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 부대낌과 상호작용의 정치 아프꼼총서 5
권명아 지음 / 갈무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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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ᆞ 서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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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간 여러 정세적, 개인적 상황들의 복합으로 전략적 침묵 내지 관찰기를 최대한 연장하려 애쓰고 있기도 했지만,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별로 답변할 만한 가치 있는 반론들이랄 게 제기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한데, 제일 우스꽝스러운 것들로는 최태섭과 강준만 등이 있었습니다.
그 중 최태섭은 가장 한남충스런 태도로 풀발기하여 (성공회대 출신의) 사회학자라는 별 거 없는 권위에 유난히 소란스럽게 호소하며 너무 쉬운 자적자질과도 헷갈리는, 자기투사된 한남충과의 싸움에 가일층 열을 올림으로써, 논리적 치명상을 입고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더 큰 목소리로 계속 우기면 언뜻 성공한 것처럼 보이게 (특히 대중을) 속일 수도 있다는 한국 지성계, 최소한 출판계의 매우 악질적인 선례를 만들도록 그냥 내버려 두면서까지! 그래서 곧이어 양심 없는 그 아류들의 출현마저 줄줄이 목도하면서까지! 고귀한 침묵을 유지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행동일지 가끔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고, 이제 주도권을 잃은 채 퇴락해가는 민주평화당 우파의 장외 이데올로그 같은 강준만은 특유의 광적인 스크랩벽으로 주요 사건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 외에는 여기저기서 수집한 인상적 프레임들의 편집을 뛰어 넘는 그 어떤 독창적 해석이나 사유의 깊이도 보여주지 못 해 저절로 단명하고 말았습니다만, 그나마 스스로의 프레임이라곤 딸바보의 아빠 페미니즘 뿐이었고, 대신 그걸 통해 자기도 모르게 그 자신이, 이미 한국 사회의 고전적 가부장제가 결정적으로 해체되었으며, 지금의 주요 젠더 갈등 전선은 가부장 대 그 처자가 아니라 청년 남성 대 청년 여성 간 계층 경쟁이라는 사실을 웅변하는 증거가 되어 주면서도, 아직 자기 머리 속의 상상적 페미니즘이 은연 중 전적으로 LF만을 전제하고 있으며, 그게 자신이 구별 못 하고 옹호해 주고자 하는 대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고, 그 딸들은 아빠가 그냥 유산이나 많이 남기고 빨리 뒈져 주기를 바라는 페미니즘, 나아가 계속되는 살부 모의를 넘어 언제 쥐도 새도 모르게 실지로 실행에 옮길 지(, 옮겼는 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그런 종류의 페미니즘, 그래서 그들 스스로도 자기는 페미니즘이 결코 아니라고 강변하는 그런 집단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별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어쨌든 그들은 여러 한계들 때문에 이번에도 일정 수준의 LF적 제도개혁만을 달성하고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관련해서 말 나온 김에 강준만과는 반대 편향으로 국내의 매우 유력한 한 정파 최고운영진을 포함해, 가부장제 공격을 제1목표로 설정하면 모두 RF로 규정하는 분들이 계시던데 양측 모두 이 표지만으로는 LF와 RF를 전혀 선명히 구분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고명하신 김은실 선생님께서 <양차대전 사이의 프랑스 페미니즘과 출산에 대한 담론 (1919~1939)>이라는 숨은 논문을 꼼꼼하게 찾아내시어 넌지시 지적해 주신 경우를 제외하곤) 언제나 반가운 권명아 선생님께서 역시!! 드디어 예의 상으로라도 모종의 답변을 드리지 않으면 안 될 만한 최초의 고도한 반론을 제기하시며 좋은 가르침도 주셔서 부득이 이렇게 몇 자 적어 올리게 된 것이니 혹여라도 언짢게 생각지 마시고, 반박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정책 협의 정도로 여겨 주시기를 간원드리고자 합니다.


제 침묵의 다른 한 가지 결정적 외부요인으로는 너무나 마음 아프게도 깊이 존경하는 (특히 진영 내) 몇 선생님들께서 가끔 우려를 표명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여러 깊은 판단들이 있으셨겠지만, 저는 그 중 한 가지 이유로 융커 LBG를 추종하는 자유주의자 강준만이 (악의적으로 이 참에 좌파페미니즘까지 싸잡아 오빠페미니즘으로 끼워 넣어 매도하기 위해) 가장 심하게 범하고 있는 오류이기도 한데, 전체 페미니즘 운동 자체에 대한 반대로서의 안티페미니즘과 진영 내부에서 그 중 일부 문제적 극단집단에 대한 비판적 옹호를 전혀 정교하게 구분하지 못 하는 데에서 기인하는 바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CBS나 정관용샘도 포함해) 다른 분들은 대개 이 극단 집단의 실태를 아예 전혀 모른 채 무턱대고 모든 페미니즘은 일단 좋은 것인 줄 알고 섣불리 두둔하셨다 뒤늦게 깜짝 놀라시거나, 감성적 인상 차원에서 그러하셨던 듯 한데, 선생님께서는 그 지성 때문에 이론화까지 감행하시면서 이것이 여성에 대한 분할통치( 시도)라고 설명하시려 하니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이 기회를 빌어 명백히 말씀드리건대 여성들을 통일적인 더구나 (어떠한 비판도, 이견도 허용하지 않으며 그 모든 것은 전부 다 백래쉬에 불과하다고 간단히 처리해 버리는!!) 무오류의 단일집단으로 사고하는 것은 계급을 일괴암적 통일체로 착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환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여러 선생님들의 우려를 존중하는 차원에서도, 다른 실천의 시도와 실험적 관찰이라는 차원에서도 문제집단에 대한 직접 비판은 (적어도 당분간은) 없을 것으로 보이니 혹시 불편하셨다면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 바라며 이하에서는 더 나은 논의와 운동의 발전을 위한 플랫폼으로서의 이론 문제에만 촛점을 맞춰 혜안의 지도편달을 청하고자 합니다.




