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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라이프
가이 대븐포트 지음, 박상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7월
평점 :
스틸라이프 - 가이대븐포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질서는 그 자체로는 사소한 것들을 무작위로 모아 놓은 것이다."
- 헤라 클레이 토스
스틸라이프는 미국 작가 가이대븐포드의 미술사와 자연사, 고대 그리스 문학과 현대의 대중소설, 고대-중세-현대의 시간대 등을 넘나드는 콜라주적 에세이이다. 대게 정물에 대한 사유를 적고 있다. 정물은 밀의 경작과 와인의 숙성을 통하여 자연이 주는 풍요로움을 예찬하는 방법이였다. 음식이 놓이는 시간, 구한 음식을 먹기까지의 시간으로 해석되며, 인간은 정물과 함께 문명으로 나아가기를 거듭했다.
"우리는 식사 전에 손과 식기를 깨끗하게 하고, 식탁 중앙에는 꽃 장식을 놓고, 식사가 대화를 수반 하는 사교 모임이 될 수 있다는 생각들을 유지해 온 것이다. 정물화는 그런 맥락에서 문명의 장으로서 식탁을 지켜 왔다."
17세기 네덜란드는 황금기를 맞는다. 식민지 개척을 통한 활발한 해상 무역으로 외교, 경제 그리고 문화의 모든 면에서 막대한 부를 쌓은 네덜란드는 유럽 경제의 중심이 된다. 30년 독립전쟁에서 승리해 스페인의 지배에 벗어나게 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국교였던 가톨릭이 아닌, 칼뱅파의 개신교를 받아들인다. 이러한 당대의 배경은 네덜란드의 주류가 될 예술 장르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네덜란드가 새롭게 받아들여 퍼진 칼뱅파의 교리는 검소함을 제일로 내세웠다. 우상숭배 등을 이유로 종교화 제작을 전면 금지했고, 성서나 신화적 그림이 속한 역사화도 당연히 그릴 수 없게되었다. 주문을 의뢰받아 작품을 제작해왔던 화가들은 이러한 사회적 상황 속에 고민에 빠지고 네덜란드 사회에 적절한 그림을 탐색한다. 그리고 끝내 해답을 발견한다.
황금시대였던 만큼 부유한 시민들은 자신들의 집에 걸어놓을 수 있는 비교적 작은 크기의 그림을 찾았고, 그것은 또다시 종교적 속성과 맞물린다.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사람들은 작품 의뢰 당시 (부)가 직접적으로 나타나길 바랐다. 하지만 금욕을 주장했던 신교의 교리와는 상반되었고 작가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지만, 그 끝에 비로소 네덜란드 만의 독특한 정물화가 탄생하게 된다.
물질적 풍요로움을 그리면서도 동시에 인생의 무념무상, 덧없음을 담아내는 것 바로 '바니타스 장르화'의 시작이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바니타스는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매일의 삶과 그런대서 오는 인간의 허무한 감정, 가치 없음을 뜻하는 라틴어로 우리의 인생에 항상 자리잡고 있는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아무리 부유한 삶을 산다한들 죽음 앞에서는 모두 다 부직없는, 세상적 이치의 필연성을 예술가들은 정물화 안으로 끌어들였다. 세상적 이치의 필연성을 예술가들은 정물화 안으로 끌여들었다. 예술가들은 '교훈적 주제'를 전파하는 역할에 앞장 섰고, 시대적 흐름을 대표하는 화풍으로써 주류가 아니었던 정물화를 택했다. 그 결과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의 상황을 지각하게 하면서, 예술의 평등함 또한 끌어냈다.
그려진 물건과 음식은 모두 유한성을 띄고 있다. 깨져버리기 쉬운 유리의 속성, 금방 상해버리는 음식과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회중시계가 유한한 속성을 대변한다. 현재의 쾌락과 사치, 좋은 것들은 소모적이며, 찰나의 순간만 선사하기 때문이다. 항상 염두에 두진 않지만, 우리의 끝은'죽음'이며 그것은 세속적 삶과 대조된다. 사물에 반사되어 아름답게 반짝이는 빛은 그 의미를 감추려는 듯 더욱 찬란하게 빛난다.
<책 속에서>
그가 그린 사과 그림 속에 배와 함께 다른 상징들 에로스의 동상, 시계, 전체적인 평화로운 느낌, 시골 부엌의 소소한 아름다움이 등장하는데, 이 모든 것은 평온함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정물화는 이런 비전들 중 하나의 상징일 듯하다. 하나는 가을의 수확을 꿈꾸고, 우리가 거기까지 관리해 가는 과정과 우리와 자연과의 관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다른 하나는 자연이라는 기반에 따른 건축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 시대에 따라 그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변한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다.
정물은 사람을 읽고, 먹고, 와인을 마시고, 음악을 연주하고, 대화하는 문명화된 집 안에 어떤 공간이 있다는 것을 상정한다.
정물화에 영원히 등장하는 소재 중 두 가지가 빵과 와인이라면, 정물화는 밀의 경작 와인의 숙성과 함께 시작하는, 완만하게 부푸는 거대한 파장의 일부다. 이는 문명과 공생하는 예술이다.
음식을 구하고 구한 음식을 먹기까지 그 사이의 시간이 있다. 음식이 어딘가에 놓이는 시간이다.
오직 형태 패턴에 의해서만 말이나 음악이 정적에 닿을 수 있는가 중국의 항아리가 아직도 그 정적 속에서 영원히 움직이듯,
우리가 해야할 질문은 피카소가 왜 <아비뇽의 여인들>에 사과와 배를 그렸는지가 아니라 피카소는 사과와 배를 그릴 때 어떤 느낌을 가졌는지가 될 것이다.
진실을 보는 한 가지 방법은 대상을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익숙한 것을 에니그마 (수수께끼)처럼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