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능적 일탈을 향한 현대판 전기소설(傳奇小說)의 유쾌한 실험 >
- 마광수의 <광마잡담>에 대하여
김성수(연세대 교수, 문학평론가)
1. 마광수 문학의 모태
마광수 문학의 모든 것은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1989)에서 발원하고 있다. 그로테스크하게 화장을 한 여인의 강렬한 얼굴이 클로즈업 되어 있는 파격적인 표지의 이 시집에는 작가의 독특한 문학 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는 핵심 정보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그래서 이 시집을 읽어 보면 마광수의 에세이와 시와 소설의 주제 및 모티프들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창작된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상상력의 모태를 발견하게 된다. 이를테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권태>, <자궁 속으로>, <사랑받지 못하여>,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등의 시들은 이후 에세이집이나 장편소설의 표제 및 주제로 확장되며,<손톱>, <그 여자의 손톱>, <뾰족구두>, <사랑하는 이여, 난 당신 손톱이 좋았지> 등에서 피력된 관능적 상상력은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나, 장편소설 <권태>(1990)와 <즐거운 사라>(1992)에서 마광수 문학의 핵심 모티프 가운데 하나인 ‘손톱 페티시즘’으로 묘사된다. <모든 것이 불안하다>, <불편한 것은 아름답다>, <거꾸로 본 세상은 아름답다> 등에 녹아 있는 ‘불안함’ ‘불편함’ ‘거꾸로 보기’와 같은 시상(詩想)들에도 세상의 사물과 현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관찰하여 다시 해석해내려는 마광수 문학 특유의 개성적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2000)를 비롯하여, 전기소설의 양식에 관능적 상상력을 한껏 발휘하여 창작된 <광마일기>(1990)와 신작 장편소설 <광마잡담(狂馬雜談)>(2005)에 이르기까지 마광수 문학의 고유 브랜드라고 할 수 있는 ‘관능적 상상력’ ‘페티시즘’ ‘유미적 쾌락주의’의 문학관 또한 <가자, 장미여관으로>에 그 원천을 두고 있어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한 작가가 한 권의 시집으로부터 시종일관 자신의 문학적 상상력과 모티프를 가져오고 있다는 것은 우리 현대문학의 흐름에서 볼 때에 무척 흥미로운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마광수가 이 시집에서 자신의 문학관을 포함하여 향후에 전개해 나갈 작품 세계에 대해 선언적으로 피력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발언은 그의 시와 에세이를 비롯한 일련의 소설들과 <광마잡담>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도 좋은 지표가 된다.
[ 누구나 잘 사는 사회, 누구나 스스로의 야한 아름다움을 나르시시즘으로 즐길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만 한다.(…) 모든 사람들이 ‘괴로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즐거운 노동’, 이를 테면 화장이나 손톱기르기 등을 통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노동에서 진짜 관능적 쾌감을 얻을 수 있도록 구체적인 해결책을 모색해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유미주의에 바탕을 둔 쾌락주의, 또는 복지지상주의(福祉至上主義)가 요즘의 내 신조라면 신조라고 할 수 있다. (…) 즐거운 권태와 감미로운 퇴폐미의 결합을 통한 관능적 상상력의 확장은 우리의 사고를 보다 자유롭고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인류의 역사는 상상을 현실화시키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꿈이 없는 현실은 무의미한 것이고 꿈과 현실은 분리되지 않는다. 꿈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적 실천을 가능케 해주는 원동력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가자, 장미여관으로>의 <책머리에> 중에서)
