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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꽃이 피었습니다 - 아이에게 읽어주다 위로받은 그림책
박세리.이동미 지음 / 이야기공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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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 가까이에 나는 미완의 꿈을 위해 아동문학을 공부하고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수년 전에는 그림책 공부도 병행했었다. 잠깐 그림책 강사로도 살았었다. 그림책을 나름으로 연구하다 보니 그 세계의 오묘한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고, 아동문학의 한 갈래가 아닌 예술의 한 장르로 보기에 마땅하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글 쓰는 습작생의 자리로 되돌아온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작년부터 나는 그림에세이도 공부하고 있는데 나의 기록을 남기고자 인스타그램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야기 공간> 출판사의 “그림책 꽃이 피었습니다” 책 표지 색을 골라달라는 게시글을 봤다. ‘아이에게 읽어주다 위로받은 그림책’이란 부제가 퍽 마음에 들었다. 재취업과 퇴사 후 체력 이상으로 무너진 내면의 문제 때문에 꽤 오랜 기간 무기력에 젖어 있다가 정신 차리게(?!) 된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터라 게시글의 내용 가운데 어른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위로하는 그림책 48권이 담겨 있는 책이라는 문구가 뭉클하게 했다.


끌림에 의해 나는 흰 표지로 선택한다고 댓글을 썼었다. 이유는 흔하지만 질리지 않고, 어른으로서 살지만 삶을 지탱하고 지켜가야 할 동심이 바랜 빛이 아니고 오롯이 희었으면 해서라고 글을 남겼다. 또 나름 편집 디자이너로 밥 먹고 살던 시절을 상기해 제목이 선명히 다가오는 느낌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 간만에 그림책 덕분에 몽글몽글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엄마, 여자, 마흔의 인생은 내 삶과도 맞닿아있기에 어느 정도 공감하며 읽다가 ‘사는 거 별로 다르지 않구나!(p191)’라는 대목에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48권 그림책을 단지 소개로 그치지 않고 삶으로 연결 짓고 풀어가는 게 좋았는데, 특히 생업으로 글쓰기를 하는 두 사람의 첫 만남이 불편함에서 출발해 그림책으로 소통의 창구를 얻는 과정을 진솔하게 그린 프롤로그부터가 퍽 인상적이었다.(p12) 교차 형식으로 편집된 두 사람 글의 느낌은 미세하게 달랐지만, 생각의 결이 비슷하게 흐르는 것도 놀라웠다.


그간 애쓰며 살아왔던 삶을 ‘그림책은 현실의 나를 되짚어보게 했다.(p135)’

‘버겁고 힘들 때는 잠시라도 쉬어가는 것이 맞다. 한발 물러나 침묵할 때 비로소 보이는 길도 있다.(p26)’며 토닥토닥 위로를 건넸다.

‘기대와 다른 결과 앞에서 우리 아이가 자신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부터 가르쳐줄 준비를 해야 한다.(p84)’라며 엄마로서 삶을 성찰하게도 했다. ‘부모도 아이와 보폭을 맞춰 함께 걷는다면, 아이가 자라는 만큼 성장할 수 있다.(p99)’하는 파이팅을 실어.


더 나은 삶을 지향하며 ‘결국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더 나은 내가 되는 걸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p154)’는 응원과 ‘주먹을 뻗기 전, 먼저 너의 주먹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꼭 생각하라(p156)’는 메시지로 방향성을 잃지 말고 본인의 길을 걸으라는 격려도 담긴 따뜻한 책이었다.


삶이 버거울 때는 쉬어가면서 ‘나도 모르게 빨라지는 삶의 속도를 다시 맞춰보라고 박자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p161)’ 읽는 내내 유홍준 교수의 말처럼 모든 것은 어쩌면 ‘아는 만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책은 텍스트보다 그림으로 이야기하는 요소가 많고, 글과 그림을 연결해서 나오는 시너지로 재생산되는 해석의 차이가 있다. 독자의 관점이나 처한 상황, 겪어 온 다양한 경험 등에 의해 무궁무진할 수 있고 견해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할 때 그림책이 읽고 싶어지고 공부가 더 풍요로워진다.