1. 발본적 신체(의) 유물론 문제
; 생물학 근본주의의 다른 이름

이 건 외에도 여러 컨텍스트에서 RF의 이론적 지반을 구축해 주시려는 징후가 읽혔습니다만, 이 부분이 그 핵심에 있다고 판단돼 먼저 언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한국을 포함한 국제 페미니즘 운동의 이론 지형은 가장 큰 층위에서 RF : QF : [SF-MF 또는 좌파페미니즘]으로 대별되고, 이론 구조 상 이 신체의 문제는 정체성에 대한 입장을 결정짓는 그 핵심 대별점을 구성하기에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근본문제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대별점의 한 편에는 "자궁"(포궁이라더니)근본주의-보지절대주의가 있고, 이들이야말로 원형 생물학주의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정반대쪽에는 이 원시적 페미니즘의 지긋지긋한 폐해와 경화를 비판하며 등장해 그간의 페미니즘 논의를 주도했던 버틀러의 QF가 있고, 이들에 따르면 생물학적 '성'이란 것도 결국 광의의 젠더일 뿐이며, 본질적으로 여성이란 없고, 성관계도 없으며 보지란 그냥 기표에 불과한 것이기에 수행성의 반복적 실천에 의해 자유자재로 성전환이 가능한 것처럼 묘사됩니다. 이런 포스트주의 특유의 교란철학 때문에 일정 정도는 전형적 페미니즘을 해체하며 안티페미니즘 효과를 발생시키는 포스트페미니즘( 성격을 갖는 것)으로 오해될 개연성도 완전히 부인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이것은 보지라는 단 하나의 유일 고정점으로 자아( 정체성)과 세계를 재단하고 보지 아닌 모든 것을 배제하며 절단해 버리려는 강박증[1]의 절대적 고착을 치유하기 위한 임상학적 처치로 이해될 필요가 있었다고 보여지며, 어쨌든 이런 이유들로 버틀러는 마지막 순간까지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을 사수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한때 헬페미를 자처하던 KRF/TERF들은 이에 대한 반동으로 역사무대에 재등장하게 된 부활한 생물학주의자들이며, 때문에 '젠더' 개념자체를 부정하고 비판하는 GCF를 포괄하고 이들에 의하면 트랜스젠더들은 정신 못 차리는 구제불능의 젠신병자들일 뿐입니다.
따라서 엄밀히는 국제적, 역사적 맥락, 즉 세계사적 관점에서는 '신RF'로 분류되는 것이 좀 더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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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철학적 기반이 되고 있으며, 최근 테리 이글턴도 제기한 바 있는 신체(의) 유물론Corporeal Materialism은 수상한 유물론에 불과하며, Feuerbach의 계보에 속하고, 결코 이 근원적 대립을 해결할 수 없으며, 염원 또는 연기하시는 바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페미니즘 진영의 분할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신체(의) 유물론 입장에 서게 되면 상기한 바와 같이 Lacanian 전통 전체를 소거해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며, 버틀러적 QF를 옹호하면 궁극적으로 빛나는 유물론 전통과 특히 정동이론 계열을 폐기해야 하는 이론적 압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와 달리 양자와 그 진영들을 예술적으로 절묘하게 종합하고 접합시키는 Marxism의 이론 전통은 Corporeal Materialism과 달리 본질적으로 사회구성주의를 구성하는 핵심지반이고, 때문에 사회구성주의는 대별하여 버틀러와 라깡주의가 속하는 언어문화적 구성주의 관념론 대 역사적 구성주의 유물론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Corporeal Materialism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해 각고의 노력을 할 경우 Piaget식의 신경생물학적 구성주의를 구축할 수는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것은 결단코 사회구성주의는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스피노자의 공백을 사유해야 하는 이유이고, 알뛰세르 대 라깡이라는 식의 모든 문제설정이 어느 쪽을 택하든 동일하게 범하고 있는 오류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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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론장 문제 ; Topique적 오해

애초에 저는 공론장 문제를 (현대 페미니즘, 특히 현재 국면에서 젠더 갈등의 구체적 실재와 관련해서는 더욱더) 상하층 위계 영역의 문제라기 보다는 공개/개방성의 Mediology에 관한 맥락에서 제기했던 것입니다.