이 시집에는 10대 중반의 청소년기에서부터 30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창작된 마광수의 시들이 망라되어 있어 그의 관능적 미의식의 기저와 유미주의적 문학관의 원천을 뿌리에서부터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는 출간 당시 ‘성(性)’을 소재로 한 독특한 주제 의식과 감각적인 표현으로 우리 문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 시집은 마광수의 문학에 대한 호불호와 견해 차이와는 별도로 그의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작가의 창조적 상상력과 문학적 입장의 원천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텍스트 역할을 하고 있어 꼼꼼히 재음미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유미주의'와 ‘관능적 상상력’의 확장을 통해 ‘실용주의적 쾌락주의’나 ‘복지지상주의 이론’을 문학적 현실 속에서 실현해보려는 작가의 소망적 사고가 이번 신작 장편소설 <광마잡담>에서도 여전히 강조되고 있다.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이후 만 5년 만에 새롭게 내놓는 <광마잡담>에는 그의 초기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에서 피력된 개성적 문학관이나 세계를 이해하는 독창적 관점이 <권태>와 <광마일기>를 계승하며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2. 현대판 ‘전기소설’의 실험
그의 첫 장편소설 <권태>가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느낌을 받도록 ‘페티시즘’을 주요 모티프로 하여 판타스틱한 묘사에 치중한 작품이었다면, <광마잡담>은 관능적 묘사와 아울러 서사적 스토리텔링이 주는 속도감 넘치는 재미를 느끼도록 의도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광마잡담>에는 모두 아홉 편의 이야기가 연작 형태로 연결되어 각 작품의 독립된 내용 사이에 유기적 관계가 이루어지도록 배열되어 있다. <광마잡담>에 배열된 아홉 편의 이야기 가운데 일인칭 ‘나’가 주인공으로 되어 있는 것은 <인어 이야기>, <두 여인>, <무덤 속의 여인>, <다이아나 이야기>, <별은 멀어도> 다섯 편이고, 삼인칭은 <모란꽃 이야기>, <공처가 이야기>, <노루 이야기>, <도깨비집 이야기> 네 편이다.
<광마잡담>은 ‘전기소설(傳奇小說)’ 양식의 현대적 적용, ‘사소설’ 기법의 도입, 그리고 ‘가벼움’의 서술미학 실험 등 몇 가지 면에서 작가의 창작 의도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우선 이 소설은 우리의 전통소설 양식인 ‘전기소설’을 실험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 작가는 <광마잡담>의 선행 작품인 <광마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내가 몽환적인 얘기를 사이사이에 끼워 넣은 것은 전기소설적(傳奇小說的)인 흥취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전체 줄거리와도 상관성이 있게 함으로써 소설에서의 ‘상상적 현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꽃의 요정이 나오는 얘기인 <꽃과 같이>의 무대는 설악산 백담사가 되었고, 내 친구가 선녀의 핏줄이었다는 모티프로 이루어진 <꿈길에서>는 6.25 동란이 시대 배경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처녀 귀신 야희와의 연애담인 <달 가고 해 가면>에서는 연세대학교 뒷산인 무악산이 등장하게 되었다.]
(<내 소설 <광마일기>에 대하여>, <사라를 위한 변명>, 열음사, 1994, 135~136쪽)
작가가 밝히고 있듯이, <광마일기>의 창작 의도는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사소설 기법을 빌려 ‘현대판 전기소설’을 시도해 보고자 한 데 있다. 그리고 소설의 주된 정서로는 ‘고급한 센티멘탈리즘’을 위주로 하고, 거기에 ‘세련된 에로티시즘’을 가미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은 작의(作意)는 서양의 문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 이론에 근거하여 쓰여진 ‘재현(representation)의 문학’임에 비해, 동양의 문학은 현실과 현상을 뛰어넘어 본체의 신비를 캐보려고 노력한 ‘표현(presentation)의 문학’이라는 작가의 문학관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래서 작가는 동양 문학의 본령이 ‘전기문학(傳奇文學)’에 있으며, 따라서 주제도 사회 비판이 아니라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소재를 통하여 근원적 진실을 알아보려는 데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문학의 흐름에서 볼 때 전기소설은 매우 광범위하고 뚜렷한 내적 전통을 지니고 있는 소설 양식이다. 