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니가 보고 싶어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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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역시 정세랑.

앞서 읽은 소설들에 비해서 가볍게 읽혀서 그런가 좀 아쉽긴 했다.
그래도 ‘와 이 작가 너무 글 잘 쓴다‘ 감탄하며 읽어내려갔다.


막상 재화와 용기의 에피소드에는 큰 애착이 가지 않았다. 결국 남녀의 로맨스라는 점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 듯 하다. 보건교사 안은영도 그랬는데? 하는 아쉬움이랄까.


재화의 소설들이 정말 예술이었다. 시사하는 바가 컸다고 생각한다.
정세랑 작가는 불편하지 않게 불편함에 직면하는 법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그 중에서도 나는 <항해사, 선장이 되다>라는 작품이 참 마음에 들더라.


‘기본 상수들이 변했다. 변수가 문제가 아니었다. 상수였다. 우주가 팽창하는 속도가 변했다. 존재하는 항로들이, 지도들이, 축적된 데이터들이 모두 쓰레기가 되었다‘ - 146p


우리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서 변화를 꾀하는 것들은 꿈에도 모르는 새에 모든 설정 값을 비틀어놓는다. 세대의 경험이 그렇고, 5년 내지 20년 안에 멸종할 인간이란 게 그렇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기후변화가 그렇다. 이에 대처하는 자세, 담담히 운명을 받아드리고 제 본부를 다하는 항해자의 태도가 인상적이였다.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 스치듯 생각했나?




용기의 몸 곳곳에 재화의 소설 마지막 구절들이 적히는 장치가 인상적이었다.
결국 각인되는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스치듯 지나간 사람이라도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어떻게든 연결되는 삶과 관계. 이 어려운 이야기를 정세랑이 풀어낸다. 정세랑이 해낸다! 피프티 피플과 닮은 두드러진 특징이 아닐까.

어떻게 이리도 톡톡 튀는 스파클링 같은 소재들을 생각해내는건지 정세랑, 그가 알고 싶다!! 메인 스토리와는 별개로 재화의 단편은 너무도 다양한 주제의 폭넓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점이 놀라웠다. 어쩜 이렇게 유쾌하고 재미질 수가 있지. 작가님 정말 팬이에요.

재화의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항상 누군가를(용기를) 죽이며 끝난다는 점이겠지만, 그 방법이 독자인 내게는 결코 난해하거나 거북하지 않았다. 죽음인데도 그랬다. 암울하고 어둑해보이지만 유쾌한 일상의 블랙코미디 같았다. 재화의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것도 같기에 오히려 나를 투영하며 읽었다. SF, 아포칼립스 등 장르를 오가는 다소 심란한 소설에서 왠지 모를 인류애를 느꼈다.

용기 특유의 인물 설정 재질이 뭔가 멍청하게 느껴져서, 괜히 귀여워서 유심히 봤다.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며 느꼈던 심정을 이야기 한 구절이 인상 깊어 첨부해두었다. 책임진다는 것보다야 자동 운전 모드로 사는 것이 어쩌면 속 편한 삶이 아닐까 아직도 유효한 생각이다. 머리 아픈 것은 질색하는 용기, 남주의 바람과는 별개로 거듭되는 문제들에 나도 꽤나 골치가 아팠다.

선이라는 인물도 개인적으로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제법 어른다운 어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용력 있고 따스하며 강단있는 여성. 충청도 사투리가 매력적인 그녀. 나도 이렇게 인간적인 인물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흐르는 메인 스토리가 머리에 남기보다는 인물을 오래도록 곱씹어보게 되는 것 같다. 이 책 형식 진짜 무슨 일 ㅠ 너무 이색적이고 특별하게 다가왔다. 개연성이라거나 맞닿는 지점들을 너무도 잘 살리는 것 같다. 작가의 강점이다.

다만, 앞서 읽은 작품들의 임팩트가 크기에 별달리 추가할 코멘트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재밌다. 멋지다. 잘생겼다. 다만 아쉽다. 빨리 읽혀서 좋았다.


연애는 도움이 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했다. 되도 않는이야기를 토해내고 나면 조금 괜찮아지는 편이지만, 언젠가이야기가 더이상 생각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제대로 기능하는 사회인으로, 독립적인 경제인으로 산다는 것은생각보다 대단한 일이며, 간절히 유지하고 싶은 상태이다.
- P55

엉망인 내부를 숨기면서 사는 건 모두가 마찬가지 아닐까? 뭔가 중요한 부분이 고장나버렸다면 더욱 들켜서는 안 된다. 안쪽에 나쁜냄새가 나는 죽은 것들이 가득하다는 걸 상대가 알아버리면바로 도망치고 말 테다. 용기가 그랬던 것처럼.
- P55

나는 오늘도 네 좌표를 알지 못해, 우리의 좌표가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알지 못해. 네가 나빴는지, 내가 나빴는지,
우주가 나빴는지 알지 못해. 그렇게 말할 필요가 있었다.

재화는 정말로 우주선에 있을 법한 작고 딱딱한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발끝이 시렸다. 잠결에 엔진처럼 무언가 허밍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았다.
- P150

병원에 갔다 오느라 수면 시간이 부족했다. 언제쯤이면 야간 근무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요원했다. 팀장급은 되어야 그럴 수 있을 텐데, 용기는 팀장이 되기 싫었다. 다른 사람을 책임질 만한 그릇은 못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지시받는 일만 하고 자동운전 모드로 살고 싶었다. 그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란 걸 알면서도.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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