대들의 안정성은 행위들의 지속적 중단과 새로운 시작에, 즉 그 “일회성Eventualität”에 근거한다. 기초적 사건들이라는 질료의 변동은, 우리가 가변적인 것과 구별하여 기대들을 형성하고 고수할 수 있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사회체계이론> 2권 69쪽
그러한 체계는 시간에 구속된 체계가 아니며, 스스로도 적응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 구조를 바꾸어야 할 정도로 시간이라는 의미에서 노출된 체계도 아니다. 더욱이 (자기생산이론이 거시분자나 세포와 관련하여 전제한) 요소들 사이의 교환가능성은 시간관련성을 전혀 충분히 포착하지 못한다.

<Soziale Systeme> S.394
그런 체계는 시간적으로 고정된 본질을 갖지 않는다. 그 체계는 스스로 적응하고 경우에 따라 구조들을 변경해야 한다는 의미에서만 시간에 내맡겨져 있는 것은 아니다. 요소들의 교환가능성은 (고분자나 세포를 고려하는 자기생산 이론은 이로부터 출발했다) 결코 시간 관련을 철저히 충분하게 포착하지 못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여성 롬김, <사회체계이론>의 오역들 1

논문 준비와 루만 입문서 번역으로 바빠서 니클라스 루만의 Soziale Systeme의 한국어판인 <사회체계이론>(한길사)의 오역들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작업을 미루어왔다. 그런데 얼마전 우연히 인터넷 뉴스를 검색해보다가 '2008 한국 출판문화상'의 번역부문 후보작에 이 책이 올랐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행히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도대체 누가 이 책을 추천했는지 의문스러웠다. 추천한 자는 과연 이 책을 읽을 수 있었을까? 무한한 상상력을 가지지 않은 자라면 책의 페이지 숫자보다 더 많은 오역들로 가득찬 이 책을 한글로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조금씩이나마 이 책의 오역들을 구체적으로 입증하고자 한다. 이러한 오역 밝히기 작업은 박여성 옮김의 개정판을 원하기 때문이 아니다. 내 판단으로는 그분은 루만에 대해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나의 목적은 완전히 새로운 번역이며 나의 세미나 동료들은 그 일을 기꺼이 할 의지가 있다. 사실 4년 정도 루만 세미나를 진행해오면서 우리는 이미 <사회적 체계들>의 70% 이상을 초벌 번역해놓았다.

 

책 제목이 왜 오역인지, <사회체계이론>의 역자가 루만의 이론 구도를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지, 반복되는 몇몇 주요 단어 오역에 대해서는 <루만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사회적 체계들'을 중심으로>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아래에서 <사회체계이론>은 한길사에서 나온 번역본이고 그 페이지를 표시했다. <Soziale Systeme> 다음의 'S.**'는 독일어 페이지 표시이고, 그 아래의 번역문은 내가 옮긴 것이다.

 



<사회체계이론> 53쪽

그래서 보편이론, 특히 분화의 이론으로서 재귀준거이론은 스스로를 자신이 분화된 결과로 간주해야 한다. 재귀준거에 대하여 이론이라는 명칭을 정당화하는 데 대한 제약은 바로 재귀준거에 대한 몰입이라는 비임의성에 있다.



<Soziale Systeme> S.10

그래서 어떤 보편적 이론, 더구나 분화 이론인 보편적 이론은 자기 자신을 분화의 결과로 간주할 수 있다. 보편적 이론이 그 자신에 대해 이론이라는 제목을 붙이는 걸 정당화해주는 제약조건은 자기지시[자기준거]를 허용하는 것이 이렇듯 임의적이지 않다는 점에 있다.




<사회체계이론> 54쪽

자의적 출발에서도 헤겔이 구성한 체계에서처럼 이론구축의 진전과정에서 임의성이 취해질 수밖에 없다.



<Soziale Systeme> S.11

그리고 헤겔의 체계에서 그런 것처럼 출발점이 자의적이라 하더라도 이론 구축이 진전되면서 자의성은 사라진다.




