性愛論
마광수 지음 / 해냄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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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광수의 性 이론 >......<성애론>을 읽고


#. 마광수의 글쓰기: 그는 이론가인가?
그의 글을 읽을 때 미리 염두해 두어야할 점이 있다. 그것은 그의 글을 철학서같은 이론서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마광수의 저서는 문학작품(시, 소설)과 몇권의 문학이론서나 평론을 제외하고는 모두 에세이식으로 씌여졌다. 여기서 에세이란 흔히 '수필'로 번역되는 그런 장르가 아니다. 오히려 서구장르의 '에세이'에 가깝다. 간단한 수필류는 분명히 아니고 그렇다고 이론서라고 하기엔 약간 느슨한 글이다. 따라서 그의 에세이류의 글을 읽을 때 등장하는 개념들을 곧이곧대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엄격한 문서가의 눈으로 보면 마광수가 사용하는 개념들은 순전히 오류 투성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그는 그런 개념들을 자기식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글을 문학작품을 제외한 에세이들을 중심으로 다룰 것이다. 특히 최근 저작 <<성애론>>을 주된 근거로 사용하겠다.

1. 사랑?
마광수의 성담론의 시작은 '사랑'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랑'이란 좀더 명확하게 규정될 필요가 있다.

<나는 '사랑'이라는 말을 '성애(性愛)'의 의미로 한정시켜 사용하는 게 낫다고 본다. 그러니까 '사랑'은 곧 '성애'이지 '정'은 아닌 것이다. '정'은 물론 사랑보다 훨씬 더 큰 결속력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사랑'같은 열정은 없다. 성애로서의 사랑은 '정신적 결속감'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관능적 경탄'의 감정으로부터 출발한다.>

마광수는 일단 '사랑'이란 개념에 자신만의 한계를 설정한다. 일단 사랑은 육체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정'이 아니어야 한다. 그렇다고 그가 정신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육체적인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랑의 일반적인 세가지 구분인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중에 에로스만이 진정한 사랑이고 나머지는 에로스의 대용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마광수는 그 예로 황순원의 단편소설 '별'을 분석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누나와 소년과의 우애 - 필리아
2) 소년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 - 아가페 + 에로스
여기서 소년이 누나를 끝까지 미워한 것은 이들 사이에 에로스가 빠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머니가 미인이라고 믿는 소년은 못생긴 누나에게 에로스의 감정이 없고 단지 오누이라는 필리아만 허락되었기에 애증병존의 심리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똑같은 결결과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마광수가 암시하는 것은 에로스가 빠진 명목상의 '사랑'은 항상 증오를 동반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소유욕으로서의 사랑'이나 '번식욕로서의 사랑'이 아닌 '놀이로서의 사랑'을 주장한다.

2. '野하다'라는 것?
마광수의 모든 주장은 결국 '야한 것'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 루소와도 약간 비슷하다. 이것은 결국 원시시대의 생명력을 가정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가서 다루겠다. 그렇다면 마광수가 말하는 '야하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가?

<말하자면 보다 솔직하게 스스로의 본능을 드러내는 사람, 자연의 본성을 거스리지 않는 사람, 자기자신의 아름다움을 원시적인 정열을 가지고 천진난만하게 가꿔가는 사람이 '야한 사람'이다..... 이를테면 허위와 가식이 없이 자연스런 본능에 충실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야한 정신'이다...... 그러므로 야하는 것은 그런 다양성을 일정한 틀에 가둬버리려는 수구적 보수성에 대립하는 진보적 의미를 가진다.>

즉 제도화된 '정신적 의식'보다는 육체가 반응하는 본능에 충실하는 것이 야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야함'은 다양성을 산출할 수 밖에 없고 결국 수구적 기존체계에 반하여 진보적이다는 주장이다.

