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네스터를 죽이고 싶어한다
카르멘 포사다스 지음, 권도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Pequeñas Infamias(네스터가 집필하는 레시피 모음 노트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번역본에서는 '작은 비밀'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원 제목에는 '추문'의 느낌이 강하게 들어있는지라 어딘지 모르게 좀 소박한 느낌이 들지요)라는 비교적 평범한 원 제목과는 달리 국내 번역본은 비교적 톡톡 튀는 느낌입니다. 작품을 읽다 보면 국내 제목이 작품 분위기를 좀 더 잘 나타내고 있다는 느낌은 들긴 합니다. 벌어지는 사건들을 모조리 한쪽으로 몰아넣는 느낌이 있습니다만, 제목을 이렇게 지은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죽이고 싶어한다는 (사실 좀 과장된 표현이긴 합니다) 네스터 채핀치라는 인물은 과연 어떤 사람이길래 초장에 죽어나갈까요. 제목도 그렇고 표지에 등장하는 모습이라든지 작품 속 몇몇 사람들의 지레짐작을 따르자면 그는 음험하고 계산적인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요? 아들뻘 되는 카를로스에게 우정 이상의 애정을 선사하고 그의 사정을 재빨리 파악해서 사려깊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경영자로서 부하 직원들에게도 사람좋은 고용주일 뿐더러 (요리사를 비롯한 전문직 장인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전제적인 태도를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시의 출장 요리 회사 또한 번창 일로에 올려놓고 있지요. 이런 사람이라면 제 상관이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네스터 채핀치는 영하 30도의 냉동고 속에 갖힌 채로 소설의 첫머리를 엽니다. 그는 끊임없이 냉정해지려 스스로를 독려하며, 빠져나갈 방도를 찾고 구출해줄 사람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그가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당황하지 않으려는 네스터의 태도는 사실 혼란한 정신과 절망적인 상황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에 가깝다는 사실을 압니다. 빠져나가기 위한 네스터의 분주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그의 몸짓이 점차 느리고 뻣뻣하게 굳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압니다. 그리고 끝내 그가 시체로 발견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압니다. 스스로를 다독거리는 네스터의 심리를 묘사하는 작가의 서술은, 사실은 반대로 네스터의 관뚜껑을 짜맞추어 가고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이 작품에서의 심리 묘사는 묘사되는 인물들의 기대를 끊임없이 배반합니다. 작품의 서술은 인물들의 과거사와 심리 상태를 그들의 생각을 통하여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내밀한 과거를 들춰내는 데 주력합니다. 그러한 심리 묘사를 통해 독자들은 등장 인물들이 현재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고 받아들이는지 짐작할 수 있는 것과 동시에, 그러한 등장 인물들의 예상과 추측이 얼마나 어긋나 있는가 또한 알아챌 수 있습니다. 작품 속의 심리 서술은 참 자세하고 정직하지만, 인물들 스스로가 갖고 있는 모순과 자기기만이 이런 묘사를 아이러니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이 작품이 몇몇 등장인물처럼 자기모순적이고 속물적인 사람들에 대한 풍자에 주력하는 것은 아닙니다. 뭐랄까, 이 작품 자체는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점성술사 롱스태프의 예언처럼 뜬금없어 보이지만 피할 수도 없는 운명의 장난 같은 이야기입니다. 등장 인물 몇몇은 네스터를 죽일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확신을 갖고 움직이지만...글쎄요. 용의자들의 살해 동기와 실제 살인자, 살해당하는 네스터와 확산되는 결말. 이러한 요소들은 작품 속의 아이러니를 등장인물 몇몇에 한정시키지 않고, 작품을 읽는 독자들까지 그 속에 포섭합니다. 

작품 속의 암시와 복선은 뚜렸하고, 이야기의 흐름 자체도 탄탄한 플롯 속에 짜여져 있습니다. 진범을 예상하는 것도,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앞으로 겪게 될 상황을 예측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그런데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왠지 모르게 당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각 인물들의 심리 묘사를 읽으면서 나름 영악하게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결국에는 작품 속 인물들과 함께 작가에 의해 능수능란하게 휘말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제게 있어 작품 중 가장 감정이입이 되는 캐릭터는 에르네스토에게 넘어간 라모스 기자입니다.


ps 1. 그런데 홍보 문구로 등장하는 '스페인식 추리'라는 건 대체 뭐랍니까?

ps 2. 또 띠지 홍보 문구인 크리스티나 셰익스피어와도 별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연관지으려면 체홉 쪽이 더 낫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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