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그는 작가였다.
다섯 달 전 나는 그의 부음을 들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뜻밖의 소식이었다.
그때 나는 미술관을 서성이고 있었다. 초가을이라 다소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지만, 정오에는 햇볕이 여전히 강렬해서 바람막이 점퍼를 팔짱에 끼고 있었다. 2층 전시관의 좌측 마지막 코너에 들어서면서, 한 평 남짓한 공간에 전시된 몇 편의 화폭들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주류에 대한 현대의 저항을 담은 스타일에 싫증을 느끼고 있던 터라 그 사진들에 담겨 있는 의식적인 고풍스러움에 기묘하게 마음이 끌려버렸다. 사진가의 앵글에 잡혀있는 풍경들은 전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장소들이었는데, 거기에 담겨있는 역사성과 고전성이 이질적인 현실감을 포커스에 부여하고 있었다. 사이먼 마스덴을 의식적으로 모방하는 듯하면서 이계인의 시선을 훔쳐보는 듯한 역사적 괴기미와 흡사한 느낌이었다.
고풍스러운 괴기함만이 아름다움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 안에는 퇴폐적인 관능미가 함께 감돌았다. 피사체에 잡힌 여자 모델들이 관객을 응시하는 시선에서 헤아릴 수 없는 황홀감이 전해져 왔다. 나체의 모델들 모두가 역사속에 묻힌 깊은 어둠, 그리고 죽음과 악의 상상이 불러오는 미묘한 쾌감에 전신을 내맡기고 있었다. 그런 면은 크리스트 모트적인 분위기와 비슷한 상상을 불러 왔다.
흡사 역사에서 배제된 자들의 어두운 신화가 시각적 스토리텔링이 되어 내안의 지극히 사적이고 은밀한 곳에 숨겨진 상상력을 증폭시키는 듯한 착란을 일으켰다. 마녀들의 흑미사, 사탄숭배자들, 교외의 은밀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사악한 자들의 비밀스럽고 외설적인 제의에 대한 불경한 상상력을 끝없이 자극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림을 향해 손을 뻗었던 모양이었다. 보안요원의 경고에 화들짝 놀라고서야 정신을 차렸던 것이다. 한눈을 팔았단 사실을 깨닫고서야 내가 주술적인 힘에 사로잡혔단 사실을 속절없이 인정했다. 특히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소녀의 전경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소름끼치도록 날카롭고 기다란 손가락과 이빨을 소녀에게 뻗고 있는 사진이었다. 다섯 폭의 사진 중에서 가장 후작업을 많이 가한 인위적 작품이었지만, 거대하고 위압적인 배경에 압도당해 버렸던 것이다.
영혼을 탈취당한 듯한 얼얼한 기분이었다. 그런 감정에서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이 그림을 사고 싶단 말을 기계적으로 꺼냈다. 보안요원에게 내 꼴이 아주 우습게 비쳐진 모양이었다. 얼굴에 황당스럽다는 반응이 자연스레 드러났고, 웃음기까지 띠고 있었다.
그녀가 보안요원이 아니라 작품의 사진가라고 소개했다. 그 말이 이상스럽게 다소 안도감을 주었다. 마녀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주인이었단 사실에서 느껴지는 안도감이었을까. 적어도 눈앞의 여자는 사람이었다. 나이는 서른을 약간 넘긴 듯한, 백 육십 센티미터쯤의 키에 머리칼이 찰랑이는, 이목구비가 정갈하고 어느 한 부분 튀지 않게 평범했다.
거기에다 적잖이 애교와 사교성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그녀가 타준 모카향이 진한 커피를 마시는 동안 나는 입이 마르도록 그녀의 사진을 칭찬했다. 사회성이 없는 성격인 탓에 그 모든 말에는 사심이 전혀 없었다. 내 영혼에 – 나는 이 단어를 쓰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 격렬한 감흥을 불러오지 않았다면, 그렇게 과도한 칭찬을 할 이유는 전혀 없으니까.
“칭찬은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너무 과분한 것 같아요. 갤러리 측에서도 전시회는 허락해주겠지만 그림이 너무 어두운 탓에 팔릴 수는 있을지 걱정이라고 했거든요.”