3. 성욕과 식욕
마광수의 커다란 전제 중에 하나가 바로 성욕과 식욕라는 구분이다. 이 구분은 크게 두가지 상황에서 사용되는데 하나는 인간구분이고 다른 하나는 시대구분적 의미이다.
1)성욕적 인간/ 식욕적 인간
마광수는 이 두 인간형 구분을 성서에서 끌어낸다. 누가복음 10장과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일화를 보면 전자는 예수의 말에 경청하는 마리아와 집안일에 바쁜 마르타가, 후자에선 비싼 향유로 예수의 말을 씻기는 마리아와 그걸로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한다는 유다가 대립된다. 예수는 물론 전자들을 택한다. 다시말해 중요한 것은 식욕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이다.
2)식욕적 사회/성욕적 사회
마광수는 현대 이전의 사회와 현대사회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이 개념을 사용하는데 전자는 경제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해 먹는 것에 연연해하던 시절을 말하고 후자는 식욕문제가 해결되어 이젠 성욕에의 관심이 증폭된 사회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개념적 구분을 명확한 것으로 한정시켜선 안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 논리대로라면 마광수는 본질을 너무 간단하게 본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사실 그렇다. 그러나 우린 이 구분을 명확한 사회학적 개념이 아닌 일상적 언어사용으로 보기로 하자. 왜냐면 중요한 것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4. 야한 성애 = 노출증 + 관음증
그렇다면 야하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이에 대해 마광수는 다음같이 말한다.

<나는 야한 사람을 만드는 근본 심리가 '노출증'에 있다고 본다. 노츨증과 나르시시즘이 합쳐져 당당한 개성으로 발전할 때 그 사람이 '야한 사람'이 될 수 있고, 타인에게 관음(觀淫)의 충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니까 '노출증'과 '관음증'의 결합이 곧 '야한 성애'인 셈이다.>

이것은 다소 황당한 주장같이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마광수가 애초에 가정한 '사랑 = 성애'라는 등식을 생각한다면 이해되지 않을 것도 없다. 즉 '관음증'도 '노출증'도 모두가 생애를 원하는 본능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솔직한 '노출증'은 솔직한 '관음증'을 겸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들에 당당하게 민감한 사람이 곧 '야한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노출증'은 보편적인 것으로 그렇다치더라도 '관음증'은 자칫 변태적인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그럼 왜 관음증이 생기는 것일까? 그리고 마광수는 왜 관음증을 사랑의 한부분으로 긍정적 입장을 취하는가?

<인간은 일년 내내 섹스를 할 수 있지만, 그러다 보면 에너지의 소모가 많아 직접적인 성행위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잠재의식 가운데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관음증'은 병적인 행위가 아니라 자기절제적인 행위에 다름아니다. 더구나 남자에게 이런 관음증이 많은데 이는 현대국가에선 남자에게 '노출증'에 대한 욕구가 여자보다 더 억압되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마광수는 스스로의 노출증을 당당한 나르시시즘으로 즐겨라고 말한다.

5. 페시티즘(fetishism)
통상적으로 '절편음란증(節片淫亂症)'으로 번역되는 페티시즘은 흔히 변태로써 간주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괴테의 <<파우스트>>의 예를 들어 이런 심리가 일상적인 심리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이런 페시티즘을 여전히 병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성 대상을 대체하는 것들은 일반적으로 성 목적을 위해서는 매우 부적절한 신체의 일부(발이나 머리칼 같은) 또는 성 대상을 대신하여 그 사람이나 그 사람의 성행위와 연관지을 수 있는 무생물(즉, 옷이나 속옷 등)이다. 이러한 대체물은 야만인들이 자기들의 신(神)을 구현시키는 것이라고 믿는 물신(物神)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정상적인 성 목적에 대한 충동이 어느정도 감소하는 것(생식기의 기능 부전)은 모든 사례에서 불가피한 전제 조건처럼 드러난다.

이와 같이 프로이트는 페시티즘이 정상적인 성 목적이 이루어질 수 없을 때 다른 것으로 대치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그의 생각으론 이런 성욕의 고착이 정상적인 성욕을 완전히 벗어나면 결국 변태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광수는 이런 프로이트의 생각에 반대한다. 우선 그는 '절편음란증'이란 번역어가 변태성욕같은 인상을 주기싶다고 '고착적(固着的) 탐미애(耽美愛)'로 바꾸자고 주장한다.