나는 해내야 하는 일 앞에서 마음이 동할 때 움직이지 않으면 다시 수행해야 할 근거를 못 찾다가 마감 시간에 맞춰 서둘러 마무리할 때가 더러 있다. 그러면서 적시에 미루지 않고 행동하는 게 중요하다 생각하지만, 매번 삶에서의 적용이 어렵다. 그렇지만 요즘은 이를 나의 ‘게으름’의 문제로 간주하고 자책하며 침잠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살다가 깨달은 것 중에는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어느 정도만 해낼 수 있는 일이 있고, 더 잘 할 수 있는 일도 있으며, 잘하지 못하는 일도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처음부터 전력 질주를 해서 인생의 마라톤을 완주할 수 없다. 저만의 페이스로 완급을 조절하고 때로는 멈출 줄도 아는 게 중요하다.

저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입가에 미소를 띠게 하는 작품도 많지만, 뼈아픈 현실을 선연히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다시 그림책 섹션 앞으로 발걸음을 옮겨 48권 외 소개된 책들까지 찾아 읽어 보려고 한다. 나만의 밑줄을 긋고 미소를 지을 쉼표가 필요할 때, 때때로 버거운 삶에서 숨 고르기가 필요할 때 바로 떠오르는 책을 만나면 좋겠다.


또 옆에서 한숨짓고 있는 누군가를 보면 외면하지 말고 함께 걸어가자고 기꺼이 손 내밀 수 있는 이웃이 되려고 한다. ‘선한 영향력은 당장 결과물을 얻을 수는 없지만 언젠가 반드시 열매를 맺거나 꽃을 피운다고 믿는(p44)’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p136)’을 나만의 방식으로 실천하며 살 수 있기 위해서 계속 고민할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마지막 장면처럼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라고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삶이길 소망해 본다.

#그림책꽃이피었습니다 #박세리 #이동미 

#이야기공간 #이야기공간출판사

#그림책에세이 #아이들에게들려주다위로받은그림책

#그림책이전하는위로 #어른으로살아가는우리를위로하는그림책

#엄마_여자_마흔을_위로하는_그림책48권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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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꽃이 피었습니다 - 아이에게 읽어주다 위로받은 그림책
박세리.이동미 지음 / 이야기공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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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 가까이에 나는 미완의 꿈을 위해 아동문학을 공부하고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수년 전에는 그림책 공부도 병행했었다. 잠깐 그림책 강사로도 살았었다. 그림책을 나름으로 연구하다 보니 그 세계의 오묘한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고, 아동문학의 한 갈래가 아닌 예술의 한 장르로 보기에 마땅하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글 쓰는 습작생의 자리로 되돌아온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작년부터 나는 그림에세이도 공부하고 있는데 나의 기록을 남기고자 인스타그램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야기 공간> 출판사의 “그림책 꽃이 피었습니다” 책 표지 색을 골라달라는 게시글을 봤다. ‘아이에게 읽어주다 위로받은 그림책’이란 부제가 퍽 마음에 들었다. 재취업과 퇴사 후 체력 이상으로 무너진 내면의 문제 때문에 꽤 오랜 기간 무기력에 젖어 있다가 정신 차리게(?!) 된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터라 게시글의 내용 가운데 어른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위로하는 그림책 48권이 담겨 있는 책이라는 문구가 뭉클하게 했다.