과연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성이 강한 예술가의 비애가 전해졌다. 괜찮다면 나 혼자서라도 다섯 점을 다 사고 싶었지만, 사실은 한 점을 사기도 힘겨운 처지였다. 직장을 잃은 떠돌이 신세인터라 하루하루 연명하기도 어려운 사정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허세를 포기하기는 싫었다. 그녀가 눈치 빠르고 자상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허세의 무게에 스스로 짓눌려 버렸을 것이다. 적당하게 내 허세를 간파하고 체면을 살려준 덕에 나는 돈과 관련된 이야기는 두루뭉술하게 넘기고 보다 비평적인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사실 이렇게 깊은 관심을 보여준 것만도 고마울 따름이에요. 동기들 몇 명이 전시회 첫 날에 찾아와 준 것을 빼면 아무도 관심을 보이질 않았거든요. 이제서야 제 사진을 유심히 보아주는 유일한 한 사람을 만난 것만 해도 어디일까요. 사람들은 흡사 폐가에서 도망치려는 것처럼 제 전시 코너만 피해다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안목이 없군요. 아무리 저 마다의 취향이라지만 너무 하네요. 자존심을 건드릴까 저어되긴 하지만, 저는 사이먼 마스덴과 크리스트 모트를 떠올렸어요. 두 사람 다 흑백 사진만 찍는데 마스덴은 풍경만을, 모트는 인물을 부각시키죠. 하지만 둘 다 어둠의 암부를 잡아낸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마스덴이 역사의 암부라면, 모트는 무의식의 암부라고 할까요. 또 강렬한 광노출로 피사체를 담아내어 어둠과 빛의 대립을 극단화시켜 버리죠. 그 어두운 부분에 감춰진 야사들이 있을 것 같은, 자연스러운 스토리텔링을 이끌어내요. 그런 미스터리한 감정을 고조시키는 미학을 성취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어머, 크리스트 모트, 사이먼 마스덴, 그 이름들을 어떻게 아시죠? 실제로 제가 참조를 했던 작가들이거든요. 그 두 이름을 동시에 안다는 건 아주 어려운 일 같은데.”
그녀는 자신에게 두 사진작가를 소개해준 어떤 소설가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그 인연을 통해 내가 우연과 운명 사이의 길고도 기이한 진입로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지만, 나도 어렴풋이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내가 출판사에서 일하던 시절에 몇 편의 원고를 보낸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필명이 굉장히 독특했고, 적어도 내게는 완성도와 깊이에 울림이 있었다. 그럼에도 회사는 그의 원고를 무시했다.
나 자신의 미묘한 끌림 같은 것으로 다수의 논리를 이길 순 없는 것이다. 그런 류의 원고를 보내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다. 셀 수 없는 작가지망생들이 있고, 셀 수 없는 원고들이 밀려온다. 어떻게든 출간되어도 세상에 공개되는 원고들 대다수는 그저 잊혀버린다.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고 사라져간다.
‘아우터사이더’라는 다소 장황한 필명은 H.P 러브크래프트와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를 깊이 염두에 뒀을 것이다. 그는 경계보다 더 바깥에 있는 존재들에 대한 선대 작가들의 상상력을 즐겨 인용했다. 그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을 탐험하려 했고, 단어보다 더 깊은 지옥을 음미하는 듯했다. 실제로 만나본 적은 없지만, 그의 원고를 검토해본 내 인상은 그러했다. 사이먼 마스덴과 크리스트 모트란 인물들도 그 작가의 원고를 통해 접한 이름들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이름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 괴기소설가의 부고 사실을 그런 과정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그녀조차 그 소설가를 실제로 만나본적은 없다 하였다. 그래서 이주 전에 부고 메시지를 알림 받았을 때 느꼈던 감정을 지금도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그의 죽음은 아사에 가까웠다 한다. 굶주림이 동반하는 복합적인 질병이 여러 원인이 될 수 있겠지만, 직접적인 사인은 역시 굶주림이었다.
그녀는 유산상속인이 아니었지만, 고인의 유일한 지인이나 다름없어서, 보잘 것 없는 그의 유품을 소장하게 됐다는 것이다. 원고 몇 편이 들어있는 usb가 전부였다. 그리고 사이먼 마스덴과 크리스트 모트, 미쓰다 신조 같은 괴기 화가, 소설가들에 대한 감상평들도 있었다.
usb 소켓을 보여주면서 그녀는 내게 이 파일들을 가져가보기를 권했다. 죽은 자의 유품이란 사실에서 저어되는 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그때까지 인생이 내게 보여준 유일한 패는 우연이었다. 생이 반대 손에 쥔 운명이란 패를 슬며시 꺼내들 때, 이미 그것은 보이지 않는 끈을 당겨서 우리를 자기 쪽으로 끌어버린다.
그리고 죽은 자들 주위를 떠돌게 한다.
그가 남긴 유작중에 소설이라 할 것은 없었다. 투아다 데 다난01, 02. 누아다 아르케틀람01, 02 같은 단어로 표기된 일기장 비슷한 것들뿐이었다. 그는 특히 ‘누아다’란 단어에 굉장히 집착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노덴스’란 각주까지 첨가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일기장 곳곳에서 ‘태고의 인장’ 혹은 ‘불가역한 사악한 존재들’과 같은 표현들이 반복적으로 쓰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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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자료 조사와 경제적 사정 때문에 연재가 길어질 것 같습니다. 적어도 올해 안에는 끝내기 힘들 것 같네요. 북유럽 신화에 비해서 켈트 신화는 접할 수 있는 정보가 극히 적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