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의 삐삐 책방에서 사들고 온 ‘보건교사 안은영‘.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유명한 책이었는데, 유독 이런 판타지? 비스무리한 장르 소설에는 워낙 일가견이 없는 사람이라 여태껏 주저해왔다. 언젠간 손에 쥐어지리라 여겼는데 그게 바로 오늘일 줄이야.

책방지기님의 추천으로(엄청 흥미진진한 줄거리 설명에 홀라당 넘어가버렸다!) 에라 모르겠다 질러버린 이 책. 생각보다 정말 가볍게 읽혔다!

서점에서 일하며 호기심에 몇 장 펼쳐보며 ‘난해하기 그지 없네‘ 생각함과 동시에 책장을 덮었던 기억이 난다. 어후. 무지하고 편협하기 짝이 없는 그 놈의 고상한 취향은 틀림없는 내 것인데, 가끔 이렇게 쓸 데 없는 고집을 피울 때가 있다. 이제서야 깨닫는다. 편협과 무지와 편견으로 가득한 내 뇌의 구조가 궁금해진다.

마음 같아서는 은영의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알로 이 고상함들을 다 말살해버리고 싶은데 말이다.

사실 감상적이고 마음을 울리는 감동적인 소설들을 주로 읽어왔던 유년시절의 영향 탓인지 유독 이런 장르 소설에는 거부감을 느꼈던 터라, 언제나 요즘 소설들의 정서나 분위기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을 깊게 느낀다. 이제서야 나도 열 여덟이 되어가며 세상의 현실과 마주하고 마냥 따스한 사람들과 이야기들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지만. 시작했지만 나도 내가 왜 유독 문학에서는 눈물이 핑 도는 따스함을 갈망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젊은 작가 시리즈는 언제나 내게 차갑고 허구적으로 다가오면서도 무어라 말 할 수 없는 트렌디함과 독특한 세계관들이 돋보이는 흥미로운 책들이다.

버스에서부터 저녁을 먹기까지, 팬텀싱어의 시작과 끝을 모두 보면서까지 이 책을 놓고 싶지 않았다. 네 시간 남짓, 훌쩍 넘어가버린 페이지 수가 괜시레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허무맹랑한 로멘스가 아닌, 어딘지 모르게 엉뚱하면서도 독창적인 인표와 은영만의 사랑이 돋보였다. 꼭 두 남녀의 사랑 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이어진 세상에 대해(사랑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랑이 가지는, 친절이 가지는 힘에 대해, 정의에 대해 이야기 하는 듯 보였다.

이렇게 말하니 감성 착즙단의 수장 같지만, 정말 그랬다. 은영의 의무감과 책임감.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좀처럼 잘 품기란 어려웠을텐데 기꺼이 자신을 받아들이는 은영. 그 운명을 통해 친절을 베푸는 이 당찬 여성 히어로에 대해서는 정말 오장육부로 박수를 쳐 주고 싶을 만큼의 쾌감과 존경심이 떠올랐다. 틱틱대며 할 건 다 해주는, 기충전 담당 인표 또한 현실에 있을 법한 캐릭터였다.

보는 내내 피식피식 웃었던 기억이 난다. 터무니 없음과 툭 내뱉는 듯 하지만 잘 정제된 적당한 유머러스함이 읽는 이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드라마화 된다고 하는데, 이런 장면들 가능하려나 하며 읽느라 몰입에 조금 방해가 되었다. 원작의 재미는 절대 못따라 갈 듯 하다. 읽으며 그것만은 확신했다.

주인공들 뿐만 아니라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과(주로 학창시절과 관련된) 어딘지 모르게 모자라보이는 매켄지의 하찮음까지 너무 재미난 포인트들은 넘쳤다.

나도 보건교사 안은영을 찾아가서 내 끊어진 발목의 원인을 규명 받고 싶었다. 내게도 옴이 붙은 것일까?! 위 절제술을 한 백혜민 덕에 원인이 옴인지는 알 수 없겠지만 어찌 되었든. 그들이라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인간에게선 느낄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을 상상하게끔 했다. 해결하는 과정에서의 인간미는 있지만 말이다.

은영과 인표가 알고보니 한 쌍이었고, 든든한 파트너이자 기충전 메이트라는 사실이 뒤로 갈수록 선명해지니 흥미진진 했던 것 같다. 아 유쾌한 소설. 재미난 환상.

왠지 베스트 서가는 읽고 싶지 않았다. 오기 때문일까 내 안목이 대중의 픽보다 믿을만 하다고 생각해서 일까. 이제야 막 아무데나 손 뻗어보기 시작한 자식이 쓸데 없이 존심만 세서 탈이다. 베스트 서가에 있던 ‘시선으로부터,‘도 기꺼이 도전해보고 싶은, 정세랑 작가의 매력과 센스가 가득한 책이었다.




"나? 너보다 훨씬 고급 능력자. 그렇게 첨벙첨벙 다 잡아없애고 돌아다니면 뭐 해요? 돈 되는 일을 해야지."

문득 아주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마음의 한 부분이 잠시 경련을 일으키듯 움직였다. 은영도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위험하고 고된데 금전적 보상이 없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은영의 능력에 보상을 해 줄 만한 사람들은 대개 탐욕스러운 사람들이었다. 좋지 않은 일에만 은영을 쓰려고 했다. 아주 나쁜 종류의 청부업자가, 도무지 되고 싶지 않았다. 은영은 다른 종류의 보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가, 어느새부터인가는 보상을 바라는 마음도 버렸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친절함을 버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은영의 일은 은영이 세상에게 보이는 친절에 가까웠다. 친절이 지나치게 저평가된 덕목이라고 여긴다는 점에서 은영과 인표는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만약 능력을 가진 사람이 친절해지기를 거부한다면, 그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치관의 차이니까.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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