끌림에 의해 나는 흰 표지로 선택한다고 댓글을 썼었다. 이유는 흔하지만 질리지 않고, 어른으로서 살지만 삶을 지탱하고 지켜가야 할 동심이 바랜 빛이 아니고 오롯이 희었으면 해서라고 글을 남겼다. 또 나름 편집 디자이너로 밥 먹고 살던 시절을 상기해 제목이 선명히 다가오는 느낌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 간만에 그림책 덕분에 몽글몽글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엄마, 여자, 마흔의 인생은 내 삶과도 맞닿아있기에 어느 정도 공감하며 읽다가 ‘사는 거 별로 다르지 않구나!(p191)’라는 대목에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48권 그림책을 단지 소개로 그치지 않고 삶으로 연결 짓고 풀어가는 게 좋았는데, 특히 생업으로 글쓰기를 하는 두 사람의 첫 만남이 불편함에서 출발해 그림책으로 소통의 창구를 얻는 과정을 진솔하게 그린 프롤로그부터가 퍽 인상적이었다.(p12) 교차 형식으로 편집된 두 사람 글의 느낌은 미세하게 달랐지만, 생각의 결이 비슷하게 흐르는 것도 놀라웠다.

그간 애쓰며 살아왔던 삶을 ‘그림책은 현실의 나를 되짚어보게 했다.(p135)’

‘버겁고 힘들 때는 잠시라도 쉬어가는 것이 맞다. 한발 물러나 침묵할 때 비로소 보이는 길도 있다.(p26)’며 토닥토닥 위로를 건넸다.

‘기대와 다른 결과 앞에서 우리 아이가 자신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부터 가르쳐줄 준비를 해야 한다.(p84)’라며 엄마로서 삶을 성찰하게도 했다. ‘부모도 아이와 보폭을 맞춰 함께 걷는다면, 아이가 자라는 만큼 성장할 수 있다.(p99)’하는 파이팅을 실어.

더 나은 삶을 지향하며 ‘결국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더 나은 내가 되는 걸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p154)’는 응원과 ‘주먹을 뻗기 전, 먼저 너의 주먹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꼭 생각하라(p156)’는 메시지로 방향성을 잃지 말고 본인의 길을 걸으라는 격려도 담긴 따뜻한 책이었다.

삶이 버거울 때는 쉬어가면서 ‘나도 모르게 빨라지는 삶의 속도를 다시 맞춰보라고 박자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p161)’ 읽는 내내 유홍준 교수의 말처럼 모든 것은 어쩌면 ‘아는 만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책은 텍스트보다 그림으로 이야기하는 요소가 많고, 글과 그림을 연결해서 나오는 시너지로 재생산되는 해석의 차이가 있다. 독자의 관점이나 처한 상황, 겪어 온 다양한 경험 등에 의해 무궁무진할 수 있고 견해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할 때 그림책이 읽고 싶어지고 공부가 더 풍요로워진다.

나는 해내야 하는 일 앞에서 마음이 동할 때 움직이지 않으면 다시 수행해야 할 근거를 못 찾다가 마감 시간에 맞춰 서둘러 마무리할 때가 더러 있다. 그러면서 적시에 미루지 않고 행동하는 게 중요하다 생각하지만, 매번 삶에서의 적용이 어렵다. 그렇지만 요즘은 이를 나의 ‘게으름’의 문제로 간주하고 자책하며 침잠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살다가 깨달은 것 중에는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어느 정도만 해낼 수 있는 일이 있고, 더 잘 할 수 있는 일도 있으며, 잘하지 못하는 일도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처음부터 전력 질주를 해서 인생의 마라톤을 완주할 수 없다. 저만의 페이스로 완급을 조절하고 때로는 멈출 줄도 아는 게 중요하다.

 

저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입가에 미소를 띠게 하는 작품도 많지만, 뼈아픈 현실을 선연히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다시 그림책 섹션 앞으로 발걸음을 옮겨 48권 외 소개된 책들까지 찾아 읽어 보려고 한다. 나만의 밑줄을 긋고 미소를 지을 쉼표가 필요할 때, 때때로 버거운 삶에서 숨 고르기가 필요할 때 바로 떠오르는 책을 만나면 좋겠다.

또 옆에서 한숨짓고 있는 누군가를 보면 외면하지 말고 함께 걸어가자고 기꺼이 손 내밀 수 있는 이웃이 되려고 한다. ‘선한 영향력은 당장 결과물을 얻을 수는 없지만 언젠가 반드시 열매를 맺거나 꽃을 피운다고 믿는(p44)’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p136)’을 나만의 방식으로 실천하며 살 수 있기 위해서 계속 고민할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마지막 장면처럼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라고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삶이길 소망해 본다.