즉 이런 측면에서 공론장이란 상층의 고급 커뮤니케이션 필드라기보다 비본질적 요소로 출입통제되는 특정 성원만의 폐쇄된 밀실 숙덕공론을 벗어나 전방위적으로 개방된 열린 광장의 Holopticist 커뮤니케이션 필드이고 모든 타자적 구성원들과의 전면적 대질과 검증이 이루어지는 인민법정에 가깝습니다.

그 대표적 예증이 또한 아베, 트럼프 언행이나 전두환 회고록, 최근의 5.18 북한군 개입설 등 전현직 최상층과 그 이데올로그들로부터 쏟아져 나온 헛소리, 거짓말, 망언, 망발들에 대한 공론장의 감시와 검증, 심판 기능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구술(생애)사 채록 출판 등 새로운 방법론들의 적극 도입으로 잔존하는 위계구조의 철폐와 문턱/진입장벽 등(에서)의 권위주의적 잔재 청산, 출신과 자격, 계급과 계층을 따지지 않는 전사회적 확산 등을 통해 계승 발전 시켜 나아가야 할 공론장은, 중세 봉건제 하에서 폐쇄당하고, 설교 말씀과 강연을 듣는 예배당으로 대체돼 버린 아고라를 되찾아 온 위대한 혁명의 유산이지, 분쇄하고 해체해야 할 적대적 폐단으로 여겨지지 않으며, 오히려 최근 출판계에서 보이는 상업화, 우중화, 반지성주의화에 영합하는 기능부전을 매우 심각하게 걱정해야 하는 Post-truth적 혼돈의 시대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

나아가 하버마스는 공론장을 Sphere 개념을 사용해 명명했으나 이는 워낙 물질물리적 공간 성격이 강해 차라리 Biosphere처럼 Commonsphere 같은 형태로 '공통장'을 지칭하는 또 다른 용어로서 그 활용 방안을 모색하는 게 오히려 적합할 것으로 보이며, 이에 반하여 'Media 장치들을 포함한 Communication/Commonication[2] Network 회로나 파장 주변에 형성되는 교호 교통 및 감응 작용의 자장'[정의는 필자]이란 의미로서의 Communication Field를 구현하는 유형 중 하나인 Holopticist Communication Field (Model)로 (재)정의할 수 있는 '공론장'은 그런 맥락에서도 다시 한번 더, 공통장과 대체관계가 아니라 공론'장(field)'이 공통'장(sphere)'을 지탱할 필수적 핵심 신경계/요소를 구성하는 관계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지금껏 제게 헛소리를 지껄이며 궤변을 늘어 놓다 비판 받은 그 누구도 공론장 자체를 탓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자신을 피해자로 묘사하며 모든 것을 남 탓 하는 데 너무나 능수능란한 일부 페미니즘의 전복적 발화능력은 정말 대다나긴 대다납니다. ^^;;)




객관적 실재의 왜곡 묘사

바로 그런 이유에서 특히 페미니즘과 관련해서는 더욱더 그들이 트위터 등 SNS나 Online Community 영역들에서 보여준 압도적 발화능력들을 고려하면, 더이상 Gramsci 이래 가야트리 스피박 등이 계속 제기했고 선생님께서도 주목해 오신 '목/몫 없는 자들'이고 Subaltern인지 그야 말로 의문이 아닐 수 없기에 더더구나 상하층 영역의 문제라기 보다는 차라리 태도와 방식의 문제로서 제기했던 것입니다.
이런 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 문제에서 현저한 열세의 위치로 계속 굴러 떨어지면서, 자기 입장과 처지의 변변한 언어화나 발화, 표현에서조차 계속 실패/패배하고 단조로운 메시지들만 반복하는 것은 오히려 군무새 등으로 조롱받으며 번번히 '한남충 사냥'의 손쉬운 먹잇감이 돼 온 청년 남성들이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보력지원 등 명목으로 싸이버 불링 행위를 일삼는 여초 커뮤니티들의 발호와 득세도 또한 이런 연승을 통한 자신감들의 발현으로서 보아야 하며, 이수역 사건 등은 그 자신감이 과잉된 나머지 Offline으로까지 넘쳐 흘러 나온 현상으로 설명되어야 합니다.
현재 이들은 사건기록 한 번 제대로 읽어 보지 않고도, 매우 애매하고 복잡해서 대단히 논쟁적인 각종 사건들까지 전지적으로 예단하며 대한민국 사법부를 노골적으로 압박해 판결을 정반대로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사회세력으로서, 상의를 완탈하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게 해달라는 등의 황당한 요구까지, 그야 말로 원하는 모든 것을 마음 놓고 거침 없이 당당하게 쏟아 내고 있는데 반해, 청년 남성들은 한남충으로 몰려 온갖 욕을 다 먹으면서도 죽어 가는 그 순간까지 찍소리 한 마디 내뱉지 못 한 채 구의역에서, 화력발전소 등에서 쓸쓸히 스러져 가고 있는 현실적 측면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언어게임에서 완패한 청년 남성들이 불가피 선택한 외마디 비명이 정동적, 행동적 표출로서의 소위 '이대남/이영자' 대거 이반현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탈이 단지 민주당 정부로부터만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며 안도하거나 오히려 기뻐하는 좌파가 있다면 자신이 차안대를 쓰고 있거나 혹시 바보는 아닌지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진정한 피해자는 이 과정에서 수없이 모욕당한 채 겁에 질려 숨어 침묵할 수 밖에 없게 되어 버린 성소수자들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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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파 평가, 판단 척도의 부재와 혼란
; 특히 급진성 평가 척도의 완전한 부재와 '급진' 개념의 혼란

