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함대 자체는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프랑스 사략선들이 영국해협과 비스케이만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노로추진되는 갤리선들은 바람이 잦아들어 오도 가도 못하는 잉글랜드 상선들을 쉽사리 따라잡을 수 있었다.

7월 루앙의 대주교는 설교에서 필리프가6,000명을 스코틀랜드로 파견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9월 노팅엄에 모인 대평의회Great Councilia*는 상인회합의 지지를 받아, 프랑스 국왕의 배반을 규탄하고 에드워드가 프랑스와 맞서 싸울수 있게 ‘십일조‘와 ‘십오일조‘ 특별세를 걷는 안을 가결했다.

프랑스 국왕의 배반을 규탄하고 에드워드가 프랑스와 맞서 싸울수 있게 ‘십일조‘와 ‘십오일조‘ 특별세를 걷는 안을 가결했다.

반면 잉글랜드의 전적은 암울했다.
가스코뉴에서 켄트 백작이 보여준 형편없는 전과는 이미 언급했다.

1327년 젊은 에드워드는스코틀랜드인과의 전쟁에서 굴욕적일만큼 불운한 결과를 받아들고 눈물을흘려야 했다. 

심지어 그들은 잠시 동안이긴 해도 이교도들로부터 팔레스타인을 탈환하기도 했고, 무어인들로부터 에스파냐를거의 재탈환했다. 지난 300년 동안 프랑스는 거대한 규모의 기사 계급을 보유했고, 그들에게 전쟁-마상 창시합에서든, 국왕의 군대에서든 아니면 용병으로서든은 삶의 방식이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라에 불행이 닥쳐오고, 그는 왕위에서 쫓겨날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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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에드워드는 1329 년 아미앵의 대성당에서 "우리의 매우 소중한친족"에게 "기옌 공국을 걸고 프랑스국왕의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는 충성 신서를 해야 했다. 그는 솜강 어귀에 있는 영지인 퐁티외 지방도 걸고충성 신서를 했다. 그곳의 수도는 아베빌이었고, 그 지역의 또 다른 도시로는 크레시가 있었는데, 이곳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다룰 것이다. 

프랑스만큼 이런 발전이 뚜렷하게 이루어진 곳도 없어서, 1330년대 프랑스의 인구는 2,100만 명에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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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에드워드는 1329 년 아미앵의 대성당에서 "우리의 매우 소중한친족"에게 "기옌 공국을 걸고 프랑스국왕의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는 충성 신서를 해야 했다. 그는 솜강 어귀에 있는 영지인 퐁티외 지방도 걸고충성 신서를 했다. 그곳의 수도는 아베빌이었고, 그 지역의 또 다른 도시로는 크레시가 있었는데, 이곳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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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국은 에드워드에게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적지 않은 통행세를 거두는국왕 소유의 다리들이 가론강 전체에여럿 있었고, 기옌에서 포도주는 잉글랜드의양모나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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