이가원 교수가 지적했듯이, 조선시대 전체를 통하여 전기적(傳奇的)인 경향을 띠지 않는 작품이 없을 정도로 전기가 조선조의 소설에 큰 영향을 끼쳤음은 잘 알려진 바와 같다. 전기소설은 대체로 신괴(神怪)·염정(艶情)·우언(寓言)·호협(豪俠) 등의 유형을 특징으로 하여 현실의 인간 생활을 벗어나 천상(天上), 명부(冥府), 용궁(龍宮) 같은 환상적인 세계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비현실적 무용담이나 연애담 같은 기이한 사건들을 다룬다. <금방울전>, <금령전>, <금오신화>, <삼설기> 같은 우리 고전소설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광마잡담> 속의 여러 편들이 소재와 모티프로 빌려오고 있는 중국 청대의 문언단편소설집 <요재지이(聊齋志異>)는 요정이나 신선, 여우, 귀신 등을 주요 등장인물들로 삼아서 이색적인 내용을 서술한 전기소설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광마잡담>에 수록된 아홉 편의 이야기 가운데 「인어 이야기」, 「모란꽃 이야기」, 「공처가 이야기」, 「무덤 속의 여인」, 「노루 이야기」, 「도깨비집 이야기」 일곱 편은 모두 전기소설적인 기법에 의해 현실과 비현실적인 공간을 넘나들며 벌어지는 환상적인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이들 일곱 편의 각각의 이야기들은 주인공(일인칭 ‘나’ 혹은 작가를 연상시키는 삼인칭 화자)이 용궁에서 추방된 암갈치 인어(「인어 이야기」), 여우의 정령이나 유령(「두 여인」, 「도깨비집 이야기」), 모란꽃 요정(「모란꽃 이야기」), 백사(白蛇)의 정령(「무덤 속의 여인」), 노루 요정(「노루 이야기」) 등과 나누는 유현(幽玄)한 분위기의 관능적인 러브스토리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실제로 작가는 <광마잡담> 가운데 여러 편들을 포송령의 <요재지이>에 있는 작품들을 참조하여 재구성하고 있는데, <두 여인>, <모란꽃 이야기>, <공처가 이야기>, <노루 이야기>, <도깨비집 이야기>는 <요재지이>의 <연향(蓮香)>, <갈건(葛巾)>, <마개보(馬介甫)>, <화고자(花姑子)>, <소사(小謝)> 이야기를 각각 패러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광마잡담>은 <인어 이야기>나 공상과학 소설의 모티프를 차용한 <다이아나 이야기>, <별은 멀어도> 두 편을 제외하면 이전의 <광마일기>가 그랬듯이 소설의 전기성에 ‘고급한 센티멘탈리즘’과 ‘세련된 에로티시즘’을 가미한 ‘현대판 전기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비현실성과 황당무계함을 내용으로 하는 전기소설의 특징은 그 유현성(幽玄性)에 있다. 여기서 ‘유현(幽玄)’이란 현실의 세계가 아닌 상상적 세계, 환상의 세계를 말한다. 현실의 모든 양상을 인과와 전생의 업보에 연결시켜 생각하는 윤회사상이 동양 생활철학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의 문학은 우리의 인생 자체가 이미 ‘꿈’으로 밖에는 표현될 수 없는 불가지론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마광수, <상징시학>, 청하, 1985, 135쪽.)
그래서 현실을 영원과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현실을 현실 그대로 보지 않는 일종의 ‘상징적 계시’가 필요하다는 논리가 그의 문학에서 자연스럽게 성립되는 것이다. 이전의 <광마일기>나 이번의 신작 <광마잡담>에서 작가가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는 현대판 전기소설의 실험은 여러 면에서 오늘의 우리 문학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3. ‘사소설’ 기법의 도입
<광마잡담>에서 두드러진 또 하나의 특징은 소설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허구성’, 즉 ‘그럴 듯한 거짓말’ 효과를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 ‘사소설 기법’을 도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서는 <광마일기>의 창작 의도에 대해 설명한 작가의 다음과 같은 진술을 참고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나는 이 소설을 ‘거짓말이 많이 섞인 사소설(私小說)’ 형식으로 썼다. 그래서 남주인공이 꽃의 요정과 연애하기도 하고 고려 때 죽은 처녀 귀신과 연애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식의 전기적(傳奇的) 성격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하더라도, 남주인공이 친구 부부와 부부 교환의 정사를 벌이거나, 또는 극장에서 자살을 기도한 정체불명의 여성과 연애하는 등 거의가 허구적 스토리로 되어 있다.]