#그림책꽃이피었습니다 #박세리 #이동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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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있는 아이에게 말을 걸면 - 2023 세종도서 교양부문
변진경 지음 / 아를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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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엄마가 되면 모성애가 절로 생기는 줄 착각했습니다. 아이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노력해야 하는 사랑임을 아이를 키우며 절감합니다.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을 상기해 아동 인권 사각지대를 집어보며 제가 실천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보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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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까칠한 백수 할머니 - 마흔 백수 손자의 97살 할머니 관찰 보고서
이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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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대구대교구청 성직자 묘지 입구에는 "HODIE MIHI", "CRAS TIBI"라는 글귀가 벽돌 기둥 돌판 위에 새겨져 있다. 뜻을 알아보니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라는 라틴어라는데, 각 사람의 삶에 있어 사(死)는 순서를 정할 수 없기에 매 순간 성실하게 살아가란 뜻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책을 읽다가 백수 할머니의 굴곡 많은 인생이 옆에서 지켜보는 듯 그려지면서 이 글귀가 문득 떠올랐다.

"나의 까칠한 백수 할머니"는 '마흔 백수 손자의 97살 할머니 관찰 보고서'라고 부제가 있다. 백수(白壽)를 앞둔 노환으로 노쇠한 할머니를 일흔 가까운 어머니와 백수(白手)이고 비혼인 마흔의 손자가 좌충우돌하며 돌보는 간병기이다. 그 안에 작가가 이름 붙인 처음에는 글을 위한 닉네임인 줄 알았다가 실제로 그리 부른다고 해서 조금 움찔했다^^;; 피 여사의 인생과 그녀의 딸인 박 여사의 인생, 간간이 손자인 작가의 인생까지 녹아들어 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는 대략만 봐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일제의 수탈과 전쟁의 상흔으로 온통 얼룩졌던 강토가 지금 선진국 반열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격변했는지 보인다. 그 역사는 비록 이름도 빛도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어느덧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는 한 명 한 명의 역사가 모여 지탱됐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온갖 고초를 감내하고 격변의 시절을 관통하며 살아낸 한생의 기록은 그 자체로 유의미한 것이다. 또한, 껍데기를 깨고 나오듯 비로소 자신을 드러내는 글을 썼고, 이제는 높이 날아오를 이인 작가님께 진심으로 응원을 보내드리고 싶다. "나빌레라" 웹툰에서 덕출 할아버지가 채록이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해주는 말에서 빌려 옴^^


띠지를 빼고 표지 그림을 제대로 봤다. 반 잘린 골든 키위 배를 세 사람이 타고 있는데 작가와 박 여사는 뒤에서 관망하고, 한쪽 눈이 감긴 피 여사만이 열심히 숟가락 노를 젓고 있다^^; 풍랑이 제법 센 듯한데 애꾸눈 새가 숟가락 위에서 방향을 가리키고, 관망하는 둘은 그쪽을 보는 듯하다. 정작 노 젓는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길을 가는 것 같다. 세상에 대고 네가 뭐래도 나는 내 길을 가겠노라 외치며 가족을 지켜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아낸 피 여사의 강단이 엿보이는 듯하다.


팔순에 가까운 친정 부모님이 계셔서인지 그 시대를 더 오래전부터 겪어 오신 분의 이야기를 나와 비슷한 연배의 작가가 관찰자 시점처럼 썼다는 느낌에 호기심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읽을수록 작가가 사회를 바라보는 비관주의와 내 나름 고달팠던 개인사까지 투영되어 마음이 힘들어져 끝까지 읽어내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이 곧 당면할 현실이면서 우리가 곧 만날 미래이고 주변에서 비일비재하게 드러나는 노인 문제를 연출된 영상이 아니라 피부에 와닿는 표현으로 접해봐야 한다는 생각에 읽어가다 보니 어느새 미소를 짓기도 했고 깔깔대고 웃었다가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하고 주르륵 흐르는 물기를 닦아내기도 했다.

