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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커서 바다표범이 될 거야 ㅣ 풀빛 그림 아이 50
니콜라우스 하이델바흐 글.그림, 김경연 옮김 / 풀빛 / 2015년 5월
평점 :
니콜라우스 하이델바흐의 작품 '난 커서 바다표범이 될 거야'
볼로냐 리가치 상부터 시작해 다양한 어린이 책 상을 수상한 작가의 책이다.
흔히 아이들의 동화를 읽게 되면 거의 모든 이야기들이 해피엔딩으로 끝을 마무리를 한다.
동화를 많이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한국이나 일본의 전래동화들 역시 대개 그렇다.
그 이야기들은 모두가 다 어른들에 의해 만들어져 있기도 하거니와
어른들의 세계를 미니어쳐로 만들어 그 모양 그대로 아이에게 옮겨진 것일 뿐이고
이야기 속 아이들의 미래 역시 '이거야'라고 확정된 것들 뿐이다.
그런데 서양의 동화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
물론 신데렐라나 백설공주같이 여성성을 필요로 하는 동화들도 있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이들 동화 역시도 잔혹동화가 원래의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원작 동화를 처음 접했을 때 느꼈던 그 당혹감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같다.
하지만 내가 그들의 동화에 점수를 주고 싶은 것은 바로 끝이 열려있는 동화의 세계...라는 거다.
미래는 이럴 것이다라고 단정하는 우리네 동화와는 사뭇 다르게 그들이 생각하는 아이들의 미래는
언제나 열려있다.
니콜라우스 하이델바흐의 작품 역시 그런 차원이다.
이 책을 보면서 내가 갑자기 떠오른 우리나라의 동화는 바로 '선녀와 나무꾼이야기'.
아! 그런 동화겠구나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그렇게 끝나버리는 동화가 아니라는 것...
그림에서 보다시피 책의 주인공은 아주 어린 아이다.
엄마, 아빠와 아이 셋이 산다.
아빠는 어부, 엄마는 주부, 아이는 그냥 아이..
아이의 이름조차도 나오지 않는다. 그냥 아이다. 누구의 아이도 될 수 있다.
물을 좋아하는 아이의 놀이터는 크고 넓은 바다.
이렇게 그들 가족 셋은 어느 바닷가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
아마도 태어났을 때부터 그렇게 살았는지도 모른다.
아이에게 바다는 어느 놀잇감보다도 커다란 즐거움을 준다.
아이의 놀이는 바다 속의 모든 것들이 다 즐거움이다.
저자는 글과 그림을 통해 아이가 얼마나 바다를 좋아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물에 뛰어들고, 수영하고, 물장구치고.....상상하는 것이 즐겁다.
엄마는 집안 청소와 음식을 만드는 일 그리고 아이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일이 대부분이다.
아빠는 먼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는 어부다. 그래서 며칠 씩 집을 비우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엄마를 도와주는 사람은 오로지 아이뿐이다.
엄마를 도와주는 일이 끝나면 하루 종일 바닷가에서 놀고 있는 아이..
우리네 같으면 벌써 엄마가 쫓아와 '그런 곳에서 혼자 놀고 있으면 위험하니 가지 마라'고 말할 것 같다.
아이는 혼자 놀다가 집으로 들어올 때면 바닷가에서 주은 것들을 가지고 와 엄마와 이야기를 나눈다.
그럴때면 엄마는 바다 속의 이야기를 자세히 아이에게 들려준다.
아이가 몰랐던 세계 조차도 엄마는 눈에 그리듯 말한다.
그러면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가 하는 이야기의 세계에 빠져든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엄마가 아이는 그저 놀랍기만 하다.
저자는 엄마와 아이의 대화를 그림을 통해 표현한다.
한 장에 끝나지 않고 책장을 넘기면서 이어진다. 꼭 바다에서 파도가 일렁거리며 넘실대는 듯하다.
그렇게 보이게 만든 구성이 참 맘에 든다.
'어부의 아내는 헤엄을 치면 안된다'
이 말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이야 부부가 함께 배를 타는 집들도 많이 생겼지만 예전 우리네 어부들도 역시
여자를 배에 태우면 안된다는 속설이 있었다.
바다가 노한다나? 어쨌든..
동양이나 서양이나 여자가 그러면 안된다는 속설은 비슷한가보다.
엄마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아이는 바다에서 노는 일을 멈출 수가 없다.
그만큼 바다가 좋은 아이다.
어느날 저녁 아이는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날이 있었는데
그 사이 밖에서 들어오는 아빠의 손에 들려진 짐을 보게 된다.
무언가 반짝이는 물건이었던가 싶다.
아빠가 몰래 숨겨둔 것이 궁금해진 아이는 엄마가 청소하는 사이 그 물건을 찾아낸다.
바다 표범의 가죽이다.
바다 표범에 대한 이야기는 엄마한테 들은 적이 있다.
육지에 올라오면 바다표범은 가죽을 벗고 인간이 된다고 하는..
저녁을 먹고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이는 엄마에게 수수께끼를 낸다.
땅에도 살고 바다에도 살고 걷기도 하고 헤엄도 치고..그런 것이 무어냐고..
정답을 모르겠다는 엄마에게 답을 말해주면서 아이는 아빠가 그것을 가지고 있으니
당연히 아빠가 그런 사람일꺼라 말한다.
그러나 엄마는 누구나 가지고 있을 수 있는 물건이라며 말하곤 아이를 달래 재운다.
다음 날 아침 엄마가 없다.
아빠가 돌아오자 엄마가 없다는 것을 말하니 아빠는 급히 가죽을 찾는다.
엄마가 바다로 돌아간 것이다. 아빠가 아니라 엄마였던 것.
엄마인지 아닌지는 글이 말해주진 않지만 당연히 엄마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는 이제 더 이상 엄마를 볼 수 없다. 가끔씩 고등어 몇 마리가 바위에 올려져 있을 뿐이다.
아이는 크면 되고 싶은 것이 생겼다.
어부가 되거나 바다표범이 되고 싶다는...
동화는이렇게 끝이 난다.
이제 어디에도 엄마는 없다. 어른들이라면 엄마가 바다표범이겠거니 하고 끝이 날꺼다.
그러나 아이들이라면? 어디에도 없는 엄마의 존재를 느끼고자 계속해서 생각할지도 모른다.
남아있는 아이를 달래주는 건 아빠 밖에 없다.
커서 되고 싶은 게 생겼다는 아이의 꿈은 어쩌면 엄마를 만나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부가 되고 싶기도 하고 바다표범도 되고 싶은거다.
막상 꿈을 말하라면 우리는 아이에게 무엇을 기대할까?
아이의 소박한 꿈에 우리는 '그것밖에 안되니? 좀 더 멋지고 희망적인 꿈을 꿔!'라고 말할 지 모른다.
그러나 작지만 소박하고 빛나는 그리고 이룰 수 있는 꿈을 꾸는 아이들이 더 멋진 건 아닐까?
그것을 하나 하나 이뤄나갈 때 더 기특하지 않을까?
선녀와 나뭇꾼처럼 다시 만나 잘 살았다는 이야기보다
나는 이 아이가 커서 엄마를 만나게 될 지 아니면 어부가 될 지 아니면 다른 무엇이 될지..
그리고 이 아이와 아빠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다른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것들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어른들의 꿈으로 아이의 미래를 확정짓지 말고...
아이가 그리는 미래를 같이 꿈꿔 나가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학원에, 과외에 숨막혀하는 조그마한 아이들이 참으로 가엽게 느껴지는 지금이다.
그 아이들의 꿈은 진정한 자신들의 꿈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