<우리는 어떤 이성을 볼 때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어떤 마술적 주물(呪物) 즉 페티쉬(fetish)에 흘려, 그것에 매력을 느끼고 사랑에 빠져든다고 할 수 있다...... 페티쉬는 '성적 상징 역할을 하는 일부분'이라는 의미에서 심볼리즘(symbolism)과도 관계가 깊다. 어떤 특정한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거나 암시하는 것이 상징인데,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페티쉬는 '관능적 상상력의 확신을 위한 상징적 자극물'이다.>

그리고 이런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야말로 획일적인 균형미에서 다양한 개성미로 발전해가게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본다.
여기서 우리는 프로이트와 마광수가 페티시즘을 보는 시작이 다름을 느끼게 된다. 프로이트는 페티시즘이 정신병을 유발시킨다는 부정적 관점에서 보는 반면, 마광수는 오히려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여 페티시즘이 다양한 개성화를 촉구한다고 본다. 이 둘 중 누구의 이론이 옳은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다만 프로이트는 페티시즘에서 억압의 그림자를 본반면, 마광수는 해방의 그림자를 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보면 명확히 이 두 입장이 근원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프로이트는 페티시즘이 일종의 결여로써 발생한다고 본다. 따라서 그 결여를 채워야한다고 보고 결여를 만든 억압구조와 비슷한 다른 강압구조가 필요함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마광수는 페티시즘을 '야하게' 되려는 욕구로 본다. 그래서 여기엔 강압적으로 강요되는 보충이란 없다.

6. 원시주의
이 말은 현대 과학문명이 만들어낸 폐해를 극복하고 가정된 개념에 불과하다. 이는 루소가 <<인간불평등기원론>> 1부에서 말한 '원시상태'의 정신에 해당된다. 루소도 '원시상태'란 가정을 당시 문명사회와의 대립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원시상태에 알맞는 인간을 '자연인'이라 생각했다. 이는 시민과 대립된다.

자연인은 완전히 자기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그는 수의 단위이고 절대적인 정수(整數)이며, 단지 자기 자신이나 또는 그의 동료하고만 관계를 갖는다. 시민적 인간은 분모(分母)에 좌우되는 분수의 분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 가치는 정수(整數)와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정수란 결국 사회공동체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사회제도란 인간을 가장 부자연스럽게 하고 또 개인으로부터 절대적인 존재를 탈취하며 대신 상대적인 존재로 만들어 <자아>를 한 공동체 속에 몰입시킬 수 있는 제도를 말한다. 그 결과 각 개인은 이미 자기를 한 개체로 생각치 않고 전체의 일부분으로 믿게 되며 또 전체의 일부분으로밖에 자신을 의식하지 않게 마련이다.

마광수의 '야한 사람'도 결국 '자연인'과 같은 의미다. 마광수 자신도 이 점에 대해 인정하고 있다.

<"(합리성이란: 인용자) 결정론에 대한 저항이지요. 제가 당한 결정론, 즉 '섹스는 나쁘다'는 편견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합리성의 회복을 일관되게 주장해 왔어요. 우리나라엔 새로운 계몽주의가 필요해요. 여태까지는 계몽주의를 도덕적 경건주의와 동일시해 왔어요. 이광수식으로 정직해라, 순결해라, 뭐 그런 거죠. 그러나 원래 루소의 계몽주의는 기존의 중세기적 신본주의로부터의 탈피를 외치면서 합리성의 회복을 강조한 것이거든요. 그리고 또 '자연으로 돌아가자'고도 했는데, 제가 말한 '야하자'와 비슷한 거예요.">

그렇다면 루소과 마광수의 생각엔 차이가 없는가? 물론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 그러나 난 근본적인 이념(획일적인 사회체계에 대한 거부와 개인성의 옹호)은 같다고 생각한다. 세부적인 것은 이곳에서 논할 내용이 아니기에 이쯤에서 그만 둔다. '자연/문화'란 이 구별은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한다.(레비스트로스, 데리다 등)

7. 프리 섹스/ 프리 인터코스
마광수는 사랑(섹스)의 개념을 확대하길 원한다. 그래서 '섹스 = 성교; 인터코스(intercourse)'라는 등식을 거부한다. 그리고 단순히 사정(射精)을 위한 성교보다 페팅(petting)을, 생식적 성교보다 구강성교(fellatio, cunnilingus)를 중요시 여긴다. 이와같은 생각은 섹스를 사회적인 의미에서 분리시켜 '놀이로서의 섹스'로 만들기 위해 나온 것이다.

