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젠가
이수현 지음 / 메이킹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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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함을 갖고자 하는, 안락함으로부터 먼 사람들의 이야기. 《유리 젠가》 속 단편 「시체놀이」,  「유리 젠가」,  「달팽이 키우기」,  「발효의 시간」에는 취업 준비생, 사랑에 낚인 피해자, 사이가 틀어진 커플, 대학을 포기하고 대를 잇기로 결심한 청년이 나온다. 모두 쉽지 않은 길을 간다. 위태롭게 쌓아 올린 유리 젠가가 마음속에 가득 들어찼고 금방이라도 내 존재 자체가 와장창 부서질 것(p. 15-16) 같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위태로운 젠가의 끝에 서서' 비틀거리고 있는(p. 99) 그런 모습으로 말이다. 


「시체놀이」에는 생계를 위해 시체가 된 '나'가 나온다. '살아서 이 차디찬 냉기를 느끼는 순간이 그저 감사하다(p. 51)'고 말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그 심정이 어떨지를 생각해 봤다. 살기 위해 죽는 '나'가 안쓰럽기도 하고 애쓰는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다. '나'는 '어떤 것으로도 대체되지도 않고, 아주 소멸해버리지도 않을 내 존재에 대한 확신(p. 52)'을 갖기를 원하는데, 시체 역할은 자신의 존재를 지워야 하는 일이다. '나'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쓰다 만 자소서 속 커서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그 커서가 되어 '나'의 앞날을 그리고 싶을 지경이다. 뒷이야기가 궁금하다.

「유리 젠가」에는 서른여섯 살 '나'가 나온다. 주변에서 결혼하라는 성화에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권태기 커플이 된 현실이 씁쓸하기만 하다. '나'는 더 이상 진전이 없는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 실제 사회 이슈와도 맞닿아 있는 내용이다 보니 뉴스 뒷이야기를 읽는 기분이었다. 거짓인 줄 의심조차 않는 그런 모습에서 외로움과 위태로움이 느껴졌다.

「달팽이 키우기」에는 코로나로 직격탄을 맞은 커플이 나온다. 여자는 방과 후 교사, 남자는 여행사 직원이다. 두 사람은 코로나로 인해 버티고 버티다 무너졌다. 직업과 애정을 잃었고 미래마저 불투명해졌다. 코로나가 극심할 때 월급에 직격탄을 맞았던 내 모습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전염병에 대한 공포는 나를 집어삼켰다. 아마 저 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달팽이의 움직임처럼 조금은 더디겠지만 서서히, 서서히 제 삶을 그려나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리라(p. 143)'라고 하는 둘의 모습을 보며 일상에의 회복을 꿈꾼다. "분명 더 나아질 거야."

「발효의 시간」은 대학을 가지 않고 가업을 잇겠다고 하는 아들과 반대하는 아버지 사이의 갈등이 드러난 소설이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빵을 대하는 마음을 보고 자랐다. 존경하는 마음으로 가업을 잇고자 한다. 아들을 반대하는 아버지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빵을 만들 아들이 걱정되었을 것이다. 둘의 갈등이 잘 봉합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내 마음도 빵처럼 부풀었다. 문득 엄마가 만든 아로니아 잼이 생각났다. 씁쓸한 맛이라는 편견에 팔리지 않는 아로니아 잼. 나도 뭔가 방법이 필요하다.


작가님의 글을 통해 잠시 머물렀던 시간을 돌이켜보면 단짠단짠이다. 인물들의 팍팍한 삶을 들여다보며 같이 괴로웠다가, 희망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려는 모습을 보며 '그래도 괜찮구나.'하는 마음에 희망이 생겼다. 위태롭지만 예쁜 유리 젠가처럼. 다시 쌓아보자고 마음먹게 되는 소설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 리뷰입니다.

철아. 자식은 아비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 네 할아버지는 뭐 하나 허투루 하지 않으셨고 매일 새벽에 눈을 떠 달과 함께 하루를 마감하셨단다. 나이가 지긋한 양반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닐 텐데도 말이다. 당신께선 늘 처음같이 반죽을 빚고, 빵을 구우셨어. 하도 오래 서 있다보니 다리가 퉁퉁 붓고, 손에 물집이 생기는 일이 많았는데도 말이지. 나도 너에게 그런 아비였으면 좋겠구나. - P156

전하지 못한 말이 입에 깔깔하게 걸릴 때, 네가 읽을 수 있는 문장이 되고 싶어. 스스로 지탱할 직함을 짊어지고 달려온 너를, 오늘 하루도 고생했다며 온기를 얹고 싶어. 신이 빚고 나서 잊어버린 작고 까만 찰흙 인형처럼, 켜켜이 쌓인 유리 젠가처럼 위태로운 세계를 묵묵히 살아내 온 네게 말하고 싶어. 잠시 이 구절에 편히 머물러도 된다고 말이야.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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