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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핏 쇼 ㅣ 워싱턴 포
M. W. 크레이븐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평점 :
범인이 창조적인 예술가라면 탐정은 재미없는 비평가에 불과하다.
<브라운 신부>에 나왔던 말이다. 현실이라면 말도 안 되는 궤변이지만 탐정이 범인을 쫓는 소설에서는 이보다 더한 정론이 없다. 이런 소설들은 결국 '범인이 어떤 미로를 얼마나 매력적으로 만들어냈는가' 그 자체니까. 범인이 범행을 시작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 것도 시작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퍼핏쇼'도 워싱턴 포와 틸리의 이야기를 가장한 연쇄살인범 '이멀레이션 맨'의 이야기다.
이 사실에 주의를 집중하는게 쉽지 않은데 그건 주인공 워싱턴 포와 틸리가 너무나도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사회성이 떨어지는 천재 왓슨 역이라는 틸리의 캐릭터성은 독창적이며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사는 냉소적인 홈즈 역 형사 워싱턴 역은 전형적이지만 깊이가 있다. 순수한 틸리가 산전수전 다 겪은 워싱턴과 교감해가는 일명, '케미'까지 일어나니 이 콤비로부터 눈길을 돌리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멀레이션 맨에게 집중해 읽었다. 이멀레이션 맨은 굉장히 섬세하고 촘촘하게 자신의 연쇄살인을 구축해나간다. 사건 해결을 위해 뭐든 가리지 않는 워싱턴과 천재적인 두뇌로 그를 돕는 틸리의 화학작용을 몇 번이나 물거품으로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엉뚱한 미끼를 쫓게 만들 정도로 그는 자신의 과업에 공을 들였다.
작가에게 골드대거상을 안길 정도로 섬세하고 복잡한 범죄행각이지만 결국 그 연쇄 살인을 관통하는 두 가지의 키워드는 이것이다.
-왜 환상열석 인가
-왜 워싱턴 포를 끌어들였는가
왜 이멀레이션 맨은 불에 탄 피해자의 시신을 환상열석에 가져다 놓았는가.
왜 이멀레이션 맨은 엄청난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노골적으로 정직 상태였던 워싱턴 포로 하여금 자신의 범죄를 수사하게끔 만들었는가.
이멀레이션 맨의 최후에 이르러 나는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했다.
이멀레이션 맨은 결국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정말로 죄가 없다.'
'나쁜 건 내가 죽인 놈들이야.'
'나는 살인지만 피해자다.'
'누군가는 나의 무고함을 이해해주었으면.'
이멀레이션 맨을 살인범으로 만든 트라우마는 그만큼 끔찍했으며 연쇄살인 말고는 그 어떤 선택지도 남겨놓지 않았기에 더더욱 처절하게 들렸다.
나는 보통 '이유 있는 악당'을 싫어하고 살인범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작태가 옳지 않다고 보지만 이멀레이션 맨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다만, 여지껏 스릴러 소설의 연쇄살인마들은 순전히 쾌락을 위해 사람을 죽이고 지적 유희를 위해 탐정을 갖고 놀고 싶어하는 자들이 대세였음을 고려해보면 다소 씁쓸하다.
M.W 크레이븐이 창조한 이멀레이션 맨은 그만큼 현실이 변했다는 걸 상징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약자들은 무슨 수를 써도 정의를 보장받을 수 없는 시대와 사회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