8. 사디즘과 마조히즘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성적표현 양극점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전부터 '사도마조히즘'이라는 용어가 생겨나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한 몸에 나타나는 두가지 상극적인 성향으로 여겨졌다. 이에 대해 들뢰즈는 사디즘은 마조히즘과 합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는 당연히 완전히 자족적이며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개별적인 드라마를 연출하고 잇으며,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이 양자 간의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들뢰즈의 분석과는 상관없이 마광수는 일반적인 용어로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사용하고 있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사디스트는 마조히스트와 성행위를 함으로써 만족을 얻을 수 있고, 마조히스트는 사디스트에 의해서만 성적 만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사디스트가 능동적인 자아확장을 통해 행복해지려고 한다면, 마조히스트는 수동적인 자아포기를 통해 행복해지려고 한다.>

마광수는 이런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관능적 성애'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사회제도 자체를 사도마조히즘식으로 뜯어 고치지는 것은 아니라고 단서를 단다. 다시 말해 그는 이런 사도마조히즘식 욕구가 '놀이적 섹스'를 가능하게 하는 대표적인 심리임을 밝힐 뿐이다.
여기서 잠시 집고 넘어가야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마광수와 들뢰즈의 마조히즘에 대한 입장이다. 우선 마광수는 사디스트가 마조히스트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오히려 그 역이 참이라고 보고 있다. 남성이 일반적으로 사티스트적인데 반해 여성은 마조히스트적이다라는 가정하에 그는 마조히스트의 전복적 성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조히즘을 여성 특유의 특권으로 향수(享受)할 때 남성혐오증은 불식될 수 있다. 사실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더 불쌍하다고 봐야 한다. 사디스트는 과도한 책임감에 짓눌려 있기 쉽다. 여자는 모든 책임을 남자에게 미룰 수 있는 국외자적(局外者的)방관자로서의 느긋함을 즐길 수 있으며, 한껏 야하게 화장할 수도 있고, 약쟈(弱者)임을 핑계삼아 보호받을 수도 있다.>

페미니스트들이 보면 못마땅해할 구절이다. 그러나 마광수는 남자와 여자가 절대 같을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못박고 논의를 진행한다. 마조히즘은 '자궁회귀본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물론 이것이 성차이로 나누어지는 절대적 진리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마조히즘과 사디즘은 결국 같은 것이고 어느 쪽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 들뢰즈가 보는 마조히즘은 어떤 의미를 함유하고 있는가. 일단 그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를 각각 사드와 마조흐의 작품을 분석한다. 우선 사드의 작품에서 고통을 가하는 가해자는 고통을 받는 피해자가 자신의 행위에 의해 거부하려고 할 때만 쾌감을 느끼는 것이지, 피해자가 오히려 고통을 자처하려 든다면 그것은 사디스트에게 아무런 쾌감도 느끼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알아낸다. 마조흐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마조히즘도 마찬가지다.

마조히즘에서의 박해자 여성은 결코 사디스트가 될 수 없다. 그 여성은 마조히즘적 상황 내에 존재하며 그 상황의 일부로서 마조히스트가 투사하는 환상이 실현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들뢰즈는 사디즘보다 마조히즘에 중요성을 더 부여한다. 왜냐면 마조히즘이 사도마조히즘이라는 엉터리 실체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다양한 해석과 직관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사디즘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결정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사드 작품에 나오는 것같이 피해자가 자신의 논리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거기에서 더 큰 즐거움을 느끼는 박해자의 모습을 마조흐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특이한 계획을 성취시키기 위해 박해자를 교육시키고 설득하며, 제휴를 맺으려 찾아 다니는 피해자의 모습만이 있을 뿐이다....... 사디스트는 제도를 필요로 하며 마조히스트는 계약관계를 필요로 한다.