P16. 인생은 힘들다. 살려면 고통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자신이 살아온 나날을 천천히 되짚으면서 찬찬히 어루만질 때, 눈시울이 붉어지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우리들은 이리 치이고 저리 채이면서 삶을 헤쳐나간다. 하루하루 참고 견디다 보면 어느새 세월이 훌쩍 지나가 있다… 노인이 되면 젊어서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고통이 들이닥치는데… 외로움, 생계 곤란, 건강 악화, 배우자와의 사별, 자식 문제, 시대 변화 부적응 등등. 피 여사는 이 모든 걸 겪으면서 노후를 맞았다. - 1부 '우리는 모두 늙는다' 中

피 여사가 보행기를 끌고, 전화 외교(?!)를 하고, 과몰입해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등 점점 더 쇠약해 가는 면면을 너무 어둡지 않게 그린다. 읽다가 예전 한 프로그램에서 시골 어르신이 나와 "◇◇야, 나 테레비에 나왔다. □□네 집 아들은 ○○를 사 줬다는데… 그걸 꼭 사달라는 건 아니다." 하곤 손에서 뭔가 내려놨는데 옆에 세워진 자전거까지 홀라당 넘어가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아련하게 났다.

P82. 나는 허기를 해소하는 데만 급급해하기보다 상대가 어떻게 먹었는지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나는 타인과 함께 먹는 법을 익혔다. - 1부 '타인과 함께 먹는 법' 中

작가는 매사에 불평불만이 많고 식사마다 꼬투리를 잡는 까탈스러운 피 여사를 돌보면서 배려와 공감 등으로 진정한 가족 되기를 체득해 가는 것처럼 보였다. 반면 모녀간(피박 여사 사이)에 애증을 거론하며 가족이 오히려 서로에게 내상을 크게 입히는 관계임도 토로했다.

얼마 전 지인과 만나 "돌아보면 나의 하루하루는 너무나 파란만장한데, 이력서에 한 줄 쓸 수가 없다."라며 얘기한 적이 있다. 그러나 사회가 인정해 주지 않으면 어쩌랴. 매일의 내 삶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 친정엄마가 노상 말하듯 책 몇 권은 족히 쓸만한 이야기는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을까. 작가는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라는 속담이 있듯 피 여사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서라도 일대기를 정리해 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2부에서 피 여사의 험난했던 인생사를 주축으로 수직·수평적 가족사가 고루 그려졌다. 피영숙은 1925년에 태어났다. 자신보다 네 살 많은 언니 다음에 낳은 아들을 잃은 가정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태어났으나, 열병에 걸린 자신을 위해 어렵사리 약을 구해오신 할머니 덕분에 자신이 살았다며 할머니에 대해 좋게 회상했다. 비록 계집애가 학교 다니는 것은 마뜩잖아하셨지만.

가세가 기울어 서울로 이사하고 부모님은 서대문 형무소 앞에서 가락국수를 팔고, 본인은 정신대(위안부)에 끌려가지 않을 방책으로 피복 공장에서 군복을 만들었다. 이마저도 불안해 스무 살에 서둘러 시집을 갔다.

P129. 나는 피 여사를 통해 앞 시대 사람들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됐다… 왜 저렇게 옹고집에다가 억세고 난폭한 말투를 쓰는지 의아했는데… 그들의 우악스러움은 앞 시대 사회 환경의 반영이었다… 과거엔 빈곤이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었다… 죽음과 병치레가 일상이었고, 환자 없는 집이 없었다. - 2부 '행복과 고통의 총량' 中