고유의 판단 척도가 부재한 상황에서 노예근성에 절어 주체적 명명권을 손수 반납한 채 정확한 번역인가 아닌가의 문제로만 환원해 매달리는 식민성



태극기 집회를 열렬히 좇아 다니며 '햇님 복권'을 끊임없이 외쳐대고 난민 문제에는 목숨 걸고 반대하면서 자신들은 절대 페미니즘 단체가 아니라 강변하고 오히려 기회 있을 때 마다 페미들을 조롱하는 이들의 실태에는 철저히 눈감은 채 '급진적' 페미니즘이라고 추켜세워 주는 행태를 반복했기 때문에, 빨간 유니폼과 당기를 베껴 먹은 충격적 전력이 있는 자유한국당이 이번엔 태극기 집회를 주도하는 김진태 등이 극우파로 지목되자 '급진적 우파'라 불러 제끼며 두둔하는 사태까지 도래하게 된 것이며, 이제 모든 것은 그냥 좌냐 우냐의 완전히 대등하고 대칭적인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 잡는 취향의 문제가 되어 버렸으니 이러한 결과에는 분명한 책임을 느껴야 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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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쨌든 결론적으로는 목숨을 건 판박이 공장형 성형 행렬만 비판해도 누구/남자한테 보이려는 게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한 행위일 뿐이라고 광분하며 날뛰어대던 기만적인 기성 페미니즘에 비하면, 현재 국면의 KRF 단위에서는 탈코운동 등 극히 부분적이지만 진일보한 측면도 있고, 역사상 최대 규모의 여성집회를 성사시키는 등 재평가의 여지도 아예 전혀 없는 건 아니어서, 말씀드린 대로 적어도 당분간은 이들에 대한 전략적 침묵과 실험관찰, 비판유보가 계속 될 것입니다만,
아무리 좋게 평가해 줘도 이 집단은 마치 러다이트 운동과도 같은 자생적 (원시) 대중 페미니즘으로 밖에 판단할 수 없으며, 이에는 절대 맹목적이고 무비판적인 완전 옹호나 동조를 할 수가 없고, 남성이라면 비판적 옹호, 여성이라면 근접 내지 밀착 견인이 도출가능한 최대의 전략 정책이라 사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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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ᆞ 강 평 ; 강 연 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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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먼저 정말 너무나 공교롭게도 최근 최태섭이 출연한 mbc tv 100분토론이 있었고, 그의 고질적 난점이 고스란히 드러난 발언으로 논란을 빚고 있으며, 더구나 반대 토론자 이준석 등이 고 김용균 님 사례도 언급했었나 본데, 요즘 tv를 전혀 시청하지 못하고 있어 필자가 상고(§A)를 게재할 당시는 그 방송에 대한 어떠한 인지도 전혀 없었고, (영 끌리지도 않아서) 현재까지 아직 챙겨 보지는 못한 상태이며, 철저히 본서의 출판 계기에 의해서만 작성된 것이었기에 그 사례가 정확히 어떤 맥락으로 인용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각이 (토론을) 오해하시는 바와 무관하게 여기서는 그 책임이 여성들에게 있다는 따위의 의미가 전혀 아니고, 청년남성들의 고통과 처지는 완전히 도외시한 채 최태섭이 잘 대표하듯 심지어 그 고통을 (청년)남성 자신들의 귀책으로 돌리고, 모든 사회 문제의 원인이 남성들이라며 무분별하게 적으로만 몰아서는 좌파도 실패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는 논지로 언급한 것 뿐이니 혹여라도 오독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사태에도 불구하고 최태섭을 전적으로 옹호하고자 하시는 분들께는 도대체 우리 운동이 식민지 근성에 절인 후 혐오선동까지 버무려 분열만 극대화하는 '한남충론'에까지 기대지 않으면 더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린 것인지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고, 한남충론과 워마드 식 페미니즘에 치를 떨며 합리적인 대안 페미니즘 운동이 출현해 주길 애타게 바라는 광범한 상당수 남, 녀, 성소수자 대중이 폭넓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지해 주시기 바라며, 복잡성으로 인한 오해의 유발을 차단하기 위해 저의 기본 논지를 좀 더 명확히 하고자, 입장을 공유하는 이하의 인용도 일별하시기를 권고 드립니다.


