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잔의 차
그레그 모텐슨.데이비드 올리비에 렐린 지음, 권영주 옮김 / 이레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최근 예멘에서 한국인 자살폭탄테러 사건이 터지면서, 이슬람 지역의 테러에 대한 경각심이 커지고 있다. 한국에겐 아직 자살폭탄테러가 낯설지만, 중동 국가들에서는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일이다. 그런데 테러에 나서는 사람들이 주로 중동국가의 여성과 아이들이라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왜 여성과 아이들은 ‘테러’라는 극단적인 행위에 내몰리고 있을까.

『세잔의 차』 저자 그레그 몬텐슨은 말한다. “테러란 파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 어딘가의 사람들이 단순히 우리를 증오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죽음보다 삶을 선택해야 할 이유가 될 만큼 밝은 미래를 제공받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책은 몬텐슨이 K2를 등정하다 우연히 산골 오지의 코르페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게 되고, 그들에게 학교를 지어줄 결심을 하게 되면서 시작한다. 그의 기막힌 생각은 코르페를 넘어 파키스탄 오지의 많은 학교들을 짓는 발걸음으로 이어졌다.

모텐슨이 코르페 마을에 머물면서 목도한 파키스탄 북부 산악지대는 “이 아이들은 생활의 모든 것이 투쟁이었다”고 표현할 만큼 열악했다. 각 가정마다 갑상선종이나 백내장을 앓는 사람이 꼭 한 명씩 있었고, 아이들 세 명 중 한 명이 만 한 살 이전에 죽었다. 그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맨 땅에 앉아 공부하던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78명의 남자아이와 4명의 여자아이가 히말라야의 얼어붙은 땅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구구표를 베끼고 있었다. 연필 따위는 없었다. 그저 나무막대를 가져와 흙에 쓸 뿐이었다.

파키스탄 정부가 보내는 지원금은 부패와 방치의 조합 탓에 머나먼 산악지대로 오는 과정에서 다 새어나가고, 아이들은 이렇다 할 학교조차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인생을 바꿀 중요한 결심을 하게 된다. “제가 학교를 지어 드리겠습니다. 약속하죠.”

모텐슨의 ‘파키스탄 산골 오지 학교 건설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그도 그저 평범한 미국인일 뿐이었다. 후원자를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다행히 ‘장 회르니’ 박사를 만나 학교자금을 지원받게 되었지만, 파키스탄 오지에 학교를 짓는 일은 모든 것이 난관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훼방이었다. 그는 웬 이교도가 이슬람을 아이들을 자기네 가르침으로 오염시키려 한다는 오해에 둘러싸여야만 했다. 한 종교 지도자는 “알라는 여자아이들이 공부하는 것을 금하신다. 그리고 나는 이 학교를 세우는 것을 금한다”고 선포했다. 일종의 파트와(종교적 판결)였다. 파키스탄에선 공법 뿐 아니라 이슬람 법률체계에 따라 지배되므로 파트와를 무시하면서 학교를 짓는 것은 힘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어려운 과정을 뚫고, 1996년 12월 10일 드디어 코르페 학교가 완성됐다. 튼튼한 버터색 건물과 새로 칠한 진홍색 장식, 교실 네 개에 칠판과 책상, 의자까지 모두 준비됐다. 남루한 옷을 입고 미소 짓고 있는 70명의 아이들은 이 학교를 통해 코르페 마을의 첫 정규교육생이 되어 새로운 인생의 첫 출발을 하게 됐다.
 
이어 그는 단 3개월 만에 초등학교 세 곳을 더 세웠다. 또한 그는 여성 직업센터를 만들어 매일 오후 여성들이 재봉틀을 쓰는 법을 익히도록 도왔다. 마을 사람들이 깨끗한 식수를 먹도록 공용 수도도 만들었다. 이제 여자들은 깨끗한 물을 긷기 위해 몇 킬로미터씩 걷지 않아도 됐고, 인구 2천명에 달하는 공동체의 유아 사망률은 순식간에 절반으로 줄었다.

