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에서 피 여사의 험난했던 인생사를 주축으로 수직·수평적 가족사가 고루 그려졌다. 피영숙은 1925년에 태어났다. 자신보다 네 살 많은 언니 다음에 낳은 아들을 잃은 가정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태어났으나, 열병에 걸린 자신을 위해 어렵사리 약을 구해오신 할머니 덕분에 자신이 살았다며 할머니에 대해 좋게 회상했다. 비록 계집애가 학교 다니는 것은 마뜩잖아하셨지만.
가세가 기울어 서울로 이사하고 부모님은 서대문 형무소 앞에서 가락국수를 팔고, 본인은 정신대(위안부)에 끌려가지 않을 방책으로 피복 공장에서 군복을 만들었다. 이마저도 불안해 스무 살에 서둘러 시집을 갔다.
P129. 나는 피 여사를 통해 앞 시대 사람들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됐다… 왜 저렇게 옹고집에다가 억세고 난폭한 말투를 쓰는지 의아했는데… 그들의 우악스러움은 앞 시대 사회 환경의 반영이었다… 과거엔 빈곤이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었다… 죽음과 병치레가 일상이었고, 환자 없는 집이 없었다. - 2부 '행복과 고통의 총량' 中
시댁은 4녀 1남이었는데 콩가루 집안(?!)이었다고 했다. 그때 제대로 보살핌 못 받고 죽은 조카들을 두고두고 상기했다. 물론 당시 피 여사 시댁만의 어려움은 아니었기에 작가의 표현을 빌려 그 시절을 경유한 사람들의 모난 성격은 모진 세월을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P147. 공습과 폭격으로 한반도는 초토화되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고,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가족을 잃었고, 부상을 입었으며, 마음에도 공포와 불안이 각인되었다. - 2부 '이북 남자의 편지 공세' 中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얼마 뒤 남편의 주검을 찾다 극심한 후유증을 겪는다. 피난길에서 알게 된 평양 출신 남편과 재혼했다. 그리고, 박 여사를 전쟁 통에 낳았다. 새 남편은 소위 의처증으로 협박과 구타를 일삼았다.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지물포 가게도 하고 쌀장사도 했지만, 노름으로 탕진하고 큰 빚까지 졌다. 여러모로 피 여사를 고생시키다가 노환으로 죽을 때까지 참회하지 않았다.
피 여사의 수난은 계속되었는데 단칸방에 살며 연탄을 아끼려다 풍을 맞아 오른쪽 눈이 감기고 입이 삐뚤어졌다. 교회 계단에서 굴러 팔이 부러지기도 했다. 식모를 하다가 치료받고 회복되었던 입이 다시 삐뚤어지기도 했다. 의자에서 떨어져 갈비뼈를 네 개나 다치기도 했다. 그런데도 성치 않은 몸으로 바삐 움직이면서 친족의 출산마다 가서 도왔다. 특히 작가의 형제는 오래 돌본 듯하다.
P175. 가족 사이가 좋으려면 구성원들 각자 마음 수양을 줄기차게 하고, 타인에 대한 존중을 익혀야 하는 동시에 경제 형편이 어느 정도 괜찮아야 한다. 빈궁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가족 관계에 균열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둘 다 인생이 잘 풀리지 않았고, 건드리기만 하면 터지는 폭탄이 가슴속에 있었다. 둘의 충돌은 필연이었다…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서 지낸다는 건, 궁핍한 가정에서 큰다는 건, 참으로 서글프게 씁쓸한 일이었다. - 2부 '헐벗은 가슴으로 상처를 끌어안고' 中
머리채를 잡고 싸우기까지 한 사위와의 갈등으로 떠나긴 했지만. 작가의 아버지는 직장을 그만두고는 도박으로 큰돈을 날리고 술과 담배에 절어 살아가던 때였다.
작가는 주위에 날을 세운 체 십대를 외롭게 보냈다. 고2 때는 급식비를 아끼려고 식당 도우미를 자처했다. 피 여사와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쟁여 놓았던 외로웠던 기억이 자꾸 소환되어 마음을 아리게 했다.
제때 털어내지 못한 괴로운 감정 덩어리는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이런 마음의 생채기는 다소 늦더라도 드러내어 약을 발라 준다면 비록 말끔하게 없어지진 않아도 옅어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면 세상을 조금쯤은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P194. 나는 피 여사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을수록 더 나긋나긋하게 피 여사를 대했다… 겸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내가 불행하다고 해서 세상도 원래 불행한 곳이라고 단정 짓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는 작지만 소중한 희망의 변화들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들을 눈여겨보자고 다짐했고,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좌절과 허무와 분노로 숨 막혔던 내 마음에 조금씩 숨통이 트였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 2부 '내 처지가 지옥 같더라도'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