시댁은 4녀 1남이었는데 콩가루 집안(?!)이었다고 했다. 그때 제대로 보살핌 못 받고 죽은 조카들을 두고두고 상기했다. 물론 당시 피 여사 시댁만의 어려움은 아니었기에 작가의 표현을 빌려 그 시절을 경유한 사람들의 모난 성격은 모진 세월을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P147. 공습과 폭격으로 한반도는 초토화되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고,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가족을 잃었고, 부상을 입었으며, 마음에도 공포와 불안이 각인되었다. - 2부 '이북 남자의 편지 공세' 中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얼마 뒤 남편의 주검을 찾다 극심한 후유증을 겪는다. 피난길에서 알게 된 평양 출신 남편과 재혼했다. 그리고, 박 여사를 전쟁 통에 낳았다. 새 남편은 소위 의처증으로 협박과 구타를 일삼았다.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지물포 가게도 하고 쌀장사도 했지만, 노름으로 탕진하고 큰 빚까지 졌다. 여러모로 피 여사를 고생시키다가 노환으로 죽을 때까지 참회하지 않았다.

피 여사의 수난은 계속되었는데 단칸방에 살며 연탄을 아끼려다 풍을 맞아 오른쪽 눈이 감기고 입이 삐뚤어졌다. 교회 계단에서 굴러 팔이 부러지기도 했다. 식모를 하다가 치료받고 회복되었던 입이 다시 삐뚤어지기도 했다. 의자에서 떨어져 갈비뼈를 네 개나 다치기도 했다. 그런데도 성치 않은 몸으로 바삐 움직이면서 친족의 출산마다 가서 도왔다. 특히 작가의 형제는 오래 돌본 듯하다.

P175. 가족 사이가 좋으려면 구성원들 각자 마음 수양을 줄기차게 하고, 타인에 대한 존중을 익혀야 하는 동시에 경제 형편이 어느 정도 괜찮아야 한다. 빈궁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가족 관계에 균열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둘 다 인생이 잘 풀리지 않았고, 건드리기만 하면 터지는 폭탄이 가슴속에 있었다. 둘의 충돌은 필연이었다…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서 지낸다는 건, 궁핍한 가정에서 큰다는 건, 참으로 서글프게 씁쓸한 일이었다. - 2부 '헐벗은 가슴으로 상처를 끌어안고' 中

머리채를 잡고 싸우기까지 한 사위와의 갈등으로 떠나긴 했지만. 작가의 아버지는 직장을 그만두고는 도박으로 큰돈을 날리고 술과 담배에 절어 살아가던 때였다.

작가는 주위에 날을 세운 체 십대를 외롭게 보냈다. 고2 때는 급식비를 아끼려고 식당 도우미를 자처했다. 피 여사와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쟁여 놓았던 외로웠던 기억이 자꾸 소환되어 마음을 아리게 했다.

제때 털어내지 못한 괴로운 감정 덩어리는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이런 마음의 생채기는 다소 늦더라도 드러내어 약을 발라 준다면 비록 말끔하게 없어지진 않아도 옅어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면 세상을 조금쯤은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P194. 나는 피 여사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을수록 더 나긋나긋하게 피 여사를 대했다… 겸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내가 불행하다고 해서 세상도 원래 불행한 곳이라고 단정 짓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는 작지만 소중한 희망의 변화들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들을 눈여겨보자고 다짐했고,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좌절과 허무와 분노로 숨 막혔던 내 마음에 조금씩 숨통이 트였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 2부 '내 처지가 지옥 같더라도' 中


3부는 인생이 힘겨워 마음이 무너져 내릴 때마다 피 여사의 버팀목이 되어준 핏줄들이 노년이 되어서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작가는 피 여사와 부대끼면서 묘한 안정감을 얻고 책임감이 생기면서 원초적인 인간관계인 가족에 대한 상처를 조금이나마 치유해 가게 된다.

피 여사는 언니, 남동생, 막내아들, 첫째 아들의 죽음을 겪는다. 쌓여가는 충격과 고통에 울부짖으며 기저 질환과 노화로 건강이 악화하여 갔다. 척추의 금과 신경성 위염으로 수술도 두 번 했다. 우울증까지 생겨 걸핏하면 울었다.