학교와 수도 시설들까지 세운 모텐슨의 노력은 마을 사람들의 생활을 바꾼 것에 그치지 않았다. 아이들에 대한 교육이 이슬람 테러의 근본 문제를 해소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지금까지 파키스탄의 열악한 교육환경은 수많은 테러범을 만드는 온상이 되어왔다. 이슬람 원리주의에 따라 여자 아이들의 교육은 금지됐고, 가난한 아이들에게 교육은 일종의 사치일 뿐이었다. 여기서 부실한 공교육과 가난이라는 이중고를 꿰차고 들어온 ‘마드라사’(이슬람 학교)는 호전적인 지하드를 키우는 첨병역할을 했다.

물론 모든 마드라사가 문제는 아니었다. 마드라사는 공교육 제도에서 소외된 가난한 학생들에게 학교와 숙식까지 무료로 제공하면서, 유일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중 오로지 호전적인 지하드를 가르치기 위해 존재하는 학교들이 있다는 것이다. 세계은행은 마드라사 학생 중 15-20퍼센트가 군사 교육을 받고 수학과 과학, 문학 과목 대신 지하드와 서방에 대한 증오심을 강조하는 교과과정을 밟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마드라사 교육과 이슬람교 과격파 등장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파키스탄의 저널리스트 할 아메드 라시드는 어린 마드라사 학생들 중에서 8만 명 이상이 탈레반 신병이 되었다고 추정했다. 그는 저서 『탈레반』에서 이들 마드라사 학생들이 “자기 인식을 갖추지 못한 사회의 불안정한 계층, 무직자들, 경제적 소외계층”이라며 “그들은 이것이 유일하게 적응할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에 전쟁을 동경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모텐슨이 지은 학교들의 역할은 자명했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과격 이슬람 원리주의를 가르치는 것이 아닌, 파키스탄 정부 학교와 같은 정규 교육과정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의 삶은 다각도로 변했다. 코르페 마을 학교를 첫 졸업한 여자 아이 자한은 마을일을 돌보는 평범한 이슬람 여성 대신 ‘슈퍼 레이디’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남자 아이들도 AK-47과 유탄 발사기를 공부하는 대신, 산수와 시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들의 꿈은 더 이상 희망 없는 곳에서 내뿜는 분노의 폭탄 테러가 아닌 더 나은 세상으로의 자신의 꿈을 키우는 것으로 변화해갔다.
 
2003년 10월, 파키스탄 북부 산악지대에는 40개 이상의 학교가 세워져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9.11이후 탈레반으로부터 해방된 아프가니스탄으로 찾아가 폐허가 된 학교 교육의 원상복귀를 돕고, 아프간 오지에도 아이들의 희망이 될 학교를 세웠다. 어느덧 그는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에게 폭탄 대신 책을 쥐어줄 80여개의 학교를 세웠다.

이슬람 테러가 여전히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이 때, 겨우 한 사람이 만들어낸 기적은 대단했다. 그가 학교를 짓는 일이 이슬람 자체를 민주화 시키거나, 테러 자체를 근본적으로 뿌리 뽑기는 힘들지 모른다. 하지만 교육은 아이들이 더 이상 지하드가 아닌 자신만의 새로운 인생을 꿈꾸도록 도울 것이다. 또한 교육 받은 인재들은 언젠가 이슬람을 만성적인 빈곤과 가난에서 해방시키고, 민주화시키는 데 현격한 역할을 수행하게 될 지도 모른다.

모텐슨은 말했다. “교육은 가난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장기전술이다.” 그의 말이 테러와 가난과 싸우고 있는 중동국가의 민주화 과정에서, 잊어서는 안 될 귀중한 원칙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학생웹진 바이트 www.i-bait.com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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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 - 인간 이봉창 이야기
배경식 지음 / 너머북스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는 얼마나 사실일까?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현재’가 기억하는 역사는 늘 논란거리다. 최근 발간된 책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 (저자 백경식)』역시 독립운동가 이봉창에 대한 현재의 기억을 바꿔 놓는다는 점에서 또 한 차례 논란이 될 듯하다.

