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세라
첫 전시회가 열린단 소식을 들은지 언젠데 이제야 답신을 보내는군. 부디 이 답신이 늦지 않았으면 좋겠어. 요즘엔 날짜 세는 습관도 잊어버리고 있거든.
점점 타인에게 관심을 가져줄 여유가 사라져 가고 있어. 사멸해가는 행성에서, 대기중의 산소가 희박해져 가는 현상처럼 말이야. 이래선 안 된다는 건 알지만, 나는 갈수록 낭떠러지로 내몰리는 심정이야. 당신의 사정도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닐 텐데, 어떤 말로도 미안한 심정을 다 전하지 못하겠군. 이해는 굳이 바라지 않도록 할게.
스스로 누드모델을 하겠단 결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듯해. 결과물이 너무 멋져서 놀라고 말았어. 특히 언니의 몸매는 정말 기대 이상이었어. 모델 경험이 전혀 없다는 말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어. 우아한 포즈를 자연스럽게 뽑아내니 감탄을 금할 수가 없더군. 정말 멋지다는 표현밖에는 할 말이 없어.
아무런 경력이 없는 사람을 통해 네가 원하는 감정을 이끌어 내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을 듯싶어. 네가 원하는 의도는 확실히 나타나고 있어. 나는 그쪽 분야에 문외한이지만, 설득을 해볼 상상만 해도 머릿속이 까마득해질 것 같군. 이 모든 결과물은 네 연출 역량을 한껏 증명해주는 거겠지.
그런데도 논란을 우려해서 다섯 점 밖에 출품을 못한다니. 이 나라의 미의식 수준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아. 대체 자매간의 누드가 무엇이 문제라는 거지. 포즈의 선정성을 논하는 기준이란 게 대체 뭐지. 난 오히려 관능미가 너무 절제되어서 아쉽다는 느낌인데.
너와 언니의 몸매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 지를 물었지. 네 사진 전반에 흐르는 관능미를 염두에 둬서 생각해야 할 것 같아. 마치 남미의 빅토리아 수련과 수선화의 아름다움을 비교하게 하는 질문 같아. 수선화의 희디희고 소담한 순수함보다는, 열대 꽃의 화려한 색채와 요염함이 여성미의 극치라고 보는 편이지만, 사람마다 취향은 제각각이니까.
다만 내가 놀란 것은 예상보다 언니가 아닌 네 몸매가 더 탄탄하고 육감적이었단 거야. 실명을 말해주지 않았다면 착각을 할 뻔했어. 아무런 정보도 없다면 누구나 다 똑같은 생각을 할 거야. 전혀 과장하지 않고 당신처럼 탱글탱글하고 새하얀 유방을 가진 여자를 아직 본적이 없거든. 정점에 찍혀 있는 붉은 유두는 케이크의 딸기꼭지를 보는 것처럼 앙증맞게 촉촉했어. 그 크기는 도무지 어떤 과일이나 사물에 비유를 해야 할까. 만지고 싶다는 욕정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어. 그걸 부정한다는 건 기만에 불과해
특별히 연기 지도 없이도 포즈 선정에 어려움을 겪지 않은 이유는 언니 역시 욕정을 느꼈기 때문인 것 같아. 혹은 질투심인지도 모르겠네. 욕정은 성별을 가리지 않는 법이거든. 욕정은 본질적으로 공격적이야. 시기심과 소유욕이 강한 법이지
안부를 물어왔는데 쓸데없는 서설이 길었다. 서문에 엄살을 조금 떨긴 했지만 사실 별반 어려움은 없어. 내 생활은 괜찮은 편이야. 고대도는 좋은 동네인 것 같아.
생각만큼 역사적 유적이나 고풍스런 건물이 줄지어 있지는 않아. 하긴 그런 지역이었다면 이미 관광명소로 유명한 동네였겠지. 인위적인 개발로 내가 기대하는 날 것 그대로의 역사는 사장되어 버렸을 지도 모르겠군. 비록 기대만큼 잘 드러나진 않지만, 어딘지 오래된 기억들을 많이 숨기고 있단 느낌이 들어. 아주 오래되고 어두운 기억들이 곳곳에 숨어있는 느낌말이야.
이 지역 건물들의 양식은 비교적 현대풍이지만 지탱하고 있는 자제들에는 세월의 채취가 느껴져. 어떤 건물들은 일제강점기 시대에 지어진걸 아직도 개축해서 사용하고 있는 듯해. 건축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정확한 설명을 못하겠지만, 지반이 상당히 무른 편이라서 그런지 이곳엔 철제 구조물들이 거의 없어. 부산이란 대도시에 속해 있으면서 2층 이상의 건물이 전무한 곳을 여행하게 되다니, 참으로 신기하기만 해.
내륙 강서구청의 토성동으로부터 13킬로미터, 가장 인근의 부속도인 절지도로부터는 4킬로미터 떨어져 있다고 여행책자에 나와 있어. 내가 묵고 있는 민박집은 주도에서 북쪽으로 1.5킬로미터쯤 떨어진 야산 둔덕에 있는데, 산 뒤편으로는 약 5천 평 정도 되어보이는 너른 대지가 펼쳐져 있지. 그곳의 야생적인 황폐함은 이루 형용하기 힘들 정도야.
향나무와 은사시나무가 주를 이루는데, 이름을 모를 잡목들과 함께 어지럽게 얽혀서 첩첩 덤불을 일구고 있어. 쓸쓸하고 황량한 들판이 쭉 이어지다, 마을과 경계를 잇는 부분에 우중충한 조명탑이 우뚝 솟아 있어. 그건 구 일본군의 막사가 폐허로 방치된 채로 있다 폭우로 무너져버린 잔해라더군. 해질녘이 될 때면 이끼로 뒤덮인 조명탑이 쓸쓸한 들판을 향해 컴컴한 그림자를 불쑥 드리우지.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면 나같이 무덤한 사람조차 은근히 소름이 느껴질 정도로 오싹한 풍경이야.