정의당 부대표 정혜연 :
"어제 <100분 토론>에서 최태섭 작가는 고 김용균 씨의 사고를 언급하며 ‘남자니까 안전장치 같은 거 안 해도 된다는 식의 말을 나이 많은 남성들이 한다. 여성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냐?’는 발언을 하며 ‘위험을 경시하는 남성성’이 사고의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지난 8년 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숨진 12명의 분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들 중에는 젊은이도 나이든 이도 있었습니다. 숨진 태안화력발전소의 나이 많은 노동자들은 위험한 노동현장을 바꾸는 것에 매우 절박했습니다.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터에서 남자다워 보이려고, 남자다움을 강요하기 위해 안전장치를 안 하는 이들은 없습니다. 기업이 자신들에게 더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단시간에 많은 일을 강요하고, 위험한 일터를 내버려두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최태섭 작가의 주장은 노동자의 죽음을 노동자들의 부주의 탓으로 돌리는 기업의 논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재작년에 1,777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했습니다. 이마저도 통계의 허점 때문에 축소된 숫자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들은 남녀노소 모두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부유한 4,50대 남성도, 부유한 2,30대 남성도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위험에 처하지 않습니다. 남성 노동자들이 태안화력발전소와 같은 곳에 내몰린다면, 여성 노동자들은 삼성반도체 같은 곳에서 위험에 내몰립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모든 일하는 사람들이 손을 잡고, 서로의 노동환경을 바꾸는 일에 함께하는 일뿐입니다. 젊은 남성 노동자의 죽음에 나이든 남성 노동자들과 여성 노동자들이 손 잡아야 합니다. 이들이 함께 손잡는 것에 방해가 되는 논리는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터를 바꾸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1. 강연은 다소 증상적이고 진행될수록 정념에 압도되어 비평 보다는 분석의 대상에 가까운 것으로 전화되나, 그 높은 강렬도 때문에 심리치료극과 행위예술작품 사이를 오가고 또한 공개분석은 윤리위반이므로, 역시 이론적 메시지만 추출해 집중하기로 합니다.
다만 그 강렬도가 우리에게 던지는 재고와 반성의 여지는 다분하기에 이하의 논의는 잠정적이고 특히 communication에서의 권력현상과 공론장의 위계구조 문제 등은 매우 중요한 주제로서 전적으로 수용하며, 그러나 외면적 전방위 개방성과 내면적 수직위계질서가 교차하는 공론장의 실재에 대하여 그 존재 자체나 긍정성까지 전면 부정하면서 윤리와 논리 등의 규칙에 기반한 감시 기능마저 우회 내지 무력화하는 데로까지 나아가려는 시도에는 반대하고, 가부장제에 대한 여성들의 태도처럼, 위기에 처하자마자 공론장에서의 '권위'에 더욱 소란스럽고 애절하게 호소하면서 각종 잔기술과 사술들을 동원하여 위계구조를 더욱 강화구축하고자 하는 최태섭 삘 물씬 나는 모순적 태도를 고스란히 반복하시는 것에 대하여는 각성을 촉구합니다.