1932년 1월 일본 도쿄에서 히로히토 일왕 폭살을 시도했다 붙잡혀 사형당한 이봉창 의사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기억은 대체로 이렇다. 아버지가 일제에 땅을 뺏기고 가난하게 자란 이봉창이 일본 식민지의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며 성장했고, 상해에서 김구를 만나 일왕을 폭살할 결심을 한 뒤 거사를 행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이봉창의 삶은 외면한 채, 독립운동의 영웅 신화를 만들어 대중에게 각인시킨 것이라면 어떨까?


두 장의 사진, 만들어진 가짜와 생소한 진짜



 
이봉창에 관한 두 사진은 ‘만들어진’ 이봉창에 대한 의구심을 더욱 들게 한다. 두 사진 모두 이봉창이 천황 폭살을 결의한 후 찍은 사진이다. 이봉창이 활짝 웃고 있는 전자는 교과서를 통해 잘 알려진 사진이지만, 후자는 매우 생소하다.

하지만, 전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웃는 얼굴모양만 사진일 뿐, 태극기, 사람형상, 글자 모두 그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누군가 흐릿한 이봉창 사진 대신 태극기, 폭탄, 선언문 등을 기존 사진보다 더 크게 그린 후 웃고 있는 이봉창 얼굴 사진만 잘라 넣은 것이다. 이 사진은 1946년 『도왜실기』 한글판에 처음 등장한다. 1932년 첫 중국어판 『도왜실기』에 실린 후자의 사진은 교묘하게 누락된 채 말이다. 직접 찍은 사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이미지의 이봉창 사진이 ‘창안’돼 유포된 점이 미심쩍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출발한다. 그동안의 이봉창 이야기는 ‘독립운동의 영웅’으로서의 신화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저자는 ‘독립투사’하면 고결하고 순결한 존재라는 선입견을 버려야, 비로소 지사의 삶의 진실과 인간적 면모가 드러난다고 강조했다. 그가 ‘상신서’ 등 이제껏 어둠에 묻혔다 세상에 드러난 이봉창의 재판기록들을 조사해 재구성한 이 책은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인간’ 이봉창의 과장되거나 왜곡되지 않은 삶의 모습이다.


진짜 일본인 되고 싶어 했던 식민지 청년, 이봉창

이 책의 이봉창 신화 뒤집기는 처음부터 파격적이다. 이봉창은 상해에서 김구를 만나기까지 별다른 민족의식을 갖지 않았으며, 타고난 투사가 아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진짜’ 일본인이 되고 싶어 했던 평범한 식민지 청년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봉창은 일제에 땅을 뺏겼다는 기존 얘기와 달리 아버지의 사업실패 등으로 극도의 가난을 겪었다. 이후 그는 능란한 일본어 실력과 부지런함으로 일본 과자점과 용산철도역 전철수로 일하기도 했다. 친일청년단체인 ‘금정청년회’에서 간사로 일하고, 조선총독부의 국세조사위원으로 활동한 기록들을 보면, 그가 오래 전부터 항일의식을 갖고 살았던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기노시타 쇼조’는 이봉창이 일본으로 건너가 ‘신일본인’이 되겠다며 직접 지은 이름이었다. 그는 일본에 가서 일본인으로 살면 차별받지 않고 안정된 직장을 구해 잘 살 것으로 믿고, 함께 도일한 조카딸마저 외면할 정도로 일본인 행세를 하며 살았다.

그런 그가 조국의 독립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1932년 히로히토 즉위식 때였다. 천황행렬을 구경 갔다 조선인이란 이유만으로 9일 동안 구금당한 것이다. 그 뒤 떳떳한 조선인으로 살겠다며 떠난 상해에서 그는 김구를 만나 독립투사로 변모한다.


