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
6.
그런데 이름이 나오지 않는 '나'가 있다.
그때 나는 스물세 살 교대 복학생이다. 모나미 볼펜에 트라우마를 가진 나, 담뱃불로 지져질까봐 조는 게 공포였던 나, 죽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한 나, 어쩌면 도청을 지키고 평생 부끄러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한 낙관을 지녔던 나, 헌혈하려고 끝없이 줄 선 병원 입구와 트럭 위로 주먹밥과 딸기를 올려주던 여자들을 기억하는 나, 목청껏 함께 애국가와 아리랑을 부른 나, 총을 나눠 가졌지만 아무도 쏘지 않고 아무도 죽이지 않은 나, 복도에 머리를 박고 엎드렸지만 총기를 소지했으므로 등에 매직으로 극렬분자라고 쓰인 나,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그날을 기억하고 분노하는 김진수에게 소주상만 차려주곤 이불을 덮어쓰고 돌아누운 나,
내가 날마다 만나는 모든 이들이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나,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혼자서 싸우는 나.
누구나 '나'가 될 수 있다.
7.
책에서 중학교 3학년 학생의 목소리를 읽으며 우리 아이들이 떠올랐다. 중학생과 같이 읽고 싶은 책이라고 생각했다.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분이 계셨다. 역사를 전공하셨다는 분은 학창시절에 5.18 다큐멘터리를 보고 점심도 못 먹었다고 하셨다. 잔인한 장면이 아른거려 성인이 되어서도 자꾸 외면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아이들에게 사실을 무작정 직시하라고 하는 것도 강요가 될 수 있다고, 눈높이에 맞춘 교육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10년 전부터ㅡ열다섯 살부터ㅡ채식을 하셨다는 분은 말씀하셨다.
"저는 채식을 결심했던 날이 생생히 기억나요. 네이버 도전만화에서 동물권에 대한 웹툰을 보았고, 호기심에 영상을 찾아보았어요. 동물 보호 단체인 PETA에서 도축 현장을 고발하는 영상을 올리는데, 5시간 동안 눈도 떼지 못하고 봤던 것 같아요.
그날 저녁, 아버지가 감자탕을 사 오셨어요. 그 감자탕을 보고 토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 보기엔 너무 끔찍한 영상들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 영상들을 또 볼 거예요.
잔혹한 현실을 강제로 보게 할 수는 없지만 알려줄 필요는 있는 것 같아요."
내가 겪지 않은 이 다양한 경험들을 듣는 시간이 소중했다.
8.
제목 『소년이 온다』는 무엇을 의미할까?
- 진실이 온다.
- 잃어버린 소년이, 소년의 기억이 온다.
- 죽은 어린 영혼이 가해자의 잘못을 기억하기 위해 다시 온다.
-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리로 쏟아져 나간, 인간이기 때문에 나간 순수한 사람들이 온다.
- 정미는 동생이 올 거라고, 동호는 정대가 올 거라고, 엄마는 동호가 올 거라고, 그렇게 올 거라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기다리던 사람이 온다.
- 이념이나 사상 때문이 아니라, 양심이나 도덕이나 민주주의 같은 건 몰라도, 인간이면 이러면 안 되기 때문에 움직였던 순수한 영혼들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