<사회체계이론> 57쪽

의미, 시간, 사건, 행위, 기대 따위의 개념이 현실세계에 진짜로 실존한다고 우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Soziale Systeme> S.13

의미, 시간, 사건, 행위, 기대 등등이 현실 세계에 있다는 점을 누구도 부인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체계이론> 58쪽

그 시도는 비(非)구심적으로 구상된 세계와 공동체에서 다극적인(따라서 다중맥락적인) 이론을 전개한다.



<Soziale Systeme> S.14

그런 시도는 탈중심적으로azentrisch 파악된 세계와 탈중심적으로 파악된 사회 속에서 다중심적인polyzentrisch (그 결과 다맥락적이기도polykontextual 한) 이론을 발전시킨다.



 

<사회체계이론> 59쪽

특히 지난 10년간 이루어진 일반체계이론의 방향전환은 사람들이 흔히 보는 것보다도 훨씬 심각하게 사회학의 이론적 관심사들과 대립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학의 이론적 논의에서 여태까지는 익숙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추상화와 복잡화를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책에서 그 괴리를 메워줄 연결고리를 제안하고자 한다.



<Soziale Systeme> S.15

일반 체계이론에 있어서의 지형 변화, 특히 최근 10년 사이의 지형 변화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하게 사회학의 이론적 관심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변화는 사회학의 이론 논의에서는 이제까지 익숙하지 않은 수준의 추상성과 복합성을 강제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이러한 연관을 수립하고, 이러한 간격을 메워보려고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만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사회적 체계들』에 관하여

 

정성훈


 




니클라스 루만과 체계이론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1927~1998)은 ‘체계이론’을 통해 현대사회학에 중요한 혁신을 가져온 독일 사회학자다. ‘메타는 없다’는 (언뜻 포스트모던한) 테제를 기초로 정교하면서도 거대한 메타 사회이론을 구축해냈다는 점에 루만의 지적 독특함과 거장다운 사유의 넓이가 있는 것 같다. 그는 다작으로도 유명하여 평생 50권이 넘는 저서와 350편 이상의 논문을 남겼으며 다룬 주제의 범위도 사회의 일반이론에서 정치, 경제, 교육, 법 심지어 문학과 사랑에 이르기까지 방대하다. 하버마스와 더불어 전후 독일 사회과학계의 가장 중요한 지성으로 평가하는데 이견이 없다. 하지만 국제적 명성에 비한다면 국내에서 루만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그가 매우 난해한 이론가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기이하다’고 할 만큼 낮은 수준이다. 그의 주저 중 하나인 <사회체계이론1, 2>가 지난여름 국내에 번역, 소개되면서 이런 답답한 상황이 슬슬 개선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루만과 체계이론에 관심을 가진 원우들을 위해 두 편의 좋은 소개글을 싣는다. (편집자)


루만과 사회학의 사고 전환

니클라스 루만이라는 학자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첫째 사회적인 것이 무엇인지 밝혀내었고, 둘째 사회적인 것 일반을 다룰 수 있는 기초이론을 마련했고, 셋째 이를 토대로 한 사회이론을 제시했으며, 넷째 여기에 더해 20세기 후반의 세계사회에 대한 몇 가지 시대 진단을 내린 거대 이론가이다. 사회학자라면 누구나 그런 일을 할 텐데, 왜 굳이 ‘거대’ 이론가라고 부르느냐는 반론이 있을 법하다. 하지만 루만이 이룬 사회학적 사고의 전환과 사회적인 것 일반을 다룰 수 있게 하는 풍부한 개념틀, 그리고 그 방대한 작업 규모에 주목한다면, 다른 이론가들이 인본주의 개념틀에 사로잡혀 얼마나 협소한 범위만 다루고 말았는지 알 수 있다.

