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끼리는 왠지 모르게 그렇다. 생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한테는 쉽게 꺼내어지는 표현들이 어쩐지 민망해지고, 어색하다. 어쩌면 가족이라 더 그런지도 모른다. 부딪히고, 화내고, 뚱한 얼굴로 식탁에 둘러 앉아 밥을 먹곤 얼렁뚱땅 넘어간다. 그렇게 살아가다 문득, 가족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가령 이른 아침, 냉장고 문짝에 붙어있는 엄마의 쪽지, '딸 좋아하는 참치 김치찌개 해놨어. 맛있게 먹고 오늘도 좋은 하루~~' 같은 것. '밥 굶지 마라' 아빠의 카톡과 용돈. 짧은 텍스트에서 나를 사랑하는 가족들의 마음과 사랑이 느껴진다. 가족을 향한 글이란 그런 것이다. 거창한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어마어마한 크기의 사랑이 느껴진다.
'빅토리 노트'는 엄마가 나를 낳은 날로부터 내가 다섯 살 생일이 될 때까지 쓴 육아일기다. 나는 이 놀라운 책을, 대학 시험에 낙방하고 상심해 있던 어느 날 저녁 엄마로부터 받았다. 엄마가 어딘가에서 꺼내 내게 건네준 100페이지 남짓의, 20년이 지나 종잇장이 누렇게 바랜 일기장을 받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니 스무 살 생일 되면 줄라꼬 감춰놨던 건데, 힘이 될까 싶어 좀 땡겨서 주는 거다.'
누군가가 내가 태어나기를 기다리면서부터 5살이 될 때까지 오직 나만을 위한 일기를 썼다면, 그리고 그걸 어른이 되어서 본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나라면 그대로 주저 앉아 엉엉 울 것만 같다. 『빅토리 노트』는 그런 책이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에서 여성 둘이 함께 삶을 꾸려나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말하기를 말하기』에서 발화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한 김하나 작가의 어머니, 이옥선 작가가 5년 간 쓴 육아일기를 그대로 옮겼다. 제목 '빅토리 노트'는 당시 육아일기로 쓰던 노트의 제목으로, '옥스포드 노트'처럼 별 다른 뜻 없이 붙여진 이름이겠지만 이 노트 한 권이 김하나 작가를 삶의 승리자로 만드는데 일조했을 테다. 5년 간의 기록이 딸 하나를 향한 영원한 사랑이 된 것이다.
실제로 아이들에게 일기를 넘겨줬을 때 마음이 조금 허전하기도 했다. 무덤덤한 아들도 육아일기를 밤새도록 읽고 뭔가 새로운 각오를 한 듯했고, 딸은 살면서 줄곧 자기의 육아일기에 열광을 보냈다. 드디어는 자신의 책에 이 육아일기를 소재로 글을 한 편 쓰기도 했는데 나는 딸의 이런 태도를 보면서 5년 동안 쓴 육아일기가 내 평생의 보람이 되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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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좀 많이 먹고 나면 사람살이에 대해서 젊었을 때와는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되는데, 그런 생각이 밑받침이 되어 써둔 글을 모아서 육아일기와 같이 묶어서 책을 내게 되다니 좀 아이러니하다. 바라건대 이 책을 읽은 어느 엄마가 자신의 아기에 대한 육아일기를 써준다면 나의 이 책은 누군가에게 씨앗이 되는 것이리라.
읽는 내내 엄마가 생각났다. 이옥선-김하나 작가님의 글을 통해 그들의 관계를 엿보고, 동시에 나와 내 엄마의 관계를 투영해볼 수 있었다. 아마 이 책은 모두에게 그런 작품일 것이다. 딸이 보면 엄마가 생각날 것이고, 엄마가 보면 딸이 생각날 것이다. 현재 소중한 생명을 기다리고 있거나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면 더더욱 추천하고 싶다. 서문 이옥선 작가님의 말에 언급되어 있듯이, 누군가가 이 책으로 인해 육아일기를 쓰기 시작한다면 『빅토리 노트』가 그 거대한 사랑의 씨앗이 되는 것일 테다.
하나야!
아빠와 엄마는 벌써부터 이름을 마련해놓고 너를 기다렸단다.
엄마는 너를 낳기 위해서 12월 11일에 부산에서 진주 외갓집으로 왔었단다. 아빠는 혼자 며칠을 보냈었단다. 나야는 모두들 오빠를 닮았다고들 하는구나. 앞으로 예뻐질 거라고 모두 기대들을 하고 있단다. 저녁에 아빠로부터 수고했다고 전해달라는 전화가 왔었단다. 나야는 뒤꼭지가 너무 톡 튀어나와서 아무리 바로 눕혀도 옆으로만 돌아가는구나.
아직은 너무나 조그맣고 눈을 꼭 감고 있지만 앞으로 틀림없이 밝고 아름답고 귀여운 엄마의 딸이 될 것이라는 걸 확신한단다.
『빅토리 노트』를 읽고 퇴근길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도 육아일기 써둔 것 있으면 줘. 가진 거 다 내놔." 그렇게 두툼한 육아일기를 갈취하는데에 성공했다. 덕분에 나도 알 수 있었다. 내가 태어났던 1998년 9월 8일 화요일에는 비가 내렸다는 사실을. 쌍커플이 유난히 짙었던 내가 온 병원에 소문이 다 나서, 병원 사람들이 다 나를 보러 한 번씩 왔다는 사실을. 딸기를 좋아하는데 없는 이빨로 발음을 하려니 '똘기, 똘기 주떼여'라고 발음을 해서 가족들을 다 웃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자신의 근원이자 시초, 처음이자 시작이었던 순간의 기록이 궁금하다면 『빅토리 노트』를 핑계 삼아 넌지시 말을 건네봐도 좋을 것 같다. 『빅토리 노트』는 그런 책이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의 역사를 담은 징표이자, 독자로 하여금 '나의 생'을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 같은 책. 오늘, 전화 버튼을 누르기 망설여진다면 『빅토리 노트』가 좋은 핑계가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