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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특히 한국어를 듣기 힘든 외국으로. 한동안은 별 생각이 없어서, 현재는 하는 일의 사정으로 해외를 안 간지 10년이 다 돼 간다. 생활에 얽매이는 게 점점 더 지겹고 갑갑해오던 와중에 좋아하는 김영하 작가의 신작이 마침 '여행의 이유'였다. 사전 예약으로 구매하고 싶었지만 e-book으로 구매하려고 참고 있다가 한 달을 기다려도 발매가 되지 않아 결국 종이책을 샀는데, 다 읽고 나니 거짓말처럼 그 다음날 출간이 되었다.
어찌 됐든 내 기대 이상으로 김영하 작가는 나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그의 물 흐르듯한 문장에 감탄하고 같은 생각에 공감하며 책장을 술술 넘기다 보니 어느 새 금방 읽어버렸다. 다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우선 김영하 작가에 대한 찬사. 문체가 남성적이지만 마초적이지 않고, 너무 어리지도 너무 늙지도 않아서 그대로 닮고 싶다. 두 번째는 여행을 짧게라도 틈틈이 다녀야겠다는 생각. 여행을 떠나야 하는 이유를 계속해서 들으면서 설득당한 느낌이다. 생활이 점점 더 굴 속으로 들어가는 위기감이 있었는데 가끔씩 굴 밖에서도 상황을 검토해봐야 할 것 같다. 책은 재미있는 일화도 많았고 좋은 문장도 가득해서 통째로 기억하고 싶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문장들을 적어본다.
‘추구의 플롯’에서는 주인공이 결말에 이르러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그것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지만, 여행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뜻밖의 사실’이나 예상치 못한 실패, 좌절, 엉뚱한 결과를 의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정해진 일정이 무사히 진행되기를 바라며, 안전하게
귀환하기를 원한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강력한 바람이 있다. 여행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그런 마법적 순간을 경험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 p. 22
모든 인간에게는 살아가면서 가끔씩은 맛보지 않으면 안 되는 반복적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가까운 사람들과 만나 안부를 묻고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주기적으로 갖는다거나, 철저히 혼자가 된다거나, 죽음을 각오한 모험을 떠나야 한다거나, 진탕 술을 마셔야 된다거나 하는 것들. ‘약발’이 떨어지기 전에 이런 경험을 ‘복용’해야, 그래야 다시 그럭저럭 살아갈 수가 있다. 오래 내면화된 것들이라 하지 않고 살고 있으면 때로 못 견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이런저런 합리화를 해가며 결국은 그것을 하고야 만다. - p. 55
잠깐 머무는 호텔에서 우리는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잘 정리되어 있으며, 설령 어질러진다 해도 떠나면 그만이다. - p. 65
‘여행에서 영감을 얻으시나요?’라는 질문은 작가라면 한 번쯤 받아보는 것이다. 여행에서 영감을 얻은 기억이 나는 거의 없다. 영감이라는 게 있다면 언제나 나의 모국어로, 주로 집에 누워 있을 때 왔다. (…) 영감을 얻기 위해서 혹은 글을 쓰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지는 않는다. 여행은 오히려 그것들과 멀어지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 p.
79-80
여행하는 동안에는 모든 게 현재시제로 서술된다. (…) 보통의 인간들 역시 현재를 살아가지만 머릿속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지난밤에 하지 말았어야 할 말부터 떠오르고,
밤이 되면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뒤척이게 된다. 후회할 일은 만들지를 말아야 하고, 불안한 미래는 피하는 게 상책이니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미적거리게 된다.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놓는다.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그 경험들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생각으로 바꿔 저장한다. 영감을 좇아 여행을 떠난 적은 없지만,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또다시 어딘가로 떠나라고, 다시
현재를, 오직 현재를 살아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 p. 81-82
일상은 파도처럼 밀려온다. 해야 할 일들, 그러나 미뤄두었던 일들이 쌓여간다. 언젠가는 반드시 처리해야 할 일들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통제력을 조금씩 잃어가는 느낌에 시달리곤 한다. 조금씩 어떤 일들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생긴다. 욕실에 물이 샌다거나, 보일러가 낡아서 교체해야 한다거나, 옆집이 인테리어 공사에 들어가 너무 시끄러워진다거나 하는 일들. 우리는 뭔가를 하거나, 괴로운 일을 묵묵히 견뎌야 한다. 여행자는 그렇지 않다. 떠나면 그만이다. 잠깐 괴로울 뿐,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 그렇다.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 -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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