(마광수, <내 소설의 주인공들>, 같은 책, 264쪽)
전기소설적인 성격에 ‘사소설’형식을 도입하여 활용한 <광마일기>에서 작가는, 조선조의 <금오신화(金鰲新話)>나 <수성지(愁城誌)>, 그리고 <화사(花史)> 등이 주로 삼인칭 시점을 활용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작가 자신을 직접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바 있고 있다. ‘사소설’이 작가 자신이 직접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자신의 체험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는 경향의 소설을 가리킨다고 할 때, <광마일기>를 비롯하여 <광마잡담>에서 사소설 기법을 작가가 즐겨 채택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소설의 본질인 ‘그럴듯한 거짓말’을 한층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인어 이야기>에서 작가 자신의 본명을 그대로 노출시키면서, 거기에다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현존 작가‘하일지’를 함께 등장시킨다든지, <두 여인>에서는 작가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서울 시내의 아파트촌과 그 주변의 카페를 주요 배경으로 삼고 있다. <공처가 이야기>에서도 주인공을 작가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마광서(馬光瑞’)로 설정하여 서술하고 있는 등 작가는 자신의 맨얼굴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러나 이 삼인칭조차도 작가를 연상시키는 이름이나 정황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실제의 작가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임을 누가 봐도 알 수 있다.
작가가 의도하고 있는 이런 ‘그럴듯한 거짓말’은 모방론의 입장에서 볼 때 ‘개연성(probability)’과 ‘박진성(verisimilitude)’이라는 서술 미학적 요구를 충족시켜 준다. 동시에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뿔 있는 암사슴’ 그림이 그림으로써 잘 그려져 즐거움을 줄 수만 있다면 그것이 사실과 꼭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본 것과도 관련된다. (이상섭, <문학이론의 역사적 전개>, 연세대출판부, 1985, 77쪽.)
플라톤의 입장과 달리 효용론의 관점에서 문학의 쾌락적 기능을 중요하게 여겼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이 최악의 경우 철학적 진리를 담고 있지 않더라도 문학적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가지고 있으면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스승인 플라톤처럼 예술적 가공 과정에서 발생하는 아름다움을 무시하고 오직 진리만 과도하게 드러내려는 문학에 그다지 높은 가치를 두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마광수가 자신의 소설에서 ‘그럴듯한 거짓말’을 도입하고 있는 것은 사실성을 기대하는 독자들의 상상력을 배려하려는 의도적 장치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도가 사소설 형식을 통해 형상화 되고 있는 작품이 <광마일기>였고, 이번 <광마잡담>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광마잡담>에 수록된 아홉 편의 이야기들은 비현실적이고 황당무계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작가 자신이 겪었던 실제 체험담을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점이 그의 소설에서 일관되게 드러나고 있는 서술미학의 주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4. ‘가벼움’의 서술미학
<광마잡담>에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은 ‘가벼움’의 서술미학이다. 작가의 이런 서술 의도는 이미 <광마일기>나 <즐거운 사라>. 그리고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에서도 활용된 바 있으며, 이 작품에도 그대로 채택되고 있다. 그러나 ‘가볍다’는 말이 문학에서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많은 술어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언급한 작가의 생각을 참조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현대소설은 지금까지 대체로 ‘무거움의 미학’으로만 일관해 왔다. 나는 교훈주의를 바탕에 깐 경건주의가 우리나라 현대 소설의 가장 큰 결함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무거운 소설’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무가치하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가벼운 소설’을 경시하거나 폄하하면서 ‘무거운 소설’만을 소설의 본령(本領)으로 삼는 것은 아무래도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마광수, <내 소설 [광마일기]에 대하여>, 같은 책, 136~137쪽)
우리 소설 전통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서구의 문학과는 달리 주제나 형식 면에서 대체로 ‘가벼운 소설’에 그 정서적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우리의 고전작품인 <흥부전>이나 <춘향전>에서 보이는 걸직한 육담이나 해학적 표현, 그리고 현대소설에 와서 김유정이나 채만식의 소설에서 보이는 골계미와 풍자는 바로 내용적인 면에서 현실의 억압과 구속을 형식적으로나마 극복해 보고자 한 데서 나온 서술미학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김시습의 <금오신화>에서 보이는 몽환적 세계의 유현한 분위기 또한 무거운 현실을 가벼움의 서술 형식에 의지하여 극복해 보고자 한 것이라고 할 때, 가벼움의 서술미학은 현실적 질곡의 무거운 무게를 가상적인 현실 속에서나마 극복하고 풀어내려는 작가의 소망에 의해 채택된 기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작가가 전기소설적인 형식을 현대적으로 새롭게 시도하려는 의도는 지나치게 이념 일변도의 ‘무거운 주제’만을 ‘무겁게’ 다루고 있는 우리 문학의 한 경향에 대한 비판적 실험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 자신의 문학이론에 대한 입장, 즉 동양문학론에 기초한 문학의 이해 방식과도 상통한다. 그것은 ‘상징’에 관한 이론서 <상징시학>에서 그가 강조한 바와 같이, ‘재현적 입장’으로서의 문학관보다는 ‘표현적 입장’으로서의 문학관을 가지고 있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앞서 <광마잡담>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거론한 ‘전기성’은 ‘가벼움’의 서술미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여기서 ‘가벼운 소설’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작가의 주장을 조금 더 들어 보자.