2. '각자의 길'에서 좌충우돌 시행착오를 최소화해 줄 사전 사고실험으로서의 토론 협의



3. 다시 한 번 Corporeal Materialism의 문제
; 신체(의 차이)를 절대화하는 (TE)RF의 철학사상으로서의 CorpMat


3.1. CM=C(R)F-TERF 간의 필연적 연관과 한국적 특수성으로서의 회화화된 TERF를 통한 논점회피

선생님께서는 관습에 젖어 RF와 TERF 사이에 아주 명확하고 간단한 절단선이 존재하기라도 한다는 듯 손쉽게 말씀하시지만, 사실 TERF의 "사상"적 논리는 현재 한국의 대중판 TERF들에 의해 천박하게 속류화된 그런 "유기체주의 신체유물론"이 전혀 아니고, 트랜스젠더들도 말씀처럼 무슨 비유기체나 기계를 체내 이식한 싸이보그들이 아니라 완전한 유기체인 자기 조직의 일부만을 변형한 것에 불과하며 그 한국의 대중판 속류 TERF들도 말씀하시는 그런 "유기체주의 신체유물론"자들은 아니어서 그들이 규정하는 '생물학적 순수 여성'의 범주에도 이미 보형물 삽입에 의한 유방확대, 비첨성형, 융비술 여성 환자 등등이 포함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대하시는 바와는 달리 유기(성) 신체 여부가 TERF로부터 신체유물론을 분리 구제시켜주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TERF 사상 그 자체는 속류, 극단주의라기 보다 아주 전형적인 본류 여성주의의 중핵이라 할 수 있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오늘날 한국에서도 TERF가 그토록 강한 흡입력을 가지고 손쉽게 젊은 여성 대중들을 빨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상의 핵심에 바로 다음과 같은 신체유물론들의 전형이 자리잡고 있으며 국내도 공식적 출판물을 통해 이미 2001년에 문제가 된 바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리수여! 여자가 되는 것은 예쁘고 섹시하게 성숙하여 남자를 사랑하고, 그의 아이를 낳고 키우며 가정을 꾸리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여자가 되는 것은 이 땅의 소수자의 고통을 온몸으로 접수한다는 약속이며, 몸의 산 하나 넘어서 그대가 도착한 곳은 생의 절정인 것 같지만, 그곳은 세상의 모든 딸들의 출발 지점에 지나지 않는다."
이경(2001). "하리수, 그 날짜 변경선의 코드 읽기: 하리수를 부탁해"@{여/성이론}no.5 '2001. pp1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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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국내에서도 연이어 제기되어 온 여러 Corporeal Feminism 계열 주장들의 선후 관계는 아직 정밀하게 확정할 수 없으나, 애정하시는 {바람계곡의 페미니즘} 박병학 씨[3]가 그 총노선의 도저히 지속불가능한 자기모순에 의해 내파와 자폭을 향해 치달아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중요한 기폭제가 되어 버린 최지혜라는 (ネット おかま) 가명 계정에서의 매우 역설적인 '남성 페미니스트 불가론' 선동과정에서 전개한 바도 있는 '몸 경험'(의) 페미니즘론[4] 등도 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줄곧 제기되어 왔던 이런 "여성주의"적 전형 논리의 자연스런 연장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TERF를 포함한 이들 모두가 실은 이미 외형적 물질주의 신체유물론을 넘어, 태어난 그 순간부터 신체 깊숙이 새겨져 집적돼 온 피해 경험과 고통과 상흔의 아카이브로서의 신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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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표면적으로는 TERF(와의 연계)를 강하게 부정하나 CM, 공론장의 전면부정, 운동과 범죄론, ... 등등 그 결(론적 효)과에 있어서는 TERF를 견제할 수 있는 모든 핵심적 이론 장치들을 모두 반대하는 데에만 골몰하고 있기 때문에 저의에 의혹을 가지지 않을래야 가지지 않을 수 없고 더구나 (이 문제에 대하여는) 어떠한 초월적 비판의식도, 반성적 지성[5]도 기대할 수 없는 sns RF 장본인( 또는 분리불가능한 밀착상태).
특히 범죄, 특히 폭력은 필요불가결하고 불가피한 최소량으로 감축해 나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경주해야 하며, 그 어떤 논리로도 이를 방기하고 정당화할 땐 곧 반혁명의 빌미, 또는 그 자신이 스딸린처럼 반혁명 그 자체로 변질되어 버리기 쉬우며 내내 영원히, 혁명은 존재하지 않는 불가능한 환상과 착각에 불과할 뿐이라는 수정주의 혁명사관을 소환하게 될 것이기에 이에 대한 각별한 주의가 요구됨.



※ 취지를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는 듯한 일각이 발견되어 다시 한번 관련 입장을 명백히 요약 게재함.

계급과 성별, 인종, 민족은 각자의 정체성에 따라 선택할 문제가 아니고, 더구나 계급 대 {성별, 인종, 민족} 간의 양자택일 문제는 전혀 아니며, 융합된 하나의 폭압적 지배-착취수탈 체제가 계급, 젠더, (생물/인)종(민)족 별 체계라는 3(차)원 공간 변수축들로 시기 및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모하며 사영되어 출몰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에 당장 눈 앞의 조삼모사 "더 큰 '이익'"에 따라 그때그때 사분오열 이합집산하는 부문별 조합주의를 극복하고 총체적 공동전선을 형성해야만 한다는 것이 우리의 일관된 기본 입장입니다.

다만, (그 일각을 포함) 흔히들 막연히 기대하고 계시는 바와는 달리 구조 위기기에 피지배계층은 정치적으로 활성화되고 고양될 뿐 그 결과가 자연발생적으로 반드시 진보로 귀결된다는 보장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워마드의 경우는 특히 우파 정보조직 등에서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여남분열과 극우화 공작을 펼치고 있는 여러 정황이 포착되고 있기에 이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비판적 개입을 시도해온 것 뿐이니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 주 석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강박증은 증상이 매우 다양하고 변이가 크기 때문에 증상에 입각한 진단으로는 의미가 없고 이미 Freud 단계에서 많은 실패를 겪었으며, 대안적으로 라깡주의적 구조 분석이 유효성을 발휘하는데 특히 OCD와 Hysteria의 대칭 구조 관계를 분석하면 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음.
(요약하면, Hysteria는 정신구조 상에서 주체가 억압되고 타자에 의해 점령되어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게 되고, 그 반동적 대칭쌍으로 강박증은 타자가 압살되고 주체만이 존재함.)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 대중화의 신호탄이 된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많은 여성들이 반복적으로 증언하는 "다시는 이전으로 되돌아 가지 못할 변화"도 바로 이 심리적 전환 현상이 의식의 수면으로까지 떠오른 표상일 수 있음.


