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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비 온 뒤를 걷는다 - 눅눅한 마음을 대하는 정신과 의사의 시선
이효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4월
평점 :

보통 의사가 쓴 책이라고 하면 독자들은 다양한 환자를 만나고 치료하는 에피소드를 기대한다. 심지어 이 책의 저자는 돌발상황이 많이 발생하는 정신과, 그 중 만성 질환인 조현병을 전문으로 진료한다. 하지만 프롤로그에 쓰여 있듯 이 책은 의사라는 직업을 설명하는 도서가 아니다. 혹은 건강 관리나 심리학 메뉴얼을 담고 있지도 않다. 그저 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담겨 있다. 그런데 그 시선은 따뜻한 구석이 많아 보인다.

일을 하며 만난 사람들과 그 만남을 통해 배운 것.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과 아쉬운 마음을 책에 담았다.

만성 정신질환으로 치료받는 환자들은 '비 온 뒤' 의 눅눅한 시간들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비 온 뒤의 길은 사실 우리 대부분이 걸어가는 그 길이다. 우리 역시 조금이라도 삶이 나아지기를 바라며, 세상의 눅눅함을 견뎌내고 있다.
정신질환자들을 만나며 느낀 다양한 감정과 사회적 문제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통찰은 우리가 정신없이 걷는 걸음을 잠시 멈추어 생각하도록 만든다.
"정신과 의사에게는 그가 근무하는 ‘방’ 이 세계다. 결국 그 방에서 만나는 사람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바라보니 그러하다. 의사라는 집단은 어찌 보면 ‘세상물정 모르는 백면서생’ 들로 구성된 것 같지만, 모두들 직업이라는 창으로 세상을 보듯, 의사도 환자를 통해 보게 되는 세상이 적지 않다."
내게 의사는 흰 가운에 다소 딱딱한 말투로 진료를 보는, 따뜻함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이다. 요즘은 유투브나 SNS로 소통하는 의사들이 많긴 하지만 여전히 친숙한 느낌은 아니다. 그런데 이 의사는 환자에게서 세상을 배운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치료하는 환자들로부터 배운 세상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의 이야기에서 세상은 때로는 따뜻하고, 눈물겨우며, 또 화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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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겪는 여러 상황들을 정신의학적 해석으로 풀어 놓은 챕터들이 공감이 많이 됐다. 그 중 몇가지를 소개하려 한다.
<급할수록 버스에 두고 내리자>
나는 굉장히 특이한 습관을 갖고 있다. 시험기간에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을 하며 암기를 하는 것이다. 단순암기가 필요한 과목들의 경우, 핸드폰에 한 장으로 정리해 간 후 러닝머신을 뛰는 30분 동안 계속 반복해서 외운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책상 앞에서는 그렇게 어렵던 공부가 척척 된다. 이 챕터에서 내 오래된 의문이 풀렸다.
나는 ‘반드시 지금 해야 할 일을, 생각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옮겨보는 것'’을 하고 있었던 거다. 저자는 급한 기획안을 처리해야 할 때 무작정 고속버스를 타는 경우를 예로 들었다. 버스에 탄 2시간은, 기획안을 쓰는 시간이 아니라 여행을 가는 시간이니까 마음이 가벼워 지는 거다. 그러면 ‘안 해도 되는 기획안 생각을 해 볼까..?’ 라며 자연스럽게 아이디어가 나오게 된다.
<듣는 마음을 미루어 짐작건대>
현대 사회는 더 이상 소수자를 웃음거리로 삼거나 차별하지 않는다. 장애인을 비하하는 욕설, 단어들의 사용도 지양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입에서 아무런 거리낌없이 언급되는 한 단어가 있다. ‘미친놈/년’ 이다. 나는 ‘미쳤다’라는 표현이, 조현병 같은 정신질환자들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자각을 처음 하게 되었다. ‘미친 가창력’ ‘떡볶이에 미쳤다’ 등 일상생활에서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것 조차 그것을 듣는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가 되는 혐오발언일 수 있었다. 생각치도 못한 말에,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참는 자에겐 식은 핫도그가 남나니>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인내한 아이들이 성적도 좋고, 사회적 성취도 좋았다는 결론의 '마시멜로 실험' 은 너무도 유명하다. 하지만 저자는 이 실험을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인내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줄 여력이 있는 가정환경’ 이 보장될 때만 결론이 유효하다는 것이다. 당장 먹을 음식이 없는 흑인 저소득층 가정의 아이들에게는, '만족 지연'이 굉장히 비합리적이다. ‘꾹 참고 버티면 좋은 날이 올거야’ 라는 말이, 항상 옳지는 않다. 때로는 순간의 만족을 위해, 따뜻한 핫도그를 베어 무는 것도 좋은 선택일 수 있다. 개개인의 상황은 너무도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말이 놓이는 자리>
"우리말의 존댓말과 반말은 오묘한 재미를 주기도 하지만 세대 간의, 직책 간의 명확상상하 관계를 만들어 사회적 발전의 한 장애물로 비난받기도 한다. "
나는 언어가 사고방식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존댓말과 겸양표현이 없는 영어로 내 생각을 표현하고, 사람들과 의견을 교류할 때 더 솔직해진다. 예전에 영어 회화 학원을 다닐 때 우리 반은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학생들이 있었다. 상하관계가 없는 영어라는 언어로 공감대를 형성하며 편하게 대화하다 보니, 세대차이나 나이에서 오는 불편함은 전혀 없었던 기억이 났다.
<영국 왕을 모셨지>
세상에, 이 정신과 의사는 문학적 소양까지 뛰어나다. 저자는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 <<영국 왕을 모셨지>>를 인용하며 자신의 현재 모습을 되돌아보고 있다.
"필요 이상으로 빤히 들여다보이는 나의 얄팍함. 그 안에 자리 잡은 내 이기심, 공명심, 열등감… 우리의 주인공인 그 웨이터, 그는 갱년기의 정신과 의사를 꼭 빼닮았다."
책을 읽는 내내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예리한 통찰력, 환자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 등 완벽한 모습만 봐왔던 지라 조금은 의외였다. 이 사람도 시기와 질투를 하고, 또 자책도 하는구나 라는 생각에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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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독자에게 여러 고민을 털어놓는다. 환자의 삶에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지, 어떤 위로를 해야 하는지 등의 직업적 고민일 때도 있고, 세월호 같은 비극적 사건의 트라우마나 난민 문제, 혹은 세대 간 갈등 등의 사회적 고민일 때도 있다. 그리고 책을 읽어나가며, 따뜻한 세상을 위해 함께 고민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가 나아갈 길이 비 온 뒤의 눅눅한 그 길이라도, 함께 걸어간다면 버틸만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