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는 교황과 황제도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약혼한 언니가 죽으면 여동생이 언니의 약혼자와 결혼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1531년 7월, 페데리코 곤차가와 마르게리타 팔레올로고의 결혼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3년뒤, 몬페라토공국은 만토바 공국에 합병되었다.
10년 동안이나 애인 사이였던페데리코는 이 결혼 때문에 그녀를 버렸다.
페데리코가 그녀를 추방할 필요도 없이 그녀 스스로 만토바를 떠났다.
이사벨라는 이겼을지 모르나, 10년 동안의 라이벌인 라보스케타한테서 자기와 똑같은 부류의 인간을 발견했다.
이사벨라 데스테에게 아들 페데리코의 결혼은 평생 동안 지켜온공식에 따른 그녀의 마지막 행동이었다.
60세가 다된 그녀는 죽을때까지 9년 동안 자기 서재에서 조용히 보낼 때가 많았다.
‘그로타‘ (둥지)와 ‘스튜디오‘ (서재) 라고 불린 두 방은 비록 크기는 작았지만안뜰에 면한 커다란 창문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그녀가 모아놓은 수많은 예술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1534년에 동생 알폰소가 죽었고, 이어서 밀라노 공작과 우르비노공작 등 그녀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거의 다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정신의 독립성에 대한 이사벨라의 긍지는 조금도 노쇠함을 보이지 않았다.
딸 레오노라와 아들 에르콜레가 당시유명했던 비토리아 콜론나의 살롱에 열심히 드나들어도 서재 문간에걸려 있는 이사벨라의 좌우명"꿈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에 나타나 있듯이, 비토리아 콜론나의 종교적이고 청결한 정신적 결합이었다.
그러나 그 시기는 뜻밖에 빨리 찾아왔다. 어린 몬페라토 후작이말을 타다 떨어져 죽은 것이다.
그러자 페데리코는 자기가 너무 성급했다고 생각했다.
그는당장 교황과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줄리아와는 결혼할 수 없는 이유가 있으니까 그녀와의 약혼을 무효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이유는 옛 약혼녀인 마리아 팔레올로고와 파혼할 때 그 절차가 충분치않았다는 것이다.
다음 상속자는 마리아 팔레올로고의 여동생인 20세의 마르게리타였다.
그제서야 마침내 이사벨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젊은 상속녀인마르게리타에게는 여기저기서 청혼이 쇄도했다.
마르게리타의 어머니인 몬페라토 후작부인은 딸을 밀라노 공작인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와 결혼시키고 싶어했다.
이사벨라는 우선 후작부인을 설득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이사벨라의교묘한 외교 앞에서 후작부인은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결국 이사벨라는 후작부인한테서 "딸만 좋다면 페데리코와 결혼시켜도 좋다"는 대답을 얻어냈다. 이사벨라는 당장 페데리코를 마르게리타에게 보냈다.
젊은 마르게리타는 페데리코의 교묘한 말솜씨에 함락되었다.
그녀는 "페데리코와 결혼하지 못하면 수녀가 되어버리겠다"고말하게 되었다.
이사벨라는 동시에 교황과 황제에 대해서도 운동을벌이기 시작했다.
이제 이사벨라의 맏아들은 공작의 칭호를 얻었고, 둘째아들에르콜레는 추기경이 되었고, 셋째아들 페란테는 카를 5세의 궁정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그런 이사벨라에게 오랑주 공작을 대신하여 황제군을 지휘하고 있던 페란테가 피렌체를 함락시켰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탈리아 독립의 마지막 보루인 피렌체공화국은 이렇게 무너졌다.
황제는 만토바를 떠나기 전에 페데리코의 결혼을 지시했다.
그는 17세 때 당시 8세인 마리아 팔레올로고 디 몬페라토와 약혼했지만, 애인인 라 보스케타 때문에 교황에게 파혼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 이유는 마리아 팔레올로고의 어머니가 라 보스케타의 남편을 시켜서 페데리코와 라 보스케타를 독살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완전한 누명이었지만, 이때문에 라보스케타의 남편은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만토바의 군주인 페데리코의 결혼은 하나의 정치다.
이제는 페데리코도 라 보스케타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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