[2] commOnication
=communication for commonisation
=commonisation by/thru communication : 공통되기


[3]
박가분. "한 남성은 왜 ‘페미니스트 최지혜’를 연기했을까? ; 여성 페미니스트를 연기한 운동권 남성"@{Real News}'2018-06-27

: ‘최지혜’라는 자칭 페미니스트의 정체가 탄로 났다. 넷상의 래디컬 여성 페미니스트로 알려졌던 그가 실은 진보성향 매체 <참세상>에 다수 기고한 (운동권 출신) 남성이었다. 실수로 자신의 실명이 적힌 다른 숨겨진 인스타그램 계정을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과 연동한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유독 군대 문제에서 흥분하는 모습을 보며 그가 남성이 아닐까, 의심하는 사람들은 꽤 많았다.


우선 최지혜라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살펴보자. 그는 평소 남성 중심사회를 비판하며 페미니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남성을 싸잡아 비난하는 화법으로 페이스북에서 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또한 그는 <슬로우뉴스>에 ‘여성을 살해하는 남성사회 구조가 존재한다’와 같은 자극적인 내용의 글을 기고했으며, 페이스북에 ‘가랑이 사이에 방울과 육봉이 달렸다’는 남성 비하 발언을 게재한 적도 있다. 물론 그의 정체가 드러난 마당에 그의 이러한 발언들은 일종의 블랙 코미디다.


한편 그의 글은 평소에도 (과연 일상에서 여성과 제대로 마주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여성성을 극단적으로 숭배하면서 반대로 남성성을 폄하하는 화법을 구사하곤 했다. 예를 들어 그는 남성에 대해 잠재적인 가해자 내지는 범죄 공모자 등의 혐의를 씌웠으며, 특히 남성은 여성을 인격적으로 대할 줄 모르는 결함투성이의 존재로 묘사하는 식의 화법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은 병적인 자기혐오 혹은 여성에 대한 극단적인 선망을 드러내는 대목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자아낸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가 평소 젠더문제에 대해 ‘남성의 발언권’을 부정하는 입장을 자주 내비쳤다는 것이다. 일례로 그는 남녀의 “몸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남성 페미니스트는 존재할 수 없다”는 발언을 했다. 래디컬 페미니즘의 흔한 주장과도 일맥상통하는 주장이긴 하지만 최지혜라는 가면 뒤에 연기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전면부정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대목이다.


그가 명백한 ‘자기분열’을 감수하면서까지 위태로운 연기를 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운동권의 소외감과 위기의식

첫 번째는 운동권 출신의 소외감이다. 운동권 출신이 주류사회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퇴물로 취급받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을 넘어 극단적인 증오로까지 치닫는 것은 흔한 일이다. 영화 <바더 마인호프>에서도 일군의 독일 청년 좌파들이 68혁명의 열기가 식은 이후 점점 테러리즘에 경도된 과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박병학=최지혜의 ‘자아분열’에는 단지 흔한 운동권의 몰락으로만 정리할 수 없는 또 다른 맥락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페미니즘의 대중화라는 현상이다. 최근의 대중적 페미니즘 신드롬은 역설적으로 진보진영의 사회 운동적인 개입 역량이 완전히 파탄 났다는 신호를 연달아 보내고 있다. 사실 메갈리아를 열심히 옹호해온 페미니즘 성향 지식인조차도 최근 난민 이슈를 둘러싼 넷페미니즘의 격렬한 난민혐오 정서에 당혹스러움을 느끼고 있다. 이에 윤김지영과 같은 ‘워마드 부역자’들은 아예 그들과 같은 난민혐오 노선으로 돌아선 바 있다.


또한 최근 몰카범죄와 관련 2차가해를 일삼는 워마드와 같은 극단적인 남성혐오주의자들의 준동에서 볼 수 있듯이, 진보진영은 막장으로 치달은 페미니즘 담론의 양상에 개입할 ‘힘’을 잃었다. 그러한 개입의 서툰 시도조차 워마드 유저로부터 ‘꿘충’이라는 욕설로 돌아올 뿐이다. 특히 남성 운동권의 경우에는 ‘진보한남’이라는 소리를 듣기 딱 좋은 위치이다.

박병학이 이러한 상황의 괴로운 모순으로부터 눈을 돌리면서도 동시에 손쉽게 대중적 페미니즘 담론에 편승하며 마치 그들과 같은 정의를 공유하고 있다는 환상을 유지하려는 방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최지혜’라는, 뭇 여성으로부터 ‘걸크러쉬’를 자아내는 또 다른 여성-자아를 연기하는 것 아니었을까. 물론 이미 이전에도 그의 정체를 눈치챈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연기에는 그리 높은 점수를 줄 수는 없지만 말이다.