[‘가벼운 소설’은 또한 도덕적 당위성이나 작가의 도의적 책임 같은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창작된다.‘무거운 소설’이 다소 위선적인 태도를 밑바탕에 깔고서 제작될 수밖에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면, ‘가벼운 소설’은 다소 위악적(僞惡的)인 태도를 밑바탕에 깔고서 제작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무거운 소설은 작가가 철학자나 사제(司祭) 같은 태도로 창작에 임하는 것이요, 가벼운 소설은 작가가 단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평범한 인간의 입장으로 창작에 임하는 것이다.]
(마광수, <내 소설 [광마일기]에 대하여>, 같은 책, 138쪽)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문학이 독자들에게 진리나 교훈을 주지 않더라도 미적 아름다움이나 즐거움을 개연성 있고 박진감 있게 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가 ‘도덕적 당위성’이나 작가의 ‘도의적 책임’을 ‘무거운 소설’의 범주에 넣고, “작가의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평범한 인간의 입장”을‘가벼운 소설'로 분류하는 태도는 논란의 여지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만이 가지고 있는 매우 독창적인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벼움이 경박함이나 천박함과 구별되는 것이라고 할 때 우리의 고전소설, 특히 전기소설에 많이 나타나는 ‘가벼움’의 주제 정신을 작가 자신이 <광마잡담>을 통해 지속적으로 구현하려고 하는 태도는 의미 있는 시도로 받아들여진다.
‘가벼움’의 서술미학은 다시 문체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요청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말에서 문학작품을 만들어 내는 행위 자체가 문체행위인데, 이 문체는 그 형성 요인을 네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언어 환경에 의해 형성되는 문체 개념, 주제, 장르, 기타 형식에 의해 형성되는 문체, 수신자나 수신 상황에 따라 형성되는 문체, 작가의 품성에 따라 형성되는 문체가 바로 그것이다. (김상태, <문체의 이론과 해석>, 집문당, 1993, 48~54쪽.)
