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못 봤어? - Missing Memories
제이제이 지음 / 종이학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어렸을 때 다 배우는 것 같아요. 이 판타지 동화도 우리가 잊고 있던 것들을 다시 상기 시켜 줄 것 같습니다. 환경 문제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까지 온 이때에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아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는 것뿐이었다. 사실 그가 그런 자금을 마련하길 기대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그럼에도 공정하게 말하

라운 일이다. 그럼에도 공정하게 말하자면, 그가 과세하기 전에 적어도 신민들에게 의견을 물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에드워드 1세가 겪었던 어

해야 한다. 에드워드 1세가 겪었던 어려움과 자신의 아버지의 몰락은 에드워드에게 그러한 상의가 필요하다는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거듭해서 자문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거듭해서 자문회의와 의회 양쪽에 자신의 필요를 설명했고, 종종 약간의 효과를 보기도했다. 1343년 그의 대신 중 한 명은

했다. 1343년 그의 대신 중 한 명은의회에 전쟁이 "주교와 귀족, 평민들의 공동 합의로 시작되었음"을 상기시킬 수 있었다. 심지어 에드워드는 지

킬 수 있었다. 심지어 에드워드는 지방에까지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었다. 그러나 이 모든 설명들도 사람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게 하는 데는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겪었던 또 다른 어려움으로는 군대 동원이 있다. 봉건적 군

으로는 군대 동원이 있다. 봉건적 군역이라는 옛 시스템은 사실상 자취를감췄으므로 그는 지휘관을 고용한 뒤그 지휘관들이 꼼꼼하게 작성된 계약서의 조건에 따라 정해진 기간 동안정해진 급여를 받고 복무하기로 한 병사를 명시된 유형에 따라 그 수만큼모집하는 "고용 계약indenture" 방식을써야 했다. 그러나 웨일스 단검병

써야 했다.
그러나 웨일스단검병knifemen이든 잉글랜드 궁수든 그의 보병은 전통적인 배치 위임권commissionsof array" 에 의해 징집해야 했다. 보통 군

of array"에 의해 징집해야 했다. 보통 군사적 경험이 있는 현지 신사gentleman인징병관은 이론적으로는 그 지역의 태수baliff나 성 관리 장관이 소집한 16세에서 60세 사이의 주민들 가운데 가장

만 실제로는 매우 수상한 인물들도 포함되었다. 에드워드 3세의 병사들 가운데 무려 12퍼센트가 범법자들로 추정되는데, 대다수가 살인죄로 사형을선고받은 뒤 "사면장"을 기대하며 군대에 복무하는 이들이었다. 국왕은 이

창병 100명, 중장기병 100명, 궁수200명, 보병 300 명식으로, 유형별로그 수를 정해 고용했다는 의미이다.

필리프 6세는 이론상으로는 재정적인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야 했다. 그

러나 프랑스가 부유하다고는 해도 그곳의 통치자들이 프랑스의 부富를 이용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잉글랜드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 당대인의 묘사에 따르면 생김새가 "신의 얼굴 같았다".

대영주들은 직무상 장군이었다. 1338년 원정을 준비하면서 국왕이 여섯 명에게 새로이 백작 작위를 내린 것은의미심장한 일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 사람들의주요 활동 거점이었던 셰르부르, 르아브르 등이 대표적이다.

필리프가 로베르를 비호하는 자는 자신의 적이라고위협했는데도 에드워드는 로베르를리치먼드 백작으로 삼고 그에게 연금과 세 채의 성을 하사했다. 

그러나 1330년 로베르는 그의 친척 아주머니가 상속한 아르투아를 위조문서를 이용해 손에 넣으려다 사기 행각을 발각당했다.

에드워드의 호화로운 궁정, 정기적으로 열리던 연회와 마상 창시합은 그에게 뛰어난 참모들을 안겨주었다.

태생으로나 계급상으로나 직업 군인이었던 그의 친구들은 그가 어떤 식으로생각하고 판단하는지 알았고, 스코틀랜드 원정에서 검증받았다. 비록 오래된 봉건 구조는 와해되고 있었지만 사회는 여전히 군사적 위계 사회였으며, 대영주들은 직무상 장군이었다. 

당대에 그토록 칭송받던 그의 비의적인 기사도 숭배는 겉모습 아래에 감춰진 인물 됨됨이를 가려왔지만 그럼에도 그의 개성은 드러난다-우아함이흘러넘치고, 친교에서는 따뜻하지만반목하는 상대에게는 가차 없이 모질고 냉혹한 사람이었다. 한편으로는 방종하고 끊임없이 여자를 탐하다가 결국에는 건강을 망치고 말았다.

그가내면에 품고 있던 나폴레옹적 자신감과 영웅왕이 되려는 기묘한 자의식적결심이 어떤 것이었을지는 짐작만 할수 있을 뿐이다.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 역사상가장 강력한 국왕 중 한 명으로, 대략에드워드 1세와 헨리 8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모티머를 몰아낸 뒤 재빨리 봉건영주들로부터 자신의 권위를 확립했고, 20대 중반이 되었을 때 권력의 정점에 섰다.

무엇이 에드워드가 끝내 전쟁을 일으키게 만들었을까? 현대의 일부 논평가들은 에드워드한테서 지나칠 정도로 복잡하게 머리를 쓴 정책, 즉 현상유지 작전을 읽어낸다. 그들은 에드워드가 프랑스를 공격함으로써 프랑스의 관심을 기옌에서 다른 데로 돌리려고 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록 함대 자체는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프랑스 사략선들이 영국해협과 비스케이만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노로추진되는 갤리선들은 바람이 잦아들어 오도 가도 못하는 잉글랜드 상선들을 쉽사리 따라잡을 수 있었다.

7월 루앙의 대주교는 설교에서 필리프가6,000명을 스코틀랜드로 파견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9월 노팅엄에 모인 대평의회Great Councilia*는 상인회합의 지지를 받아, 프랑스 국왕의 배반을 규탄하고 에드워드가 프랑스와 맞서 싸울수 있게 ‘십일조‘와 ‘십오일조‘ 특별세를 걷는 안을 가결했다.

프랑스 국왕의 배반을 규탄하고 에드워드가 프랑스와 맞서 싸울수 있게 ‘십일조‘와 ‘십오일조‘ 특별세를 걷는 안을 가결했다.

반면 잉글랜드의 전적은 암울했다.
가스코뉴에서 켄트 백작이 보여준 형편없는 전과는 이미 언급했다.

1327년 젊은 에드워드는스코틀랜드인과의 전쟁에서 굴욕적일만큼 불운한 결과를 받아들고 눈물을흘려야 했다. 

심지어 그들은 잠시 동안이긴 해도 이교도들로부터 팔레스타인을 탈환하기도 했고, 무어인들로부터 에스파냐를거의 재탈환했다. 지난 300년 동안 프랑스는 거대한 규모의 기사 계급을 보유했고, 그들에게 전쟁-마상 창시합에서든, 국왕의 군대에서든 아니면 용병으로서든은 삶의 방식이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라에 불행이 닥쳐오고, 그는 왕위에서 쫓겨날것"이라고 지적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