루만에 의하면, 사회적인 것은 의식적 내지 주관적인 것으로 환원되지도, 그렇다고 사물적 내지 객관적인 것으로 다루어질 수도 없는 창발적(emergent) 질서 차원을 이루고 있다. 이는 이른바 주관적 사회학과 객관적 사회학을 단순히 절충하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하버마스처럼 주체 개념을 생활세계의 상호주관성으로 확장함을 통해 사회적인 것을 해명하는 것도 아니다. 루만은 서로를 꿰뚫어볼 수 없는 의식체계들은 어떤 공동의 실재 차원도 만들어낼 수 없다고 본다. 오직 가능한 것은 ‘기대에 대한 기대’로 이루어지는 이중의 우연성, 즉 타자의 우연적 기대에 대한 자아의 우연적 기대이다. 이러한 이중의 우연성은 근본적으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체계들이 각각의 의도를 억제하여 기대 구조를 형성시킴을 통해 구조화된 우연성으로 변형될 뿐이다. 구조화된 이중의 우연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정보, 통지, 이해라는 3중의 선택 과정인 소통(Kommunikation)의 과정은 의식체계들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자적인 실재의 차원, 즉 사회적 체계를 이루게 된다. 그래서 루만은 사회적 체계를 이루는 구성요소가 인간이 아니라 소통이라고 보며, 인간은 사회적 체계와 상호침투할 수는 있지만 환경에 머물게 된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사회적인 것을 다루어온 사고방식과 완전히 달라지는 루만의 전환 지점, 즉 사회적 체계를 창발적 질서로 이해하는 것이다.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인 사회는 그 진화의 초기 단계에 있어서는 그 환경에 있는 인간을 닮은 모습(부족, 혈통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래서 현대 이전에는 ‘인간적 사회’라는 관념을 갖고서도, 즉 인간 주체나 사물 객체와 다른 사회적 차원을 고민하지 않고도 사회를 묘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경제, 정치, 법, 학문 등 여러 기능체계로 분화된 현대에 이르게 되면 사회는 더 이상 그 환경에 있는 인간들을 구획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분화 형식을 갖게 된다. 오직 경제인이기만 한 사람도 오직 학자이기만 한 사람도 없다. 경제나 학문과 같은 기능체계의 작동을 설명함에 있어 우리는 더 이상 사회계약론이나 실천이성과 같은 주체철학에 의지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고정된 사회구조 모델을 전제하는 것은 비개연적으로 진행되는 사건의 연속인 소통 과정과 사회의 진화를 설명할 수 없다.

지금까지 간단하게 설명한 것이 루만의 중기 주저작인 『사회적 체계들 Soziale Systeme』의 초반, 특히 이중의 우연성을 다룬 3장에서 이루어지는 사고 전환의 핵심 내용이다. 이러한 전환을 토대로 루만은 기존 사회학과 철학의 개념들인 의미, 소통, 행위, 관찰, 구조, 과정, 인격 등에 모두 새로운 위치값을 부여함으로써 사회적 접촉 일반을 파악할 수 있는 개념틀을 이 책에서 마련한다. 사회학 역사에 있어서나 체계이론 역사에 있어서나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더 소개하기 전에 왜 내가 한글판의 제목인 ‘사회체계이론’이 아니라 ‘사회적 체계들’이라고 칭하는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루만 번역서의 문제들

한국에 루만에 대한 소개는 그리 잘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이전에 번역된 저작은 협소한 주제를 다룬 것이었다. 포괄적으로 루만을 다룬 입문서 하나가 번역되긴 했으나, 그조차도 루만의 제자들이 그리 신뢰하지 않는 개론서 전문 저자가 겉핥기식으로 쓴 책이었다. 아직 하버마스의 저작들을 통해 이루어진 루만에 대한 왜곡된 소개, 즉 파슨스의 아류 혹은 기성의 사회질서를 옹호하는 보수적 체계이론 정도로 여겨버리는 인식을 교정할 만한 한글책은 부족하다.

그래서 자기생성(Autopoiesis)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이후 1984년에 나온 Soziale Systeme의 번역은 반가운 일이다. 이 책은 루만의 이론사에 있어 사회적 체계 일반을 다룰 수 있는 기초 개념들을 완성한 저작이자, 1997년에 나온 또 다른 주저작인 『사회의 사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사회이론 생산의 출발점이었다.