문체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작가가 선택하는 말의 문제이기 때문에 <광마일기>를 비롯하여 <광마잡담>에 보이는 ‘가벼움’의 서술미학은 결국 작가의 문체의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를테면 <권태>에서 손톱의 길이를 65센티미터로 길게 붙이게 하는 과장된 행위라든지, ‘나’가 ‘희수’에게 건네는 상스러운 말, 그리고 중간 중간에 내뱉는 희극적이기까지 한 대사들은, 페티시즘에 관한 사변적이고 장황한 <권태>의 담론과 주제가 ‘나’와 ‘희수’의 대화에 의해 더 지루해질 수 있는 여지를 해소시켜 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광마잡담>에서도 가볍고 구어적인 대사나 문장이 많이 나와 작품 전체의 이야기와 분위기를 편안하게 이끌어 가는데, 이는 기존의 적지 않은 소설들이 문장 언어와 문체 면에서 독자에게 무거운 부담감을 주도록 의도됨으로써 작가의 정신적 무게나 깊이를 과잉 제시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창작 태도라 할 수 있다. 작품 제목 가운데 ‘잡담(雜談)’이란 어휘가 이 점을 잘 말해준다. 당장의 현실적 효용성에 목적을 두지 않고 쏟아내는 일상의 잡담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카타르시스 되어 마음의 평정을 찾는 경험을 하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잡담 속에서 삶의 활력을 얻을 수 있듯이, 소설도 꼭 무거우 주제나 교훈적 메시지를 주지 않더라도 탈현실적 상상의 과정 속에서 역설적으로 현실의 삶이 부과하는 고통을 극복할 수도 있다. 아마도 소설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가벼운 잡담처럼 독자들로 하여금 방심의 상태에서 상상의 나래를 경쾌하게 펼쳐나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마광수 소설의 속도감 있는 문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권태>에 비해 <광마일기>나 <광마집담>의 문체는 전기소설적인 요소를 가미하고 있어 소설을 찬찬히 음미하여 읽어 본 독자들이라면, 마치 3.4조나 4.4조의 산문시를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본래 마광수의 문장이 길지 않은 호흡으로 쉽게 읽히면서도 경쾌한 리듬감을 주는 것도 이런 내재적 율격이 그의 문장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어 이야기>는 이런 그의 문장과 문체적 특징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나’와 ‘염희(艶姬)’와의 대화뿐만 아니라 작품 안에 삽입된 시편(詩篇), <공처가 이야기>에 나오는 유머러스한 주문(呪文), <모란꽃 이야기>의 단아한 서정적 문장들과 유현한 분위기를 북돋우는 장면들은 작품 전체의 분위기와 이야기 전개 면에서 현실과 비현실을 왕래하는 작품 배경을 설득력 있게 지원하고 있다.
5. 관능적 상상력의 글쓰기
<광마잡담>에서 보이는 이와 같은 서술 미학적 특징들은, 작가가 모든 문학 작품을 낭만적 자유정신에 토대를 둔 ‘인공적인 꿈’이라고 보는 한에서, 앞의 여러 인용문에 나타난 그의 소설 미학적 진술들을 매우 설득력 있는 요소들로 수용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인공적인 꿈’의 효과를 발휘하기 위한 여러 장치들이 소설 전체의 유쾌한 재미를 받쳐 주고 있다. 교과서적인 소설 이론의 공식에 맞춰 마광수의 소설을 볼 때, 구성의 입체성이나 갈등의 양상이 아예 없거나 약화되어 나타나는 것도 이와 같은 동양문학의 전통과 작가의 독특한 서술 미학적 관점에 바탕을 둔 소설 양식을 의도적으로 실험하는 데서 나온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광마잡담>에서 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순간이동 방법’이나 ‘타임머신’을 이용하여 과학이 발달한 미래 세계에 다녀온 진기한 경험을 보여주는 <다이아나 이야기>와 <별은 멀어도> 두 편이다. 작가는 이 두 편의 이야기에서 현재의 시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하여, “문명과 합리적 지성과 복지가 거의 완벽하게 구현되고”, “성의 해방이 완전히 이루어져” “개인의 개성과 성을 가장 중요시”(174쪽) 하는 “행복한 지상낙원”(181쪽)을 꿈꾸고 있다. <다이아나 이야기>에서 화자인 ‘나’(작가 자신)는 우주의 ‘섹사 별’에서 날아온 ‘다이아나’라는 여인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최고의 가치관으로 놓고서 모든 일을 처리할 때 사람들의 마음은 평화로워지게 되고 또 사이좋은 재분배가 가능해 지게 되”는 ‘탐미적 평화주의’를 주장한다. 완전한 성의 해방이 이루어지고, 학교교육도 없으며, 유전자 복제기술이 발달해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천 살쯤 되는 완전한 유토피아를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성의 해방이 이루어지면 ‘먹는 것’은 자연히 해결돼요. 기아의 문제는 식량의 생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른 ‘분배’에 있는 것이니까요. 성적으로 배불러지면 사람들은 마음이 너그러워지게 되고, 따라서 식량의 재분배 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돼죠. 또 전쟁 따위로 성적 기아증을 해결하려는 마음도 없어져서 군사비에 쓸 예산을 식량 증산에 다 쓰게 되구요.](180쪽)
공상과학이나 유토피아를 다루는 작품의 내용들이 그렇듯이. 위의 인용문을 기조로 삼고 있는 <다이아나 이야기> 속의 상상력은 당연히 현실에서는 실현되기 어려운 일들로 ‘소망적 사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소설이 어차피 그 자체로 ‘현실 도피’라고 전제하는 한에서는 소설 속의 현실에서 상상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다이아나 이야기> 뿐만 아니라 <광마잡담>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모두 이런 전제 위에서 전개되고 있다.
