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야 가의 전설 - 기담 수집가의 환상 노트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5
츠하라 야스미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작가 쓰하라 야스미는 미스터리와 환상소설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작가라고 합니다. 루피너스 탐정단 시리즈로 청춘소설, 혹은 라이트노벨에 가까운 가볍고 깔끔한 감성을 보여주더니 이번에는 아시야 가의 전설이라는 호러의 기운이 짙은 소설로 찾아왔습니다.아시야 가의 전설에 수록된 단편은 반곡 터널, 아시야 가의 몰락, 고양이 등 여자, 카르키노스, 초서기, 케르베로스, 송장벌레, 물소떼 이렇게 8편으로 호러와 환상소설 가운데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 책에서 주인공 콤비라 할 수 있는 사루와타리와 백작이 겪는 일들이 주가 되는데, 사루와타리는 어쩐지 순수한 아이같다는 인상을 주는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라기 보다는, 좌절과 타락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같은 일면이 남아있습니다. 사루와타리는 때때로 환상에 깊이 빠져들어 갈 듯한 아슬아슬함을 보이는데, 그것을 붙잡아 주는 게 백작입니다. 사루와타리의 모습을 보며 교고쿠 나츠히코의 소설에서 나오는 세키구치가 문득 생각났습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하염없이 파고들어가는 세키구치의 옆에서 그를 챙겨주고, 피안으로 자신도 모르게 향할 듯한 그를 멈추게 하는 것이 교고쿠도, 추젠지가 아니던가요.

반곡 터널은 8페이지도 되지 않는 굉장히 짧은 단편인데, 짧은 것에 비해 임팩트가 굉장히 강합니다. 터널에 관련된 괴담이 생각난다고 해야할까요. 보통 구제나 중고를 기피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 전에 사용했던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했는지 아무것도 모르지 않는가' 인데 이 단편을 보면 그 말에 전격 수긍할 수밖에 없을 분위기입니다. 결말의 마지막 세줄로 오싹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단편인 아시야 가의 몰락, 일곱번째 단편인 송장벌레를 보면 얼핏 떠오르는 소설이 있습니다. 바로 에드거 앨런 포의 어셔 가의 몰락과 황금벌레입니다. 오마주이자 포를 향한 경외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읽는 독자들에게는 익숙한 작가의 이름과 그에 대한 작가의 오마주가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됩니다. 쓰하라 야스미가 에드거 앨런 포에 대한 경의를 나타내면서도, 자신의 색깔을 넣어 잘 버무렸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시야 가의 몰락은 아시야 도만 오우치카가미라는 조루리(샤미센 반주에 맞춰 창을 하는 낭송극)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헤이안 시대의 전설적인 음양사 아베노 세이메이의 어머니가 시노다 숲의 백여우라는 내용을 기본으로 만들어진 조루리입니다. 사루와타리가 대학 시절 잠시 친밀히 지냈던 하타 유리코라는 여자가 '여우에 홀리면 안된다'라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로 이어지죠.  백작과 사루와타리가 두부 맛집 기행을 위해 여러 지역을 가보다가 우연히 나눈 대화에서 나온 이 이야기에 백작은 그녀의 본가 쪽으로 가보는 게 어떤가 묻습니다. 백작은 괴기소설을 쓰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이로, 그런 분야에는 통달해있으니 궁금증이 동할 만도 하지요. 결국 둘은 그곳으로 향하게 되고, 기이한 일을 겪습니다. 하타 가문만이 사는 듯한 페쇄적인 마을. 그곳에 사는 모두는 하얗고 갸름한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닮아 있습니다. 유리코가 말했던 여우는 누구일까요? 왜 그녀는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요?

이 이야기를 특별히 서술한 것은 표제작이 아시야 가의 전설로서 표지도 그에 맞춰 나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재밌게 읽은 탓도 있습니다. 유메바쿠라 마쿠의 음양사를 읽고 세이메이와 헤이안 시대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는 저이기에, 이런 이야기에는 구미가 당기거든요.

책의 표지에는 아마 하타 가문의 유리코가 아닐까 싶은 어여쁜 아가씨가 그려져 있는데, 사실 이 표지를 보면 '일본 기담의 스타일리스트 쓰하라 야스미가 선사하는 환상지옥!'이라든가 '기담 수집가의 환상 노트'같은 문구가 쉽게 와닿지 않는 느낌입니다. 내용이 너무 가볍게 보인다고나 할까요. 일단 일본 기담이자 환상문학에 걸쳐져 있다는 소개와 긍정적인 평가에 이 책을 집어들었으나, 표지를 보고 큰 기대가 되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표지를 보며 여성층을 공략한 게 아닐까 하는 어정쩡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용을 읽고 나니 표지가 살짝 더 아쉽네요. 예쁜 표지이지만 내용과 살짝 괴리감이 느껴져요. 내용은 오히려 더 어둡고 묵직한 느낌이 강합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더해지는데, 절대 밝은 느낌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두운 밤에 꾸는 악몽에 더 가깝다고 할까요.

표지만 보고 속단하여 그냥 넘겨버린 분이 없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언젠가 사루와타리와 백작을 피카르디의 장미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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