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 - 인간 이봉창 이야기
배경식 지음 / 너머북스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는 얼마나 사실일까?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현재’가 기억하는 역사는 늘 논란거리다. 최근 발간된 책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 (저자 백경식)』역시 독립운동가 이봉창에 대한 현재의 기억을 바꿔 놓는다는 점에서 또 한 차례 논란이 될 듯하다.

1932년 1월 일본 도쿄에서 히로히토 일왕 폭살을 시도했다 붙잡혀 사형당한 이봉창 의사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기억은 대체로 이렇다. 아버지가 일제에 땅을 뺏기고 가난하게 자란 이봉창이 일본 식민지의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며 성장했고, 상해에서 김구를 만나 일왕을 폭살할 결심을 한 뒤 거사를 행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이봉창의 삶은 외면한 채, 독립운동의 영웅 신화를 만들어 대중에게 각인시킨 것이라면 어떨까?


두 장의 사진, 만들어진 가짜와 생소한 진짜



 
이봉창에 관한 두 사진은 ‘만들어진’ 이봉창에 대한 의구심을 더욱 들게 한다. 두 사진 모두 이봉창이 천황 폭살을 결의한 후 찍은 사진이다. 이봉창이 활짝 웃고 있는 전자는 교과서를 통해 잘 알려진 사진이지만, 후자는 매우 생소하다.

하지만, 전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웃는 얼굴모양만 사진일 뿐, 태극기, 사람형상, 글자 모두 그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누군가 흐릿한 이봉창 사진 대신 태극기, 폭탄, 선언문 등을 기존 사진보다 더 크게 그린 후 웃고 있는 이봉창 얼굴 사진만 잘라 넣은 것이다. 이 사진은 1946년 『도왜실기』 한글판에 처음 등장한다. 1932년 첫 중국어판 『도왜실기』에 실린 후자의 사진은 교묘하게 누락된 채 말이다. 직접 찍은 사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이미지의 이봉창 사진이 ‘창안’돼 유포된 점이 미심쩍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출발한다. 그동안의 이봉창 이야기는 ‘독립운동의 영웅’으로서의 신화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저자는 ‘독립투사’하면 고결하고 순결한 존재라는 선입견을 버려야, 비로소 지사의 삶의 진실과 인간적 면모가 드러난다고 강조했다. 그가 ‘상신서’ 등 이제껏 어둠에 묻혔다 세상에 드러난 이봉창의 재판기록들을 조사해 재구성한 이 책은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인간’ 이봉창의 과장되거나 왜곡되지 않은 삶의 모습이다.


진짜 일본인 되고 싶어 했던 식민지 청년, 이봉창

이 책의 이봉창 신화 뒤집기는 처음부터 파격적이다. 이봉창은 상해에서 김구를 만나기까지 별다른 민족의식을 갖지 않았으며, 타고난 투사가 아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진짜’ 일본인이 되고 싶어 했던 평범한 식민지 청년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봉창은 일제에 땅을 뺏겼다는 기존 얘기와 달리 아버지의 사업실패 등으로 극도의 가난을 겪었다. 이후 그는 능란한 일본어 실력과 부지런함으로 일본 과자점과 용산철도역 전철수로 일하기도 했다. 친일청년단체인 ‘금정청년회’에서 간사로 일하고, 조선총독부의 국세조사위원으로 활동한 기록들을 보면, 그가 오래 전부터 항일의식을 갖고 살았던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기노시타 쇼조’는 이봉창이 일본으로 건너가 ‘신일본인’이 되겠다며 직접 지은 이름이었다. 그는 일본에 가서 일본인으로 살면 차별받지 않고 안정된 직장을 구해 잘 살 것으로 믿고, 함께 도일한 조카딸마저 외면할 정도로 일본인 행세를 하며 살았다.