한편, 작가는 <별은 멀어도> 편에서는“완벽한 과학의 발달로 인해 사람들이 생활의 풍요와 안락을 보장받고 있는 곳”, “건강한 정신상태 유지를 위해 관능의 쾌락을 철저하게 추구하고 향유하는 곳”(277쪽), “사이버네틱스(인공 두뇌학)의 발달에 의해 이룩되는 진정한 파라다이스”(281쪽)‘에로티카 3000’이라는 혹성을 설정하여 ‘실용주의적 쾌락주의’와‘복지지상주의 이론’을 펼친다. <가자, 장미여관으로>에서 일찍이 피력된 바 있었고, <광마잡담>의 <별은 멀어도>에서 다시 인용하고 있는 산문시 <신·4 >는 “시적 상상력을 통해서 그려본 ‘신들의 나라’”(282쪽)라고 작가가 견지하고 있는 상상의 거점을 다음과 같이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다.
[신(神)들이 사는 나라에 가보았다. 신들은 마치 진시황과도 같은 쾌락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다만, 수많은 시녀나 노예가 모두 생물학적 로봇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로봇은 모두 다 잘생기고 예뻤는데, 인간과 똑같은 모습, 똑같은 지능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그들에게 자유의지가 없는 것만이 달랐다. 그들은 명령을 받지 않고서는 아무거도 할 수 없다. 그들은 어떠한 개인적 욕구도 갖지 않고 자기의 전문적인 일에 열중하는 이외에는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않는다. 남신(男神)은 절대복종하는 여자 로봇을 수십 개라도 가질 수 있다. 여신(女神)도 마찬가지로 남자 로봇을 수십 개라도 가질 수 있다. 로봇 제조 장치는 소유자의 취향에 따라 여러 종류의 로봇을 만들어낸다. 어떤 로봇에 싫증이 나면 그것을 파괴해 버리면 된다. 그래서 신들의 나라엔 결혼 제도 같은 것이 없다. 각자가 신나게 즐길 뿐이다. 내가 처음 보기엔 신들의 나라는 노예들이 우글거리는 나라였다. 아, 이상하고 신기한 신들의 나라, 어떤 사디스틱한 쾌락도 절대로 보장되는 즐거운 나라.](281~282쪽)
그렇다면 작가가 이와 같은 무애(無碍)한 상상의 과정을 통해 보여주고 싶어 한 것은 무엇일까?
작가에 따르면 꿈과 환상은 우리들에게 정신적·심리적 진정제, 즉 카타르시스의 구실을 한다. 제도적 금기 때문에 현실 생활에서 충족시킬 수 없는 욕망, 가령 폭력이나 마약에의 충동, 성적 욕망 등이 예술 작품이라는 상상적 세계를 통해서 상상적으로 충족되는 과정을 대리만족 혹은 대리배설로서의 카타르시스로 인정할 때, 역설적으로 예술 혹은 문학은 일종의 ‘무위적(無爲的)’ 속성을 갖게 된다. 그런데 문학의 이런 무위적 속성을 좀 더 적극적으로 이해한다면 예술적 활동은 현실에서의 실질적 목적과는 무관하다는 말에 지나지 않으며, ‘무목적의 목적’을 지향하는 이러한 무위성에서 예술은 유희, 즉 놀이와 서로 통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예술의 이 무위성은, 꿈이 현실에 대한 아무런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처럼 현실적 윤리와 억압에 대한 위반으로서의 ‘일탈행위’를 보장해 주는 개념이다. ‘현대판 전기소설’인 <광마잡담>에서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이런 문학적 입장은 여러 논의의 가능성을 남겨 두고 있긴 하지만, 소설을 ‘현실 도피’ 그 자체로 간주하는 마광수만의 독자적 문학관이 유쾌하게 구현된 하나의 실험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