9. 카타르시스
마광수의 성애론 핵심은 '카타르시스 이론'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마광수는 본래 그대로의 개념적 의미를 버리고 자신만의 개념으로 바꾼다. 이에 대해 마광수가 <'즐거운 사라' 사건 항소 이유서>에서 밝힌 '카타르시스'에 대한 대목을 길게 인용해보기로 한다.

<'카타르시스'는 그리스어로 '배설'을 뜻하는 말인제, 마치 사하제(瀉下劑)에 의하여 장내(腸內)의 불순물을 청소해 주면 병이 낫듯이, 우리의 정신적 억압과 축적된 스트레스들을 문학 또는 기타 예술 작품에 의하여 배설시켜 주면 정신적 울체상태(鬱滯狀態)가 해소되어 건강한 정신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저는 카타르시스를 '정화'라는 말보다 '대리배설'이라는 말로 번역하여 학술용어화한 바 있습니다. 장내의 숙변을 청소, 즉 정화해주면 병이 낫듯이 정신 역시 억압된 본능 등에 의한 각종의 콤플렉스들을 정화시켜주면 오히려 정신이 평형을 유지할 수 있는데, '정화'라는 용어에 지나치게 집착하다 보면 도덕적 설교 위주의 예술만이 그 기능을 한다고 오해되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를 설명하면서 카타르시스의 효용을 낳은 비극 작품의 중요 요소로 '파토스' 즉 '고통'을 뽑았습니다. 즉 관객은 극중 인물의 고통을 보면서 원초적 본능 중의 하나인 가학성을 대리 충족받는 동시에 현실에서의 실제적 가학(이를테면 살인 등)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면역 이론'이라고 하는데.....>

마광수의 주장은 '카타르시스' 작용을 통해 본능이 왜곡되지 않도록 하자는 말이다. 이때 '카타르시스'를 흔히, 그리고 본뜻에 가까운 '정화'라는 뜻으로 사용하면 도덕적 의미가 침투하여 원래적 본능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대리배설'로 해석하여 말그대로 본능이 왜곡되지 않는 한도에서 본능을 해결하자고 주장한다. 만약 본능이 '대리배설' 행위로라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엄청나게 왜곡된 괴물의 형태로 나타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부분에서 보면 마광수는 라이히의 생각에 동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라이히도 성이 억압되면 대중들이 그 에너지를 배설하기 위해 완전히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의 비정상적이고 기형적인 심리 반응은 오늘날 만족에 도달하지 모한 성 에너지를 다른 곳에다 병적으로 환치시킨 것이 틀림없다......... 성 에너지의 억압이 특정한 사회에서 어떻게 사회적으로 표현되고 있는가? 그것은 다름아니라 목표에 상응하지 않는 (비합리적인) 행동, 광기, 신비주의 그리고 자발적인 전쟁 참여 행동 등이다.

따라서 라이히는 성해방을 주장하고 새로운 성교육을 이야기한다. 이와 비슷하게 마광수도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성에너지가 왜곡되지 않고 배설되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나온 것이 바로 '카타르시스' 즉 '대리배설'이란 개념이다. 기존의 '카타르시스'라는 개념은 항상 도덕과 그로인한 초석적 폭력(violence fondatrice)을 담지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광수는 이런 폭력적인 내포의미를 과감히 잘라내어 바로 제도적 힘이 미치지 않는 개념으로 다시 만들어 냈다.

10. 고독 <= 의타심
마광수가 자신의 논의에서 성애를 넘어선 상위개념으로 다루는 것이 '고독'이다. 그는 고독에 대해 '성과 무관하게 찾아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절대적 고립감'이라고 정의 내린다. 그럼 이런 고독의 근원은 무엇일까? 마광수는 '영양과잉에 따른 잉여에너지가 제대로 분출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이때 잉여 에너지란 결국 '성욕'이다. 그래서 고독은 결국 '성 에너지'가 제대로 분출되지 못함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윤리적 제도는 이 에너지를 억압하고 이 에너지를 '숭고한 사랑'이란 대상으로 인도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숭고한 지향점이란 성에너지를 배설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왜곡할 우려가 있다. 그래서 마광수는 '오르가즘'이란 말 자체도 거부한다. 그는 이 개념도 의사들이 만들어낸 신기루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딱 잘라 말한다.

