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박현섭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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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단편선 - 안톤 체호프 - 10’ 5. 20 -

인생, 단순하고도 오묘한 것들

러시아 문학을 이야기 할 때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정도만 알고 있는 나에게 체호프는 낯선 삼음절이었다. 그러나 정작 러시아 본토에서 가장 사랑 받는 작가이고, 세계 최고 단편소설가라는 톨스토이의 찬사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책 두께도 얇아서 나처럼 게으른 독자도 부담 없이 책을 펼칠 수 있다.

열 작품은 단편답게 한편씩 읽는데 무리가 없다. 절반 정도 읽으니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인간이란 사회적 동물이 무리 지어 살면서 겪게 되는 여러 일상을 절묘한 익살과 해학으로 표현했다. 전체적으로 어둡지만 서정적 미학이 있어 그리 암울하지는 않다. 특히 읽고 나서 내용을 곱씹게 하는 그의 메시지 전달력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톨스토이의 찬사는 이 때문인 것이다.

작품 열 편 중, <내기>라는 글은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사교모임에서 돈 많은 은행가와 변호사가 사형제도에 관해 논쟁을 벌인다. 사형집행을 기약 없이 미루는 무기징역은 사형보다 나쁘다는 것이 젊은 변호사의 주장이고,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은 은행가의 주장이었다. 감정이 격해진 둘은 내기를 하게 되는데, 변호사가 15년 동안 외부와 차단된 채(책은 허용) 견딘다면 은행가가 거금을 주기로 한 것이다.

처음 1년 동안 변호사는 소설 등 가벼운 책을 주문한다. 그 다음 1년은 책 대신 술을 요구한다. 그 후에는 철학, 성서, 인문학, 과학서 등을 읽었다. 드디어 15년이 되기 하루 전날, 그 동안 무리한 투자로 재산을 탕진한 은행가는 변호사에게 돈을 주고 나면 파산 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그를 살해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때 변호사가 쓴 메모 하나를 발견한다. 오늘이 가기 전에 탈출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은행가는 자괴감에 빠진다. 다음 날 아침 변호사는 사라지고 은행가는 그 메모를 챙겨 금고에 소중히 보관한다.

인간에게 자유란 생명보다 소중한 가치일까, 절대 가치인 생명에 미치지 못하는 부차적인 것일까. 나는 이 질문에 많은 생각을 해야 했다. 변호사가 감옥에서 보낸 시간들은 마치 구도의 과정과도 같다. 자유를 빼앗긴 채 억압받는 삶 조차도 살아 있음으로써 의미 있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외로움에 절망하였다. 삶의 이유를 찾고자 철학에 매달리고, 종교에 귀의하게 된다. 결국 자유는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이 변호사의 결론이었다. 그는 마지막 날 탈출을 감행한다.

자유는 숨쉬는 공기와 같아 빼앗겨보지 않으면 소중함을 알 수 없다. 자유를 빼앗기면 더 이상 인간의 삶이 아니다. 나를 무척 놀라게 하고 각성케 한 그 대목이다.

십오 년 동안 나는 속세를 면밀히 연구했다. 내가 땅도 사람들도 못 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대들의 책 속에서 향기로운 술을 마셨으며, 노래도 불렀고, 사슴이며 멧돼지를 좇아 숲으로 달려 들어가기도 했으며 여인을 사랑하기도 했다. <중략>… 그대들의 책은 나에게 지혜를 가르쳐 주었다. 지칠 줄 모르는 인간의 사고 능력으로 몇 세기에 걸쳐 이룩해 낸 모든 것들이 나의 두개골 속에서 작은 언덕으로 쌓였다. 내가 그대들 누구보다도 현명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또한 나는 그대들의 모든 책을 경멸한다. 이 세상의 모든 행복과 지혜를 경멸한다. 그 모두가 시시하고 무상하며, 신기루처럼 공허하고 기만적이다. <중략>… 나는 그대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경멸을 표현하기 위해 내가 한때 천국을 꿈꾸듯 갈망했으나 이제는 하찮게 보이는 이백만 루불을 거부하겠다. 그 돈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박탈하기 위해 나는 약속한 기한이 다 되기 다섯 시간 전에 여기서 나갈 것이며 그럼으로써 스스로 계약을 위반하는 바이다. – pp 144, 145

책 내용이 한동안 머리 속을 맴돌았다. 속물적 인간인 나는 다섯 시간을 채워 약속한 돈을 받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쉽게 생각했다. 지금은 물질에 인간적 가치를 팔아 넘기지 않은 변호사에게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체호프 역시 이 말이 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처럼 체호프의 작품에서 유쾌함은 찾기 힘들다. 모든 작품에 묘한 익살이 깔려있다. 단 몇 시간을 남기고 떠나는 변호사, 자괴감에 빠져있다가 이내 메모를 챙기는 은행가의 모습에서 코믹함을 느끼지만 돌이켜보면 우울함이 남는다. 일상이라는 껍질에 가려진 인간의 본질, 인간의 참 모습을 웃음과 눈물, 연민과 비판 등의 절묘한 조화를 통해 오히려 인간에 대한 애정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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