‘아마추어’ 독립운동가의 천황 폭살기

책의 ‘이봉창 신화 뒤집기’ 결정판은 무엇보다 이봉창이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지는 순간까지의 마지막 20일의 기록이다. 도쿄에서 거사를 준비하는 동안 이봉창이 보낸 일상의 흔적은 고결한 독립운동가의 이미지를 무너뜨린다.

뭔가 치열하게 거사를 고민했을 것 같은 예상과 달리, 이봉창은 대부분의 시간을 술 마시고 카페에 가고 영화를 보고 마작을 했으며, 창녀들과 밤을 보내기도 했다. 심지어 골프까지 즐겼던 이봉창은 당시 수입된 최첨단 자본주의 소비문화를 아낌없이 누렸던 ‘모던보이’였던 것이다.

암살 준비 역시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이봉창은 1월 8일 일본 육군 관병식날 거사를 수행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몇 가지 치명적 실수를 범했다. 우선 천황의 행차코스를 전혀 파악하지 않았고, 더 중요한 실수는 천황의 얼굴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는 폭탄 투척연습은 해보지도 않았고, 미리 폭탄의 성능을 시험해보지도 않았다.

그런 이봉창이 수행한 거사의 모습은 어땠을까. 우선 그는 시간을 잘못 판단해 천황행렬이 지나가버려 첫 번째 거사를 놓쳤다. 이후 택시를 급히 타고 경시청 앞으로 간 그는 두 번째 마차가 천황이 탄 것이라 착각하고 수류탄을 던졌다. 그런데 수류탄은 폭발음만 컸을 뿐 정작 제대로 터지지 않았다. 그는 순간 멍해 나머지 한 개의 수류탄을 던지는 것마저 잊었다. 거사 후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 삼창을 외쳤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에겐 태극기도 없었다. 천황을 암살하는 거사를 혼자 감행하기에 이봉창은 훈련받지 않은, 준비되지 않은 ‘아마추어’ 투사였던 것이다.


독립영웅의 신화를 뜯어내고 본 인간 이봉창의 삶에 주목하라.
 
거사는 비록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이봉창 의거는 일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줬고, 꺼져가던 항일 독립운동에 불씨를 지폈다. 이후 윤봉길 의사와 같은 뜻있는 청년들이 임시정부에 가담해 독립운동의 새 장을 열게 됐다.

이봉창 의거가 독립운동사에 남긴 엄청난 파장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가 기억하는 독립 영웅의 뻔한 레퍼토리대로 산 인물은 아니었다. 이 책을 통해 본 이봉창은 영웅이기 전에 혈기왕성한 청년이자, 근대 문화를 향유하면서도 독립의 염원을 행동으로 옮긴 용기 있는 젊은이였다.

그렇기에 저자가 기록한 그의 일생은 독립운동가의 이미지를 훼손했다기보다, 오히려 더 인간적으로 고뇌하는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만나게 되고, 그렇기에 ‘한국적 근대’인 식민지 조선을 살아간 젊은이의 삶이 있는 그대로 느껴진다.

이 책은 현재가 기억하는 독립운동가에 대한 기억이 어쩌면 누군가에 의해 과장되고, 날조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지나치게 미덕만 강조된 영웅사가 아닌 때로는 고뇌하고 방황했지만 의미 있는 행동을 보여줘, 현재가 기억해야 할 ‘인간’ 이봉창의 삶 그 자체다.

이제 독립운동의 ‘영웅 신화’라는 거대한 포장지를 뜯어보자. 그럼, ‘독립운동가’와 식민지적 근대를 상징하는 인간형인 ‘모던보이’라는 상반된 삶을 함께 살아갔던 식민지 조선의 청년 이봉창을 새롭게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대학생웹진 바이트 www.i-bait.com에 기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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