성별 분리 프레임에 아부해온 진보담론

한편 성별 분리 프레임에 대해 무비판적인 진보의 담론적 지형도 박병학이 최지혜라는 인물을 연기하는데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진보진영은 젠더문제에서 위선적이고 날조된 자기고백 외의 남성 측의 발언권을 일절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치 남성이 부당한 공격에 대해서마저 침묵을 강요당하는 게 ‘정의’인 양 처신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의가 아니다. 특히 이러한 경직된 태도는 이 문제에서 남성과 여성이 공통의 문제의식과 경험지평을 공유할 수 있다는 사회적 상상력 자체를 심각하게 제약하고 말았다.

이같은 성별 분리 프레임에 굴복해가는 과정은 점차 각자 자신의 사적인 피해의식과 원한 감정에 탐닉하는 이른바 ‘정체성 정치’에 진보가 굴복해온 과정과 다르지 않다. 특히 이것은 사회운동 자체의 이론적·실천적 오류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과 논쟁 그리고 반성적 인식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앞서 설명했듯이 메갈·워마드 류의 남성혐오 및 인종주의 성향에 제동을 가할 역량마저 상실하게 했다.


시민적 공동성이 부재한 선민의식

이처럼 정체성 정치에 매몰되며 계층 간의 상호분리를 강화하는 경향은 남성·여성, 장애인·비장애인, 청년·중장년층 등 서로 다른 계층 사이의 시민으로서 공통의 정체성을 환기하는 것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해외에서도 성소수자, 인종적 소수자 등의 특정 정체성의 경험과 지엽적인 생태이슈에 매몰된 정체성 정치가 유행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진보정치의 대중적 외연이 축소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동시대성’을 공유하는 것과 별개로 한국의 경우에는 나름의 담론적 후진성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한국의 정체성 정치는 말로만 ‘시민적 공공성’을 외치지만 실은 ‘지사적 선각자’의 위치에 담론적 특권을 부여하는 전근대적 후진성과도 기묘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다. 이것은 동료 시민들을 공통의 대의에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의 ‘깨어 있음’을 더욱 강조하고 ‘훈계하는’ 어조를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담론지형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실제 박병학의 언행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이러한 선민의식이 엿보인다. 그러한 선민의식은 남성 대상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무한도전 시청자, 평범한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 군복무자 등 그 누구라도 페미니즘 사상에 입각한 가차 없는 비평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는 다수를 일방적으로 한심한 인간들로 규정하고 낙인찍는 데서 오는 카타르시스의 추구만 존재하지 도대체 이것이 어떠한 어젠다로 이어지는 것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 이것은 근대시민의 태도라기보다는 조선시대 사대부의 도덕주의적인 태도 혹은 종말론적 복음주의(evangelism)를 설파하는 보수 기독교계의 태도와 대단히 유사하다.


병증을 키운 책임의 팔할은 진보언론

문제는 아무런 검증 없이 래디컬 여성 페미니스트의 목소리인 양 지면에 박병학=최지혜의 발언을 지면에 실었던 언론이다. 그는 앞서 언급한 <슬로우뉴스>는 물론이고 <허핑턴포스트>에도 장기간 연재했다. 이뿐만 아니라 박병학=최지혜가 ‘바람계곡의 페미니즘’의 운영자로 유력하게 추정되는 상황에서 그와의 무려 ‘페이스북 메시지’ 인터뷰를 진행한 <한겨레>도 비판의 논외가 될 수 없다.


박병학의 최지혜 연기는 단순한 해프닝 이상의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의 자아분열은 성별 분리 프레임, 시민적 공동성의 상실, 사회운동의 무기력화, 남성혐오 경향에 대한 아부 등 진보진영이 만든 왜곡된 담론 프레임과 지형을 반영한다.

박병학이라는 인물 자신이 병적이라기보다는 남성 페미니스트조차도 자신을 여성으로 ‘상상’해야만 비로소 여성의 대의에 참여할 수 있다고 믿는 지금의 상황이 병적이라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앞서 보았듯 진보진영 내 시민적 공동성이 완전히 상실되었다는 징후이다.

이처럼 언뜻 보면 희귀한 해프닝처럼 보이는 현상 배후에는 대중적 정치의 실패, 상처 입은 자아에의 우울증적 몰입, 자기모순과 혼란 등등 진보진영에 만연한 현실적 요소들이 자리 잡고 있다. 누가 이러한 병증을 키웠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4]
"왜 남성 페미니스트는 존재할 수 없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을 나는 10만 개 정도 준비할 수 있지만 지금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몸의 경험'이다. 남성의 몸을 지닌 채 성장한 사람은 몸으로 겪으며 마음에 각인된 경험과 기억이 여성의 것과 다르다. 비교가 불가능할 만큼 다르다. 완전히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다르다. 물론 여성들 사이에서도 크고 작은 경험의 차이가 존재하겠지만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구조적이며 그래서 결정적이다."
인용 출처 : 최지혜 facebook


([5] 문제해결에 있어 현재 상태와 해법의 관행에 대하여 새로운 변화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반성적' 지성을 일컬으며, 지성 전체를 의미하지는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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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tris 2019-04-25 0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스탠스 자체는 공감이 안가지만 대단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