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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에서의 일 년
이창래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0월
평점 :
사람은 많은 것이 결정된 채로 태어난다. 이름이나 신체적 특징 같은 당연한 사실 외에도, 부모(혹은 원가족)가 이미 터전으로 삼은 커뮤니티에 자연스럽게 소속되며 그들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습득할 운명에 놓인다. 여기서 틸러의 시계추가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아시아 혈통이 섞인 나의 뿌리는 무엇인가? 엄마가 사라진 집에서 나는 어디에 기대어야 하는가? 왜 아버지는 나와 슬픔을 공유하지 않는가. 나다움은, 틸러다움은 도대체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잇따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틸러가 선택한 것은 퐁과의 동행이다. '절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절대 가벼워지지 않을 짐'을 지고 퐁을 따라나선다. 틸러는 그가 객관적으로 인식했듯 '의지력이 강한 어느 서구 남자'가 아니고, 다만 '감정적 고아'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퐁이라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해 보는 것뿐이다. 틸러는 퐁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퐁을 통해 보는 세상을 신뢰한다. 안타까운 점은 퐁 또한 틸러와 다를 바 없는 한 명의 외로운 인간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절대 혼자 두지 않음으로써 의도적으로 자신을 살필 기회를 놓치는 인간. 틸러는 퐁으로 인해 위험해지지만 퐁을 탓하거나 복수를 결심하지 않는다. 틸러와 퐁을 만든 건 원인과 결과가 뚜렷한 하나의 사건이 아닌 그 자체로 존재하는 한 인간의 복잡성임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틸러는 계속해서 흔들린다. 밸과 빅터 주니어와의 관계는 건강한 결합이라기보다는 억지로 잇댄 모양에 가깝다. 이웃들과의 소통은 매끄럽지 못하고, 여전히 아버지와는 어색한 긴장이 오간다. 그러나 바로 그 대목에서, 틸러가 틸러로서 사는 일을 감당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흔들리는 장면에서 우리는 틸러의 보다 선명해진 얼굴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영영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나아가는' 모습에서 내 안에도 존재할 어떤 결함을 쳐다볼 용기를 얻는다.
한 인간의 성장은 오프닝도 엔딩도 아닌 평범한 하루의 틈바구니에서, 우연하게 이뤄진다는 것을 이해할 때 소설의 감동은 배가 된다. 틸러에게 칼이 있듯, 나에게도 그리고 당신에게도 그 자신의 부족함으로 만든 날카로운 무기가 있을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불룩 솟아오른 주머니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