루만은 『사회적 체계들』에서 “이 연구는 사회를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이자 다른 여러 사회적 체계들 중 하나로 이해하는 사회이론을 제공하지 않는다”(독18, 한1:63)고 말한다. 사회적 체계를 다루는데 사회이론을 제공하지 않는다니? 루만은 사회적 체계를 상호작용, 조직, 사회(Gesellschaft)로 분류한다. 이들 사회적 체계는 각각 고유한 작동(Operation) 원리를 갖고 있으며, 그중 사회는 ‘모든 소통을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로 정의된다. 그래서 기업, 정당, 학교 등에 대한 연구가 조직사회학의 과제라면, 경제, 정치, 교육 등 지역 경계를 넘어 범사회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현대 사회의 기능체계들에 대한 연구는 사회이론의 과제가 된다. 따라서 『사회적 체계들』은 아직 본격적인 사회이론을 다루는 책이 아니라 상호작용, 조직, 사회 등 사회적 체계 일반을 다룰 수 있게 하는 기초를 놓는 책이다. 그래서 soziales Sytem은 social system과 ‘사회적 체계’로, Gesellschaftssystem은 societal system과 ‘사회체계’로 구별해 옮겨야 할 필요가 생긴다.

그런데 한글판 옮긴이는 독자들이 읽기 쉽게 ‘사회적-’를 ‘사회-’로 바꾸었고, 그래서 Gesellschaft를 “사회”, “(기능적으로 분화되지 않은) 전체사회”, “공동체” 등 “문맥에 따라 상이한 역동적 번역을 취했다”고 밝힌다. 하지만 이러한 역동적 번역은 사회를 새롭게 정의하고자 하는 루만의 노력을 허사로 만드는 일이다. 분절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는 소통들이 전세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사회들이 있었지만,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전세계적으로 소통이 연결되는 현대 사회는 세계사회라고 말하는 루만의 설명법은 위와 같은 역동적 번역 때문에 제대로 전달될 수가 없다. 더구나 ‘공동체’라는 번역은 사회를 결코 인간 공동의 것으로 보지 않는 루만의 의도를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식대로 그대로 옮기면 “사회는 오늘날 분명히 세계사회”(독585)는 문장은 옮긴이에 의해 “전체사회는 오늘날 분명히 세계공동체”(한2:290)라는 무의미한 문장이 되어버린다. Gesellschaft라는 단어 자체에는 결코 ‘전체’니 ‘공동체’니 하는 함의가 들어있지 않다.

이러한 옮긴이의 몰이해는 제목뿐만 아니라 루만 소개에서도 드러난다. 옮긴이는 1997년에 나온 루만 사회이론의 집대성작인 『사회의 사회』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심지어 『사회의 경제』, 『사회의 학문』 등 일련의 사회이론 저작들을 『사회적 체계들』의 각론이라고 말한다. 앞선 설명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루만은 『사회적 체계들』에서 기초 개념을 마련한 후 사회이론 작업은 각론들을 먼저 쓰고 이들의 총론을 마지막에 썼다. 옮긴이가 루만 이론의 체계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사회체계이론』을 유일한 “결정판”으로 만들어 많이 팔고자 하는 출판사의 책략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이 정도의 문제는 번역의 질에 비하면 아무 문제도 아니다. 연산(Operation), 외율준거(Fremdreferenz) 같은 납득하기 어려운 번역어 선택은 그렇다 치고, 수십 번에 걸쳐 bewa..hren(입증)을 bewahren(보존)으로, Simplifikation(단순화)를 Implikation(함축)으로, Zumutung(요구)를 Vermutung(추측)으로 잘못 읽는 것은 최소한의 정성 부족을 보여준다. 문장 오역도 무수히 많으며, 2권 후반부에 이르면 거의 한 단락에 하나 이상 나온다. 지면의 제약으로 인해 여기서 밝혀둘 것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루만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원래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역의 탓도 크다는 점이다. 독일어를 못 읽는 사람이 지금 이 책을 읽고 싶다면 영역판을 추천한다.