그런 그가 조국의 독립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1932년 히로히토 즉위식 때였다. 천황행렬을 구경 갔다 조선인이란 이유만으로 9일 동안 구금당한 것이다. 그 뒤 떳떳한 조선인으로 살겠다며 떠난 상해에서 그는 김구를 만나 독립투사로 변모한다.


‘아마추어’ 독립운동가의 천황 폭살기

책의 ‘이봉창 신화 뒤집기’ 결정판은 무엇보다 이봉창이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지는 순간까지의 마지막 20일의 기록이다. 도쿄에서 거사를 준비하는 동안 이봉창이 보낸 일상의 흔적은 고결한 독립운동가의 이미지를 무너뜨린다.

뭔가 치열하게 거사를 고민했을 것 같은 예상과 달리, 이봉창은 대부분의 시간을 술 마시고 카페에 가고 영화를 보고 마작을 했으며, 창녀들과 밤을 보내기도 했다. 심지어 골프까지 즐겼던 이봉창은 당시 수입된 최첨단 자본주의 소비문화를 아낌없이 누렸던 ‘모던보이’였던 것이다.

암살 준비 역시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이봉창은 1월 8일 일본 육군 관병식날 거사를 수행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몇 가지 치명적 실수를 범했다. 우선 천황의 행차코스를 전혀 파악하지 않았고, 더 중요한 실수는 천황의 얼굴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는 폭탄 투척연습은 해보지도 않았고, 미리 폭탄의 성능을 시험해보지도 않았다.

그런 이봉창이 수행한 거사의 모습은 어땠을까. 우선 그는 시간을 잘못 판단해 천황행렬이 지나가버려 첫 번째 거사를 놓쳤다. 이후 택시를 급히 타고 경시청 앞으로 간 그는 두 번째 마차가 천황이 탄 것이라 착각하고 수류탄을 던졌다. 그런데 수류탄은 폭발음만 컸을 뿐 정작 제대로 터지지 않았다. 그는 순간 멍해 나머지 한 개의 수류탄을 던지는 것마저 잊었다. 거사 후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 삼창을 외쳤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에겐 태극기도 없었다. 천황을 암살하는 거사를 혼자 감행하기에 이봉창은 훈련받지 않은, 준비되지 않은 ‘아마추어’ 투사였던 것이다.


독립영웅의 신화를 뜯어내고 본 인간 이봉창의 삶에 주목하라.
 
거사는 비록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이봉창 의거는 일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줬고, 꺼져가던 항일 독립운동에 불씨를 지폈다. 이후 윤봉길 의사와 같은 뜻있는 청년들이 임시정부에 가담해 독립운동의 새 장을 열게 됐다.

이봉창 의거가 독립운동사에 남긴 엄청난 파장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가 기억하는 독립 영웅의 뻔한 레퍼토리대로 산 인물은 아니었다. 이 책을 통해 본 이봉창은 영웅이기 전에 혈기왕성한 청년이자, 근대 문화를 향유하면서도 독립의 염원을 행동으로 옮긴 용기 있는 젊은이였다.

그렇기에 저자가 기록한 그의 일생은 독립운동가의 이미지를 훼손했다기보다, 오히려 더 인간적으로 고뇌하는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만나게 되고, 그렇기에 ‘한국적 근대’인 식민지 조선을 살아간 젊은이의 삶이 있는 그대로 느껴진다.

이 책은 현재가 기억하는 독립운동가에 대한 기억이 어쩌면 누군가에 의해 과장되고, 날조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지나치게 미덕만 강조된 영웅사가 아닌 때로는 고뇌하고 방황했지만 의미 있는 행동을 보여줘, 현재가 기억해야 할 ‘인간’ 이봉창의 삶 그 자체다.

이제 독립운동의 ‘영웅 신화’라는 거대한 포장지를 뜯어보자. 그럼, ‘독립운동가’와 식민지적 근대를 상징하는 인간형인 ‘모던보이’라는 상반된 삶을 함께 살아갔던 식민지 조선의 청년 이봉창을 새롭게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대학생웹진 바이트 www.i-bait.com에 기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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