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뿔쇠똥구리와 마주친 날 - 생명에 눈뜨다 ㅣ 내인생의책 그림책 54
호르헤 루한 글, 배상희 옮김, 치아라 카레르 그림 / 내인생의책 / 2014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굣길에 뿔쇠똥구리를 발견한 에스테반은 ‘아무 생각 없이’ 신발을 치켜든다. 뿔쇠똥구리는 자기에게 닥칠 위험 따윈 모른 채 자기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순간 에스테반은 그 벌레가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가만히 신발을 내려놓고 몸을 숙여 뿔쇠똥구리와 눈을 맞춰 본다.
아이들에게 생태나 환경 문제를 이야기할 때면 대개 실천 단계에서 어려움에 부딪힌다. 지구 행성을 훼손하는데 적극 참여한 어른들의 설득은 기본적으로 신뢰를 얻지 못한다. 부끄러움을 알았더라도 처음으로 돌리려는 시도는 이제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 그림책은 그런 면에서 기본적인 삶의 태도를 생각하게 해 준다. ‘인류와 함께 지구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실은 이런 발언도 인간 중심의 것이다. 인간이라는 종은 지구의 다른 거주자들에 대한 태도부터 수정해야 한다.
호르헤 루한은 멕시코에 살면서 직접 만든 어린이극을 공연하는 작가다. 자신의 그림책을 읽어주기도 하고, 기타와 건반을 연주하며 노래도 부르고 아이들과의 거리를 좁혀가며 지낸단다. 치아라 카레르의 그림은 재치와 장난기가 넘친다. 불규칙하게 찢어낸 종이를 이리저리 붙이고, 문지르거나 긁어낸 물감들의 흔적을 살려 이야기에 힘을 실어준다. 붓과 펜, 손가락이 도구가 되고 거기에 잉크와 색연필들의 효과도 더해진다. 함축된 글이 숨겨놓은 이야기를 그림으로 넉넉하게 풀어낸다. 책을 넘기면서 달라지는 뿔쇠똥구리와 사람의 크기가 이야기의 주제로 이끈다. 처음엔 일상적인 크기였으나 어느새 뿔쇠똥구리는 에스테반 만큼 커다래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공룡이 되어 아이에게로 성큼 다가와 앞발을 치켜든다. 뿔쇠똥구리는 치켜든 앞발을 그냥 내린다. 에스테반이 신발로 내려치지 않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위협적인 상황이 역설적으로 표현된 장면이다. 독자들은 어쩌면 그간 대상화했던 작은 곤충에 관한 생각에 질적 전환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뒤이어 번갈아 등장하는 두 주인공은 제 모습을 되찾고 느릿느릿 각자 갈 길을 간다. 둘은 그 길에서 마주쳤던 순간을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