『사회적 체계들』의 내용

『사회적 체계들』은 도입과 12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도입인 ‘체계이론의 패러다임 전환’과 체계와 기능, 체계와 환경을 다룬 1장과 5장은 루만 체계이론이 파슨스와 달리 구조보다는 기능을 우위에 둔다는 점, 생물학자인 마뚜라나가 이룩한 자기생성적 전환을 받아들임으로써 체계 중심이 아닌 세계(체계/환경-차이의 통일) 중심의 이론이라는 점 등을 볼 수 있다. 이는 체계이론이 보수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다는 오해를 불식시켜줄 것이며, 사회의 환경 문제, 즉 인간의 고통이나 배제 문제나 생태적 위기 문제를 다루는 데서도 큰 잠재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의미를 다루는 2장은 루만 이론의 또 하나의 자원인 후설의 지향적 의미 개념을 어떻게 사회학적으로 수용해 변형시키는지를 볼 수 있다. 루만은 70년대 초부터 의미가 행위나 구조보다 앞서는 사회학의 기본개념이라고 주장해왔고, 이 책에서 의미 개념은 의미를 구성하는 두 가지 체계(의식체계, 사회적 체계)의 다른 자기생성 원리를 밝힘으로써 완성된다. 앞서 말했듯이 3장은 사회적 체계가 고유한 자기생성 체계임을 밝히고 있으며, 4장에서 소통 개념을 해명함으로써 사회적 체계의 구성요소가 소통이지 왜 행위일 수 없는지 밝힌다.

사회적 체계 이론에서 행위 개념과 구조 개념의 위상을 밝히는 4장과 8장은 사회학 논쟁에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루만은 행위란 체계가 자기생성의 동일성 지점을 마련하기 위해 소통의 세 가지 선택인 정보, 통지, 이해 중 통지행위 하나로 단순화하는 것이라고 본다. 구조는 사건들의 연쇄인 소통 과정에서 기대를 제약하는 것이지 고정된 실체라고 보지 않는다. 구조는 과도한 임의성을 제약하는 것이지 행태 자체를 규제할 수 없고, 따라서 과정은 구조상 비개연적인 것을 개연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이렇듯 행위에 대해 소통을, 구조에 대해 사건과 과정을 우위에 둠으로써, 루만은 기든스의 구조화 이론이 행한 행위 중심 사회학과 구조 중심 사회학의 절충이 갖는 한계를 넘어서며, 하버마스의 소통적 행위 이론이 상호이해지향이라는 확인 불가능한 심리상태에 의지함으로써 갖는 한계를 드러낸다.

루만의 체계이론에서 인간의 자리는 어디이며, 개인은 무엇이며, 인간과 사회는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밝히는 대목은 6장 상호침투와 7장 심리적 체계들의 개체성이다. 그리고 9장은 헤겔 이래 계속 논쟁이 되어 왔고 오늘날도 기능론 대 갈등론이라는 왜곡된 구도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모순과 갈등의 문제를 새롭게 조명하며, 10장은 앞서 말한 세 가지 사회적 체계의 차이를 다루고 있다.

루만은 이 책의 1장을 “다음의 고찰들은 체계들이 있다는 점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시작한다. 그리고 이는 실재에 비추어 입증되어야 할 책임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의 체계가 단순한 분석 모델이 아니라 실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급진적 구성주의 내부에서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러한 선언에 대한 해명은 이 책의 맨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진다. 루만에게 세계란 체계상대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관찰하는 체계는 자신의 관찰이 가진 맹점을 볼 수는 없으나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반성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세계는 루만이라는 관찰자의 맹점에 묶여있는 것이고 세계는 다르게도 관찰 가능하지만, 누구도 그런 맹점을 벗어난 세계를 알 수 없다. 합리성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없다는 점을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자기지시와 합리성, 그리고 인식론을 위한 귀결들을 다루는 11장과 12장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장들이지만 과감하게 ‘체계들이 있다’는 선언으로 시작해 체계/환경-구별이 세계 기술에 있어 높은 실적을 낳을 수 있다고 믿는 루만 이론의 전면모는 여기까지 읽어야만 밝혀진다. 그리고 11장의 논의는 체계이론을 통한 사회비판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흐름으로도 이어진다.

『사회적 체계들』을 다 읽는 데는 워낙 긴 시간이 걸릴 뿐만 아니라 친절한 입문서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시작하기조차 어렵다. 그래서 좋은 입문서를 추천하자면 독어는 G.Kneer와 A.Nassehi가 함께 쓴 책과 M.Berghaus가 쓴 책을, 영어는 M.King과 C.Thornhill이 함께 쓴 책을 추천한다. 첫 번째 책은 필자의 번역으로 내년 초에 한글판이 나올 것이다.

정성훈 / 서울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agujsh@naver.com

FROM 연세대 대학원신문 제157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