<있는 것은 오직 '기계적인 자극과 배설'뿐이다.>

그리고 정신적 사랑이든 육체적 사랑이든 모든 사랑은 결국 나르시시즘적 자위행위에 불과하다고 못 박는다. 헛된 희망을 갖기보다 차라리 현실적 절망을 인정하라고 충고한다. 그래서 마광수가 이른 결론은 다음과 같다.

<'고독'이란 결국 '의타심(依他心)'에서 온다. 의타심을 완전히 버릴 수만 있다면 우리는 고독으로부터 당당하게 자유로워질 수 있다. 타인들(가족을 포함하여)에게 기대봤자 남는 것은 환멸 뿐이다.
요행히 죽이 맞는 짝을 만났다 하더라도 '고상한 사랑'을 하지 말라. 동물적인 자세로 '즐기는 사랑'만 하라. 본능에 '솔직한 사랑'은 아낌없이 즐기는 것이 그 본질이다.>

마광수는 고독을 만드는 것이 '의타심'이라고 판단한다.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이외에 다른 누구일 수 없다는 생각, 그러므로 타인은 나와 전혀 다르다는 '타자성의 철학'과 비슷하다. 그것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 성애, 즉 에로스이다.

우리는 관계 가운데에서도 에로스적 관계의 예외적인 위치를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타자성의 관계요, 신비화의 관계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미래와의 관계, 모든 것이 현존해 있는 세계 안에서는 결코 현존해 있지 않은 것과의 관계요, 모든 것이 현존해 있을 때는 그곳에 있을 수 없는 것과의 관계이다. 이 관계는 현존하지 않는 존재와의 관계가 아니라 타자성의 차원 자체와의 관계이다........ 사랑은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며 우리의 주도권에 의존하지 않는다. 사랑은 아무런 이유가 없이 존재하고 우리를 엄습하고 상처를 준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자아는 보존된다.

이같이 레비나스는 에로스가 본질적으로 타자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본다. 왜냐면 성행위에서는 완벽하게 하나됨의 융합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욕은 우리들(이성)에 의해 통제될 수 없는 순수함 그 자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미끄러져 나가는 놀이이다.

애무(愛撫)는 주체의 존재 방식이다. 애무를 통해 주체는 타자와의 접촉에서 단지 첩촉 이상의 차원으로 넘어간다. 감각활동으로서의 접촉은 빛의 세계의 일부를 형성한다. 하지만 올바르게 말하자면 애무를 받는 대상은 손에 닿지 않는다. 이러한 접촉에서 주어지는 손의 미지근함이나 드러움, 이것이 애무에서 찾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애무의 추구는, 애무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 본질로 구성한다. <모른다>는 것, 근본적으로 질서잡혀 있지 않음, 이것이 애무에서 본질적인 것이다.......애무는 아무 내용 없는, 순수한 미래를 기다리는 행위이다. 애무는 거머쥘 수 없는 것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열어 주는 이러한 배고픔의 증대, 점점 더 풍요해지는 약속으로 가득 차 있다. 애무는 헤아릴 수 없는 배고픔을 먹고 산다.

이와 같이 레비나스도 에로스가 영원히 지연되는 무엇인가로 결정화되는 어떤 것(숭고함)이길 거부한다. 그리고 이런 '사랑 안에서의 의사소통 실패로 제안된 것'이야말로 이 관계가 안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마틴 부버의 생각과도 크게 구별된다.

코스모스, 즉 플라톤의 세계와 맞서서 정신의 세계가 있다. 이 세계에서는 에로스가 함축하는 의미를 유(類)의 논리로 환원하지 않을뿐더러 자아(le moi)는 동일자(le meme)를, 타인(autrui)은 타자(l'autre)를 대치한다.

그리고 이런 세계가 되야 인간은 고독을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이점에서 마광수는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철학'과 거의 같다. 그렇다면 혹자는 이렇게 물을 지도 모른다. '마광수의 생각은 옳다. 의타심에서 동일자의 사고가 나온다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런 의타심마저 없다면 인생이 너무 삭막하지 않을까? ' 그러나 마광수는 아마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당신은 외로움이 의타심에서 나온 것임을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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