그래. 그 조명탑의 사단 마크 표식을 우연히 보고 우린 놀랐지. 오스트리아 예술가 모트의 작품속에서, 또 영국에서만 평생을 살았던 마스덴의 사진속 배경에 간간히 찍혀 있던 표식과 똑같았으니까. 스쳐가는 소품처럼 언뜻 보여지는 것이었지만, 우린 그것이 예술가들끼리의 교감 신호이거나 혹은 기막힌 우연의 일치를 넘어서는 무엇이 있다는 의혹을 품게 됐지.
오늘처럼 부슬비가 추적추적하게 내리는 날에는 그곳이 나를 은근하게 유혹해.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 축축한 잿빛의 상념에 젖어드는 것 같으면 조명탑의 머리에 있는 표식이 사악한 눈을 뜨는 것 같아. 북향에 걸린 마름모꼴 창문 너머로 음침한 달이 떠오를 때면 그것은 눈을 반짝이지. 달도 없는 밤에는 하얀 박쥐처럼 거대한 은빛 날개를 펼쳐. 그리고 검은 하늘로 비상하는 것 같아.
주민들은 왠지 이 장소에 대해서 얘기하길 꺼려하는 것 같아. 이토록 음침한 장소는 누구에게나 기피 대상이 되는 게 당연하겠지. 그럼에도 어딘지 이곳 사람들의 반응은 히스테리컬한 구석이 있어. 사람들은 외향포라는 이름 자체를 꺼내길 싫어하는 것 같아. 동단위의 행정 구역을 형성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면적인데, 이 장소의 개발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여.
그렇다고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는 무간지란 뜻은 아니야. 일본군이 떠난 후에도 막사나 요새 건물들을 개조해서 민박소로 운영했던 주민들은 몇 있었던 것 같아. 지금은 모두들 떠나버리고 황량한 폐가만이 남아 있을 뿐이지. 이윤이 나지 않는 사업일 수도 있고, 아주 개인적인 사정일 수도 있어. 하지만 뭔가 더 은밀한 흑막이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그런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어.
이 년 전 이 지역의 고고학 자료를 탐사한 후에 실종된 역사학자의 사건을 기억하지? 내 머릿속에서도 지워지지 않고 계속 맴돌고 있어. 그 사람도 표식이 뿜어내는 음험하고 주술적인 힘에 사로잡혔던 걸까. 한반도 구석기 시대의 기원을 더 높여서 새로 쓰게 할 만큼 놀라운 유적이 이 섬에서 발견됐단 기사가 나돌았던 일을 너도 기억하고 있을 거야. 이 조그만 섬이 어설프나마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사건이었으니까.
덕분에 서부경남권 신항만 사업의 진척에 차질이 예상된다느니, 강단에서 학자연 노릇하는 지리멸렬한 부류들과 마찰을 빚게 됐다느니, 하는 소식이 자자하게 퍼졌지. 하지만 주민들은 지역 개발도, 유적 발굴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 같아. 그저 자신들을 향한 외부의 시선을 쓸데없이 치부하고 귀찮게 여기는 분위기가 다분해.
역사학자의 돌연한 실종 사건이 터질 무렵부터 세상의 한켠을 차지했던 시시한 열기조차 완전히 사그라졌지. 어쩌다 내가 그에 대한 질문을 마주치는 사람들한테 꺼낼 때에는 질색하는 반응이야. 동네 사람들 모두가 외향포니, 구 일본군 기지 같은 단어를 입에 올리기를 꺼려해. 무엇보다 고대의 거석 유적에 대해 물어보면 얼굴이 샛노래져. 제발 그런 얘기는 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까지 하고 있어.
하지만 수수께끼와 의혹이란 억누를수록 더 크게 반발하는 법이 당연하지 않겠어? 보통사람도 그럴진대 나 같은 사람은 어련할까. 눈 만 감으면 케르눈노스 – 이 단어에 대한 설명은 차후에 하도록 할게 - 의 뿔과 머리를 간소하게 양식화한 그 사단의 표식이 어둠속에서 어른거려. 너도 인정했듯, 우연의 일치라고만 보기에는 너무나도 기이한 일치야. 어떻게 뿔에서 뻗어 나온 가시의 개수와, 토클(고대 켈트 문화권의 유적에서 자주 발견되는, 목에 거는 장신구를 뜻해)의 숫자까지 완벽하게 일치하는 표식이 네 개가 넘는 대상에서 동시에 발견될 수 있단 말이야.
심지어, 네 언니가 페루를 여행하다 어느 집시 여인에게서 시술받았다는, 그 왼쪽 쇄골에 자그마하게 새겨 놓은 앙증맞은 타투의 문양까지도 그 표식을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었잖아. 대체 그게 무얼 의미하는 걸까. 이토록 엄청난 우연의 일치가 가능한 거지?
저 무성한 덤불 숲 속 어딘가에, 그 고대의 거석 유적이 숨죽이고 있어. 오로지 내 눈에 발견되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아. 지금까지 주민들의 따가운 눈총과 무언의 압박에 눈치를 봐야 했지만, 이제 더는 내가 참고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숲속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지금 시간은 네 시 오십분이야. 다섯 시만 조금 넘겨도 오늘처럼 안개 짙은 저녁에는,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덤불 숲속은 어두울 거야. 탐사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진 않아. 내 안녕을 빌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