P254. 피 여사는 괜히 심술을 부렸고, 자주 고통스러워했으며, 누군가에 대한 원망을 쉴 새 없이 늘어놓았고, 더 이기적이 되었다. - 3부 '뼈만 남은 엉덩이' 中

거동이 불편하니 성인용 기저귀를 차야 하는 피 여사의 수시 호출로 잠이 부족해지고, 피로가 누적된 일상에서 점점 더 지쳐가는 장면이 고스란히 묘사되어 작가 모자가 피 여사를 돌보는 것이 위태해 보였다. 그나마 작가는 글을 쓰며 현실 도피의 방도를 찾긴 했지만. 두 모자는 수면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피 여사의 낮잠을 막으려고 애썼다. 수면제와 커피 두유(?!)까지 동원했지만 별 소용없었다.

P267. 낮에는 찾는 이가 없어서 외로워 졸았고, 밤에는 어둠 속에서 홀로 고통에 시달리며 잠들지 못했다. - 3부 '내가 언제 자는 거 봤냐' 中

P272. 피 여사라는 늙은 아기를 돌보면서 돌봄 노동의 버거움을 체험했다… 타인을 돌보는 건 자신의 생명을 나누는 버거운 노동이다… 생명력을 빼앗기는 기분이었다… 묘한 보람을 느꼈다… 누군가를 돕는 일은 즐거움을 빚어냈다… 피 여사가 새벽녘에 건넨 고맙다… 까맣기만 했던 나의 우주가 한순간 환해졌다… 언제인가부터는 거리를 두고 괴로움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인생의 고통이 어디에서 오고 어떻게 해야 그치게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으나 고통을 회피하기보다는 마주하는 힘이 생겼다. 고통을 마주한다는 건 결국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피 여사를 돌보면서 나는 내가 어떤 상태이고 어떤 존재인지 직면했다. - 3부 '고통을 마주하는 힘' 中

상황에 짓눌리지 않고 내면을 다져 가는 작가의 모습은 참 멋져 보였다.

피 여사도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정리해가는 모습도 보였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열거하라면 노와 애만 각인된 고달픈 삶이었지만, 코로나19라는 팬데믹의 시기가 피 여사에겐 어쩐지 전화위복이 된 셈인지 기적적으로 건강이 나아졌다. 역병 돌 때는 돌아다니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이 외출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란 위로를 준 게 아닐까.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그 안에 행복이 있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내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너나 나나 힘든 삶이지만, 약한 우리이기에 서로를 북돋우면서 하늘이 부를 때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가 보자.'라는 격려를 보내는 것 같았다.

패션 잡지 "얼루어" 8월 호에 오은영 박사님의 인터뷰가 실렸는데 이 책이 생각나는 대목이 있어 가져와 본다.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해 가기 위한 방편을 말하며 이어진 기자의 질문에 "가족이든 부모든 애인이든 친한 친구든 가까운 사람과는 마음을 나누면서 살기를 권합니다. 살다 보면 사람이 뿌리째 흔들릴 때가 있거든요. 그 순간을 버틸 수 있는 진짜 마지막 힘은 가장 가까운 사람, 특히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서 되게 좋았던 기억으로부터 힘이 생겨요. 엄마한테 제대로 혼날 줄 알고 잔뜩 웅크려 있었는데 엄마가 날 꽉 끌어안아준 기억 같은 거요. 아주 사소한 기억이요. 마지막 순간, 최소한의 나를 지켜주는 힘이 그 기억으로부터 와요. 생각은 모르는 사람과도 나눌 수 있지만 마음은 가까운 사람과 나눠야 해요. 가까운 누군가가 힘든 일을 말할 땐 굳이 해결책을 생각하지도 제안하지 말고 듣기만 하세요. 그거면 충분해요." 온 마음을 다해 들어주는 손자가 있기에 갖은 세파에 시달려 고단했던 피 여사의 인생은 이제 쓸쓸하고 외롭게 마무리되진 않겠구나. 가슴이 따뜻해져 왔다.

■ 한겨레출판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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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
김홍모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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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나 자해를 한 김동수씨 기사를 볼 때마다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책을 읽으며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함께 힘들었을 가족의 아픔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존자분들께 2014년 4월 16일을 결코 잊지 않고 있다고, 그러니 함께 살아가자고 마음을 건네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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